요한복음: 우물가 여인의 목마름
예수께서는 주로 남쪽 사해 서쪽 산에 있는 예루살렘 (Jerusalem)/유대 (Judea) 지방, 그리고 북쪽 갈릴리 호수 (Sea of Galilee) 를 중심으로 한 갈릴리 (Galilee) 지방을 오가며 사역하셨습니다. 그 두 지방 사이에 위치한 것이 사마리아 (Samaria) 지방입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가는 길은 3개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는 168Km의 경로 (걸어서 편도 4일 정도) 가 최단 거리의 지름길이지만 유대 사람들은 구태여 시간이 더 걸리는 요단강 동쪽의 경로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여 상종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 Jew) 은 둘로 나뉘어 졌습니다.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뭉쳐 '남 유다'라고, 북쪽은 나머지 10지파가 모여 '북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갈라지기 전부터 원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남 유다의 수도로 남았고, 북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자신들의 수도로 지정했습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 삼십일년에 (BC 871),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열두 해 동안 다스렸는데, 여섯 해 동안은 디르사에서 다스렸다. 그는 세멜에게서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사마리아 산지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 산에다가 도성을 건설하였는데, 그 산의 소유자인 세멜의 이름을 따라서, 그 도성의 이름을 사마리아라고 하였다. (왕상 16:23~24)
두 나라 모두 외국의 침입에 의해 멸망했는데, 먼저 북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 (Ashur) 에 의해 망하고 남 유다가 BC 586년에 바벨론 (Babylon) 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앗수르의 왕은 혼혈 정책을 통해 이스라엘의 순수혈통을 더럽혀서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자기 나라 젊은이들을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옮겨 살도록 하고, 역으로 사마리아에 살던 이스라엘 젊은이들도 앗수르의 여러 도시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사마리아에서 쫓아낸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들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들은 그 곳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주를 경외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께서는 사나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 풀어 놓으셔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앗시리아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우리를 사마리아로 이주시키셔서, 이 성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리로 이주한 민족들은 이 지역의 신에 관한 관습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신이 우리들 가운데 사자를 보내어, 우리들을 계속 물어 죽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신에 대한 관습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줄 압니다." 그래서 앗시리아 왕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명을 그 곳으로 돌려보내라. 그가 그 곳에 살면서, 그 지역의 신에 대한 관습을 새 이주민에게 가르치게 하여라." 그리하여 사마리아로부터 사로잡혀 온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이, 그리로 돌아가 베델에 살면서, 주를 경외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각 민족은 제각기 자기들의 신들을 만들어 섬겼다. 그래서 각 민족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 안에서 만든 신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든 산당 안에 가져다 놓았다. 바빌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고, 구다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다.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으며, 스발와임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인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그들의 자녀를 불살라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을 공경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산당 제사장을 뽑아 세워,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도 경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잡혀오기 전에 살던 그 지역의 관습을 따라, 그들 자신들이 섬기던 신도 섬겼다. (왕하 17:24~33)
이방인들과 섞이면서 사마리아에는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배신 행위였기 때문에 남 유다 사람들은 혈통을 더럽힌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지 못한 백성이라고 욕하고 손가락질 했고 그때부터 남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일절 왕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70년만에 돌아온 남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돕겠다고 하는데도 거절 했습니다. (스 4:1~4; 느 2:19~20; 13:28)
사마리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끊어진 혈통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꾹 참고 있던 차에 사마리아인들을 크게 분노하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본래 '시온 산 (모리아 산)' 위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왔는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 출입을 금지하겠다고 일방 통보한 것입니다. 졸지에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를 잃어버리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BC 400년에 사마리아 수가 성 옆에 있는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 (그리심 산) 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 (그리심 산) 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요한복음 4:19~21)
자신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 없이 맘 편하게 예배할 수 있는 것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족하며 지내던 중, BC 128년 요한 힐카누스 장군이 이끄는 남 유다의 군사들이 쳐들어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 지어 놓은 성전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멸시를 받아도 묵묵히 수치를 견뎌왔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으나 이 일 후로는 이들 역시 유대인들을 무척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호 반목과 증오가 쌓인 채 서로 멀리하며 상대방의 땅을 지나가기조차 꺼려하며 보냈던 150여년 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예수께서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로 통과하셨습니다.
가던 길에 수가 (Sychar) 라는 마을 밖의 우물가에 앉아 쉬기로 하고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마을 안에 들어간 동안, 예수께서는 물을 길러 온 한 여자를 만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그 자리에 없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4:7~10)
'우물물'로 시작된 대화는 '생수(living water)' ⇒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함' ⇒ '5번 남자를 바꿨던 여인의 삶' ⇒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 ⇒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야' 로 이어졌고, 이 대화 가운데 여인은 자신이 만나 이야기 나누는 상대방이 오시리라 하던 그리스도 (Christ) 임을 깨닫습니다.
흔히 해석하듯 남편을 5번이나 바꿔친 '한 남자로 만족할 수 없는' 여인이었는지, 아니면 남편이 5번이나 연달아 죽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관점으로는 이방인들처럼 무시 당하던 사마리아 지방이라도,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율법과 예언을 믿으며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이 우물가의 여인이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이 여인의 마음 깊은 속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예배자의 갈망'이었던 것은, 예수께서 굳이 이 사마리아 길로 오셔서 대화를 통해 일깨워 주시기까지 여인 본인도 아마 알지 못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의건 타의건 '망가진' 삶을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그들의 깊은 내면에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심원한 '영적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겉 모습이 어떻든, 그들의 과거가 어떻든,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이신 분, 그 분이 예수셨고 그것은 그 분을 만난 사람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였습니다.
우물가 여인이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된 바 없으므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생활은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론은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달라지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앞 글("볼 수는 없어도 알 수는 있는") 에서 "거듭남 (born again)"의 현상(phenomena) 을 말하면서 이번 글에 조금 더 쓰겠다고 했습니다.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습과 행동에 관련된 것이니 증상(symptoms)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거창한 것 같지만, 첫 사랑에 빠져 눈에 콩깍지가 낀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증상 없는 상사병은 상사병이 아니지요.
- 말 그대로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어 합니다. ♫♪♪♫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
- 모세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거나 스데반처럼 천사같은 얼굴이 되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정도의 환희와 기쁨과 감사가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환희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합니다.
- 열등감이 심했던 경우, 본인의 모습에는 변한 것이 없지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겸손해 집니다. ("겸손", "가장 역겨운 죄")
- 중독 (술, 약물, 도박, 성 등) 에서 해방됩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이전에 목숨 걸 정도로 중요했던 것들이 '똥'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믿음 versus(?) 행위")
-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 기꺼이 포기하거나 손해볼 수 있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시간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심지어 삶 전체인 사람도 있고, 목숨인 사람도 있습니다. ("IHOP 사람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누가복음 18:24~27)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누가복음 19:1~2)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누가복음 19:8~10)
기독교인 중에 만약 일생 동안 이런 증상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거듭남"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분께서는 먼저 같은 교회 분들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증상을 심하게 보이는 분이 계시다면 당분간이라도 열심히 따라 다니시고, 주위에 어느 누구도 그런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교회로 속히 옮길 것을 권합니다. 비정상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계속 다녀봐야 시간 낭비, 돈 낭비입니다.
앞뒤가 바뀌지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저런 행동을 해서 사랑에 빠진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저런 증상들이 통제불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짝퉁 신앙") 그리고 '증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듭남"의 증상이 모두에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옛사람은 죽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옛사람이 호시탐탐 좀비(zombie)처럼 되살아 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꽃")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 15:31)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고전 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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