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유대민족에게 양 목축은 무척 중요한 삶의 부분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목자'라는 단어를 무척 많이 사용하고 (한글성경 기준 구약의 79개 절, 신약의 20개 절) 같은 의미의 명사와 동사는 더 많은 절에서 발견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21절에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문맥으로 보면 9장 35절의 눈을 뜬 시각 장애인을 다시 만나신 일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10장 21절의 선한 목자 발언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분열까지가 (또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말은 귀신이 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어떻게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같은 시간에 있었던 이어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나라에 따라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체로 좋은 이미지로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중동 지역에서는 양을 당나귀만큼이나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짐승으로 생각해서,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6) 중동에서 ‘양 같은 놈’이라고 하면 한국에서 ‘개새끼’라고 욕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가축으로서의 양이라는 짐승의 일반적 특성을 찾아보면
- 양은 지독한 근시라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인도가 없으면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가 있기 때문에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데다, 겁도 많은 짐승이라서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있을 뿐, 무리 짓는 것 자체가 다른 짐승으로부터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하지만, 양은 오물이 몸에 묻어도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목자와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세개의 동사(verbs) 로 양의 특성을 말씀하십니다.
- 목자와 그의 음성을 안다 (know)
-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hear)
- 목자를 따른다 (follow)
우리는 과연 목자의 음성(the voice of the good shepherd)과 타인의 음성(the voice of strangers)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가장 성경적인 모델은 '속한 공동체 속에서 그 분의 음성을 함께 들으면서 그 음성에 익숙해지는 자연스러운 학습 과정'을 통하는 것일텐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현대 교회는 이런 학습 과정을 상실한채 목회자의 설교에만 의존하고 있게된 듯 합니다 [His Voice (그의 음성)]
주제를 옮겨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전반부의 주제는 양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 (the good shephard, laying down His life on His own initiative)' 되신 그리스도 예수 본인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고 부탁하셨기에 (요한복음 21:15, 16, 17) 제자들은 목자로서 평생을 충성되게 헌신하다 모두 순교 당했고, 그 사명은 시대와 세대를 따라 지금까지 계속 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에 대해 말씀하시며 이와 대비되는 2가지 부류를 언급하십니다.
-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12~13)
-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요한복음 10:10)
얼마전 쓴 글에서 2,000년에 걸친 교회 역사를 볼 때 교회 타락도(墮落度)의 선행 지수(先行指數)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이 교회의 부(富)와 권력(權力)이며, 교회가 부하게 되는 이유는 복의 통로로 세상으로 흘려 보내야 할 존재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책임적인 위치가 부와 권력을 부여하는 자리가 되는 것은 교회에 큰 위험요소입니다. 음식에 파리 꼬이듯 신앙 안에서의 사명때문이 아닌,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탈을 쓰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규모에 비례해 무한히 커져온 담임목사의 부와 권력이 온갖 변칙 '세습'으로 이어진 것은 예측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심심치 않게 터지는 교회 내의 다툼은 뚜껑을 열고 보면 99%가 결국 '재정 비리' 그리고 '성추문'입니다. 교회 밖 선거는 그나마 점점 깨끗해지는데 반해 ㅎㄱㅊ은 물론이고 주요 교단 총회장 선거도 점점 더 편법과 돈에 물들어 갑니다. 이들은 좋게 봐줘야 삯군이고, 심지어 도둑일 수도 있습니다.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 나 주의 말이다.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너희의 그 악한 행실을 내가 이제 벌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23:1~2)
그래도 선한 목자로, 충성된 청지기로, 교회를 지켜나가는 목회자들이 아직은 한국 교회에 적지 않게 있어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부와 권력이 크게 자리 잡는 것은, 모든 추문을 계속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일 수 밖에 없어서, 가슴 아프게도 이 타락의 양상은 한국 교회의 양들이 상처 받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폭망할 때까지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참담한 현실을 겪고 있는 개신교는 중세 시대의 카톨릭 교회를 참고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황과 교구들 (modality) 이 돈과 권력에 취해 유럽 전체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있을때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냈던 것은 일부 선교단과 수도원 (sodality) 였습니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노예들이나 할 육체노동에 존엄성을 부여하여 유럽에서의 영농기술과 상공업에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매년 3월 17일이면 녹색옷을 입고 기념하는 성 패트릭의 날 (Saint Patrick's Day)의 주인공 패트릭(Patric)은 아일랜드 전체와 서부/동부 유럽의 복음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방랑 선교사 (peregrini) 들과 함께 아일랜드 수도원이 파송했던 사람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가 청빈, 겸손, 소박을 실천하자고 조용히 시작했던 탁발 수도회는 수세기에 걸친 교회 갱신의 발화점(發火點)이 되었고 이집트, 튀니지, 그리스, 프랑스, 모로코 등 해외에도 복음을 활발히 전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순전한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출석하는 교회 내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개 교회 소속과는 무관하게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곳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부와 권력에 관심이 없으며, 교회에서 돈을 받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돈을 들여가며 그 일에 힘을 씁니다. 제가 알고 있는 중에는 낮에는 평범하게 직장 일을 하면서, 교회 전임 사역자 못지 않은 시간을 들여가며 밤과 주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선한 목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사람도 있고, 함께 시간을 가지며 고민을 들어주고 그들과 더불어 울고 웃어주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것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 한사람과의 1:1 만남을 위해 매주 왕복 2시간 이상 거리의 고속도로를 운전해 다녀오는 사람도 있고, 차가 없으면 오도 가도 못하는 미국에서 한명이라도 더 교회 예배에 데리고 가고 싶어 매주 주일마다 승합차(van)을 렌트해 기약도 없이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도권 교회는 계속 무너져 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그루터기와 같이 남기셔서 끝까지 그분의 양들을 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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