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육신의 빵과 생명의 빵
오병이어 (五餠二魚,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약 5천명을 먹이신 이 사건은 4개의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기록한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 요한복음 6장).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택하시고 2명씩 짝지어 보내시며 마을마다 회개를 선포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게 하셨고 (마 10:5~15, 막 6:7~13) 당신께서도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시자 그 소문이 유대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세례(침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왕 (Herod Antipas)을 비판한 죄로 투옥된 상태였는데,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물었고 예수께서는 이사야 2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당신의 행한 일들로 지금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19, 눅 7:17~35)
얼마 후 세례(침례) 요한이 참수를 당하였다는 소식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졌고, 예수의 12 제자들은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예수께 보고 하였습니다. 계속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식사할 겨를도 없다 보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숫가의 디베랴 건너편 (요 6:1) 벳세다라는 외딴 곳의 빈 들로 가셨습니다. (눅 9:10)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예수의 일행을 알아보고 길을 따라 먼저 달려간 큰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 14:12~13, 막 6:29~32) 성인 남자들만 약 5천명 (남녀노소 다 합치면 아마도 2만 여명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피곤 하셨지만 군중들을 불쌍히 여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루종일 먹지 못한 채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은 이제 그만 사람들을 흩어 보내서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난데 없이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이 벳세다 지방 출신 (요 1:44) 제자 빌립에서 물어보셨습니다. (요 6:5)
갈릴리 지방은 빈곤한 지역이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그 날 하루를 공친 것이니 수중에 돈도 없을테고, 음식 싸가지고 다닐 정도의 형편이 되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 출신인 예수께서는 아마도 그런 사정을 잘 아셔서 배고프고 지친 군중들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한 입거리씩만 주어도 노동자 200일치 일당 (약 2천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 필요한 것이라 빌립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는지 예수께서 알아보라고 하시자, 제자 안드레가 와서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요 6:8~9)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잔디밭에 50~100명씩 모여 앉게하신 후 감사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음식들만도 12광주리 분량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감정적인 것에 대한 기록을 일체 배제하였으나, 음식을 받은 군중들과 12제자들이 이 엄청난 기적에 얼마나 놀라고 흥분하였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군중들이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라고 선포할 때가 왔다고 아마도 한껏 고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즉시 재촉해서 군중들에서 격리시킨 후 배를 테워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떠나보냅니다 (요 6:17, 막 6:45에는 벳세다로 가게 했다고 기록) 그리고는 사람들을 헤쳐 돌려보내고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완전 반대 되는 것입니다. 상식대로라면 다음 번 집회는 언제 어디서 모일 것이라고 안내도 해주어야 하고, 그 집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고도 해 관심도 고조 시켜야 하고, 많이 모일수록 좋은 것이니 왔던 사람들에게 '최소한 한사람씩은 꼭 더 데려오라' 고 독려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행선지조차 알려주지 않은채 군중으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오셨습니다.
배를 타고 호수 안으로 5Km 정도 갔을때 제자들은 큰 바람과 파도를 만나 고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동서 직경이 약 10Km 정도이니 호수의 정중앙에서 바람을 만난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형상 만년설이 덮이는 헐몬산까지 이어지는 산악 지대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에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시리아 사막지대가 있는 해발 마이너스 100m 의 저지대라서 더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수시로 교차하면서, 바다와 같이 예측 못하게 강한 바람과 파도가 종종 생기고 심할 경우 20m 이상의 높이까지 물이 튈 정도의 파고를 보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셨으나 새벽 3~6시가 되어서야 (밤 4경, 마 14:25, 막 6:48) 걸어서 제자들의 배로 가셨습니다. 풍랑이 이는 물 위를 걸어와 그냥 지나쳐 버리시려는 (막 6:48) 예수를 보고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라고 소리를 질러댔으나,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하자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고 말하고 그 역시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갔습니다. 잠시 의심하여 물에 빠질뻔 하기도 했습니다. (마 14:26~31)
상황을 보면 마치 예수께서 오병이어 (五餠二魚)의 기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들떠 있던 제자들을 일부러 풍랑 속으로 밀어 넣어 하룻밤 꼬박 고생을 시킨 것 같아 보입니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죽을 고생하는 동안 홀로 산에서 계셨던 예수께서는 그럼 과연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기록된 바 없지만, 요한복음의 흐름으로 본다면 아마도 엄청난 기적으로 한껏 높아졌을 12제자들의 '부심' 과 '야망' 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와 12제자가 탄 배가 건너편 게네사렛 (마 14:34, 막 6:53. 요한복음 6:24에는 게네사렛의 북쪽 인접 땅인 가버나움이라고 기록) 에 도착했고 그 지역 사람들이 병자들을 계속해서 예수께 데리고 왔다는 내용으로 이 사건의 기록을 마칩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서를 보완하기 위해 쓰인 요한복음은 이 사건에도 다른 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본론으로 추가 합니다.
배불리 빵을 얻어 먹었던 군중들이 다음날 디베랴(Tiberias, 갈릴리 지방의 수도)에서 배를 타고 (요 6:23) 벳세다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홍보보다 강력한 것이 viral한 (바이러스 같은) 입소문입니다. 실체가 있는 진짜 좋은 것이라면 사람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해서라도 찾아내고야 맙니다. 예술가가 아니라도 좋은 음악, 좋은 미술, 멋진 풍경,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을 찾아 적잖은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먼거리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데, 세상의 구세주를 진짜를 만난다면 던져버리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럽 교회의 전철을 따라 한국 교회도 쇠락기에 접어들기 시작한지가 꽤 되었습니다. 설문 조사를 해보면 기독교라고 답하는 사람들은 아직 줄지 않았지만 더 좋아진 건물, 더 세련 되어진(?) 설교, 더 다양해진 프로그램, 더 좋아진 음악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교인 (교회에는 '안 나가'는 교인들) 들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식당에 비유하자면 인테리어와 데코레이션은 점점 훌륭해졌는데 그에 반비례해 정작 viral한 입소문을 낼만한 음식의 맛을 잃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투명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주방 위생관리 시스템으로 운영하다 가끔 음식에 바퀴벌레, 심지어는 죽은 쥐까지 발견되는 불상사만 입소문이 나 버리니 그런 식당이 지속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한번 발길을 돌려버린 손님은 웬만해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딱 한척 있는 배를 타고 제자들만 떠났고 예수께서는 홀로 남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봤는데 예수께서 벳세다에 계시지 않자, 군중들은 배를 나눠타고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와 예수를 찾아 만나고는 대체 언제 오셨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 온 군중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그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며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닌,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기위해 일하라"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6:51, 53, 54, 63)
기적을 전혀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소년의 나눔이 부싯돌이 되어 모인 사람들이 너도나도 자신의 음식을 나누게 된 아름다운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이 일어나게 된 중심에 '선한 선생 예수'의 정신과 교훈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나눔은 여유분을 나누고, 부자가 돼 불쌍한 사람은 돕는다는 것이라기보다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만들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김규항의 <예수전>)
'인간 예수' 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예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것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As God has shown us by turning stones to bread", 노래 "We are the World" 가사 중에서, YouTube) 저는 성경의 내용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다는 분들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반면 성경에서 A라고 쓰여 있는 것을 B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좀 거시기 합니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 4:2~4)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 많은 군중들을 먹이는 기적을 보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해주어야 할 일은 다시 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위에 옮겨 적은 예수의 말씀은 '내게 일용할 빵을 공급할 구세주'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무척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헛소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수군대기(grumble, 투덜대기, 군지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요한복음 6:42)
갈릴리 사투리로 말해졌을 이 내용을 한국 사투리로 옮긴다면 대략 이런 뉘앙스라고 하겠습니다.
“야가 시방 무슨 말 하는겨? 야는 아랫마을 조서방네 첫째아들 개똥이 아닌겨? 지 에비 에미도 우리가 알고, 지 어릴때 똥 질질 싸며 컸던 것 다 봤는디, 뭐여? 하늘에서 내려왔다고라? 게다가 지 살을 먹으라고라? 야가 지금 제 정신인겨?”
원하던 빵을 더이상 주지 않고 이상한(?) 말만 하자 결국 12제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군중은 예수를 떠나 다시는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 전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두개의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그룹은 '빵 주는 선한 선생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정신착란에 가까운 신성모독의 말을 계속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여 결국 떠났고, 다른 한 그룹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 하지만, 보여준 기적들을 봤을때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여 어떻게든 그 말씀을 이해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여 남았습니다. 물론 이날 떠났던 사람들 중에는 훗날 생명의 빵을 찾아 다시 온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의 경계선을 전날 와서 빵 먹은 사람과 오지 않은 사람 사이에 두지 않고, 오늘 떠나버린 사람과 남기로 한 사람들 사이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정말 멍청한 말이 있다. 난 그 말이 다시는 안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인 선생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정말 말이 안되는 말이다. 만약 그저 인간이기만 한 어떤 사람이 예수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도덕적 선생이 될 수가 없다. 그는 미쳤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 정도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한다. 이 예수라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정신병자 혹은 그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미쳤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침을 뱉고, 혹은 그를 죽여버릴 수가 있다. 아니면 그의 발에 엎드려 그를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봐주는 척 하면서 예수가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런 선택권을 남겨주지 않았다. 그는 절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육신의 빵을 주어야 할 사람과 상황과 때가 있고, 생명의 빵을 주어야 할 사람과 상황과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빵이 필요한 사람에게 생명의 빵만 주려하거나, 생명의 빵이 필요한 사람에게 육신의 빵만 주려할 때 생깁니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두가지 빵을 다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육신의 빵을 주는 목적이 '불쌍히 여겨서'가 아닌 '군중들을 계속 더 모이게 하기 위해서'라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 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서구의 기독교에는 더 이상 교회가 육신의 빵을 먹여주어야할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에서는 군중들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성경과는 다른 믿음의 경계선을 가르치며 계속 육신의 빵에 대한 약속만으로 그 군중들을 남겨두려 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생명의 빵'은 뒷전으로 미뤄지게 되었고, 그 군중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있다는 착각 속에서 계속 모이게 되면서 점점 예수께서 정말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에서 혹 멀어지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빵을 먹은 군중들이 그 분의 나라 (His Kingdom)와 의를 구하며 생명의 빵도 먹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 교회는 '부와 건강과 명예와 편안에 대한 약속'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세상학문에서 배운 '위안과 격려' 가 마치 생명의 빵인듯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를 보러 광야로 나간 걸까요?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왕궁에 간 것일까요?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마태복음 11:7~9)
[부연설명: 헤롯과 헤로디아]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오시리라 한 메시야에 의해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2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학살했던 왕이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 헤로데 1세, 마태복음 2장)이고, 그에게는 10명의 아내와 14명 이상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네 1 (Mariamne I)과 결혼을 하려는데 본 부인인 도리스 (Doris)가 거침돌이 되자, 도리스와 그 아들 안티파터 (Antipater)를 유배 보내 버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헤롯 대왕은 두 모자를 다시 불러들여 안티파터 (Antipater)를 왕위 계승자로 책봉 합니다. 그러나 안티파터 (Antipater)는 자신이 유배된 동안 마리암네 1 (Mariamne I)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제 알렉산더 (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 (Aristobulus)로 인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계속해서 그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결국 처형시키고 맙니다. 그러고도 안티파터 (Antipater)는 여전히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아버지를 독살하려고 모의를 하다가 발각 되어 헤롯 대왕이 죽기 불과 며칠 전에 처형되고 어머니 도리스는 다시 유배 됩니다.
안티파터를 처형한 헤롯 대왕은 디베료 (Tiberius Caesar Augustus) 황제 때, 나라를 나누어 아들 중 헤롯 아켈라오 (Herod Achelaus), 헤롯 안디바 (Herod Antipas), 그리고 헤롯 빌립 2 (Herod Philip II)가 각각 다스리게 했습니다. (마 2:22,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눅 3:1,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헤롯 대왕의 손녀인 헤로디아 (Herodias)는 삼촌인 헤롯 빌립 1 (Herod Philip I)과 결혼하여 딸 살로메 (Salome)를 낳았는데 (적지 않은 참고 자료에서 헤로디아의 본 남편이 분봉왕 빌립 (Philip II)인 것으로 설명하는데 잘못된 내용입니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 (Aristobulus)는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어느 날 도리스와 그 아들 안티파터가 왕의 독살을 꾀한다는 것을 시어머니인 마리암네 2 (Mariamne II)가 알게 되었음에도, 자신의 아들 헤롯 빌립 1이 도리스의 아들 안티파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비밀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안티파터가 발각되어 처형 당하면서, 마리암네 2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유배 당했고 그 아들 헤롯 빌립 1은 왕국의 후계 구도에서 완전 배제 되었습니다. ("Who Was Herod? Wait… There Were How Many Herods?!") 헤로디아가 하스몬 왕조의 적통 후손이지만 모든 지위를 잃게 된 상황 중에, 그녀의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디바 (Herod Antipas) 분봉왕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자, 둘은 각각 자신의 남편과 아내를 버리고 결혼을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형제의 아내를 빼앗은 결혼이 옳지 않다고 세례(침례) 요한이 책망하자 이 말을 못마땅하게 여겨 요한을 체포해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래도 헤롯 안디바는 양심이 남아있는 사람인지라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 두려워 하며, 쓴 소리지만 달게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가 헤롯 안디바의 생일에 딸을 동원해 안디바의 허영심을 부추켜 결국 요한을 참수시킵니다. 성경에는 헤로디아의 딸 이름은 나오지 않고,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는 사건 기록 없이 이름만 살로메로 나옵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의 희곡 "살로메 (Salomé)"와 이를 바탕으로 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Georg Strauss)의 오페라는 성경의 내용과는 무관한 픽션(fictio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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