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정체성을 여러가지 핵심단어 (keywords)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단어들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 (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 I AM)"라고 직접 선언하신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 출애굽기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I AM (스스로 있는 자)"라는 고유 명사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I AM has sent me to you.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출애굽기 3:14)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생명의 빵',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길/진리/생명', '부활/생명', '참 포도나무' 라고 하셨고,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요 7:37~38)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자아 선언을 하셨던 때가 유대인의 특정 절기였음을 명시함으로 독자들에게 그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매년 지켜야 하는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칠칠절/맥추절, 초막절/수장절입니다)
1. 생명의 빵
지난 번 글 "육신의 빵과 생명의 빵" 에서 설명한 오병이어 (五餠二魚) 사건은 유월절(踰越節, the Passover, פסח 페사흐)이 가까왔을 때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벗어난 때를 니산(נִיסָ֗ן)이라 부르는 첫 달로 잡습니다.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출애굽기 12:2) 그래서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설날이요, 광복절/독립기념일과도 같은 가장 큰 명절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400년 넘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어 약속의 땅으로 떠나던 날이 바로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은 첫 달 10일이 되면 한 가족 당 한 마리씩 어린 양을 준비하고 대청소를 시작 합니다. 바닥을 깨끗이 쓸고 닦는 것은 물론이고, 선반은 구석까지, 벽은 천정까지 깨끗이 닦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쓸고 닦는 것은 먼지를 털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효모 (leaven, 누룩)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무교절 기간에는 아무리 적은 분량의 효모라도 밀가루 반죽에 내려앉으면 빵이 부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이 끝난 후에 만든 빵들은 모두 새 효모로 만들게 됩니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 고린도전서 5장 7~8절) 준비한 어린양은 유월절인 14일 저녁에 잡아, 이집트 전역의 맏아들과 첫 수컷을 죽인 죽음의 사자를 넘어가게 (pass over) 하기 위해 그 피를 양쪽 문기둥과 위 가로대 (doorposts and lintel)에 뿌린 다음 그 양고기를 구워 먹고,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 간은 무교절(the feasts of Unloavened Bread)로 과거 이집트를 탈출할 때 급해서 효모를 넣지 않은 딱딱한 빵을 먹었던 때를 기념하며 발효되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벳세다의 빈 들에서 군중들에게 빵을 나눠주신 것은 그들이 하루종일 굶주리고 지쳤기 때문이었지만, 빵을 찾아 다시 온 사람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월절/무교절에 일주일간 먹어야 하는 빵의 본래 의미를 상기시키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 생수의 강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하자, 그것을 피하여 갈릴리에 머무셨던 예수께서는 약 6개월 후인 초막절(草幕節, the Feast of Tabernacles, סוכות 수코트) 에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은 과일 나무의 수확을 기뻐하는 일주일간의 수장절(收臧節)과 연결되어서 아시아의 추석이나 미주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긴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때인지라, 초막절 기간의 마지막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적당한 비를 주시기'를 기원하며 ‘심핫 베잇 하쇼에바’라는 물의 의식을 행합니다. 이 의식은 제사장이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 금물병에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 위에 부으면서 과거 자기 조상들에게 출애굽의 광야 길에서도 물(생명)을 공급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민 20:8~10), 또 추수 때 내려 주실 풍족한 비를 간구하며 이사야 12장 3절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을 암송합니다.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외치셨던 때가 바로 이 의식을 하는 7일째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요한복음 7:37) 였습니다. 육신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이 날, 농사를 짓기 위한 물과 비를 간구할 것이 아니라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기쁨의 생수를 위해 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3. 세상의 빛
초막절 마지막 날 낮에는 물의 의식이 있고, 첫날 저녁 시간에는 빛의 의식이 있습니다.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이끌어 주었던 불기둥을 기념하기 위한 이 의식에 대해 탈무드의 기초인 <미쉬나(משנה)> 두 번째 책 <모에드 (דעומ)>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막절 절기의 첫 날이 끝나갈 때 사람들은 여인들의 뜰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황금 등대들이 있었는데, 등대들 각각에 네 개의 황금 주발들이 놓여 있었으며 그 곁에 네 사다리들이 있었다. 제사장 계열의 네 명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손에 기름 종지를 들고 주발마다 기름을 채웠다. 등대에 사용하던 심지는 제사장들이 입던 바지나 앞치마 등으로 만들었다.
이 황금 등대가 밝힌 빛에 의해 예루살렘의 뜰이 밝혀지지 않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경건한 사람들과 그 의로운 행실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무리들 앞에서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었으며, 그들 앞에서 노래와 찬양을 불렀다 " [출처: How 주석 시리즈]
생수의 강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셨다가 다음날 아침 성전으로 돌아오셔서 가르침을 계속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함정에 빠뜨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 '간음하던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왔는데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요한복음 8:7) 유명한 말씀으로 둘러싼 많은 사람들을 다 떠나가게 하신 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며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8:12)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신약 교회들도 크리스마스, 부활절등의 여러가지 절기를 열심히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절기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체험적으로 만나고 알지 못한다면, 그 절기를 지키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구약만을 믿는 유대인들의 지키기보다 우리가 본질에 더 가까운 점은 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혹 오늘도 현대 교회에 일년마다 돌아오는 단순한 절기가 아닌, 그저 특별순서로서의 연극과 성가로 채워진 쇼(show)가 아닌, '생명의 빵',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길/진리/생명', '부활/생명', '참 포도나무' 를 맛보아 알라고 외치고 계시지는 않는 걸까요?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호세아 2:11)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1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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