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현대교회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安息日, Sabbath, שבת 샤밭)을 범했다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지적 받는 일이 여러 번 나옵니다. 7년에 한번 쉬는 안식년과, 7번의 안식년 후에 50년마다 또 쉬는 희년(禧年, Jubilee, יובל 요벨)의 규정도 있으나, 그중에서도 안식일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직접 받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중 제4계명인지라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지금도 매주 토요일을 안식일로 준수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애굽기 20:8~11)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지적할만한 일들을 안식일에 여러차례 행하셨고, 이것은 유대인들(특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죽이려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대체 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을 범하신 것일까요?
<미쉬나(משנה)> 두 번째 책 <모에드 (דעומ)>에는 다른 절기와 더불어 '안식일'의 규정들이 무척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정리한 내용으로, '장로들의 유전(遺傳)' (마가복음 7:3) 이라 칭합니다.
1. 씨뿌리지 말 것
2. 밭 갈지 말 것
3. 곡식 단을 묶지 말 것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곡식을 타작하지 말 것
6. 곡식을 까부르지 말 것
7.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지 말 것
8. 곡식을 빻지 말 것
9. 채질하지 말 것
10. 반죽하지 말 것
11. 굽지 말 것
12. 양털을 깍지 말 것
13. 세탁하지 말 것
14. 빗질하지 말 것
15. 염색하지 말 것
16. 실잣기하지 말 것
17. 날실을 펴지 말 것
18. 두 잉아(베틀의 굵은 실)를 만들지 말 것
19. 두 실을 엮지 말 것
20. 두 실을 분리하지 말 것
21. 매듭을 짓지 말 것
22. 매듭을 풀지 말 것
23. 두 박음 바느질을 하지 말 것
24. 두 박음 바느질을 하기 위해 찢지 말 것
25. 사슴 (과 같은 짐승들을) 사냥하지 말 것
26. 짐승을 도살하지 말 것
27. 짐승 가죽을 벗기지 말 것
28. 소금에 절이지 말 것
29. 가죽을 말리지 말 것
30. 머리털을 밀어 매끄럽게 하지 말 것
31. 재단하지 말 것
32. 두 글자를 새기지 말 것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34. 집 짓지 말 것
35. 집을 헐지 말 것
36. 망치질 하지 말 것
37. 불을 끄지 말 것
38. 불을 피우지 말 것
39. 공적 장소에서 사적 장소로 물건을 옮기지 말 것
엣세네파의 "다마스커스 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규정들에 대해서 더 엄격한 기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고 (당시의 랍비들은 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음) 마실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 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으며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지적했던 상황들을 복음서에 기록된 순서대로 좀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번째 사건입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 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복음 12:1~8)
우리 생각에는 남의 밭 곡식에 손을 댄 것이 절도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자체는 율법에 허용된 것이라 평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 신명기 23:25)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았던 부분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장로들의 유전'에 적힌 안식일 규정 중 3가지를 위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타작하지 말 것 6. 까불지 말 것)
'장로들의 유전'은 위의 39가지 규정 외에 '환자의 치료'에 관한 규정도 하고 있습니다.
기름을 바르고 배를 문지를 수 있지만 주무르거나 긁어서는 안 된다. 코르디마에 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구토제를 사용한다거나 아이(의 팔다리)를 편다거나 골절 부위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 만약 손이나 발이 빠졌다면 찬물로 치료해서는 안 되며 보통 때처럼 씻는 것은 가능하다. 만약 치유가 된다면 치유가 되는 것이다. (미쉬나 모에드 샤밧 22:6)
만약 어떤 사람이 목에 통증이 있다면 안식일에도 그의 입에 약을 떨어뜨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이 위태하고(תושפנ קפס), 생명이 위태한(תושפנ קפס) 모든 경우는 안식일[법]을 능가한다. (미쉬나 모에드 요마 8:6)
상처 부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 아픈 배를 문지르는 것, 피부 질환 환부를 뿔/상아/금속으로 긁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민간 치료요법입니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긴급한 경우의 최소한의 응급 처치 외에는, 평일에 하듯 제대로 치료하는 것은 노동으로 여겨 금지하였습니다. 배탈이 나도 구토제와 같은 약을 복용하는 것은 노동이고, 골절이나 탈골이 되어도 맞추려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는 것은 물론이요, 냉수 찜질조차도 노동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코르디마’는 유대인 중세 주석가 라쉬의 견해에 의하면 강 이름으로 추정하며, 내려가다 강가의 진흙에 미끄러져 옷이 더러워질 가능성 때문에 안식일에 내려가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번째부터 여섯번째 사건은 모두 병을 고치셨다는 것에 대한 시비였습니다. 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일, 18년간 병때문에 굽어 있던 허리를 펴주신 일, 수종병(dropsy, 림프액이 위나 늑막등에 고여 몸이 붓는 병) 환자를 고치신 일, 38년간 병으로 누워있던 사람을 고치신 일, 날 때부터 소경이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을 일부러 안식일에 하셨습니다. 제대로 치료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치를 시켜버렸으니'장로들의 유전'에 명백히 위반되는 일을 하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12:9~13)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 났소"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인은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으므로,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마시오."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 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누가복음 13:10~17)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그들은 예수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앞에 수종병 환자가 한 사람 있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그 병자를 붙잡고 고쳐 주시고, 돌려보내신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대답할 수 없었다. (누가복음 14:1~6)
거기에는 삼십팔 년이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 환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으로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pallet) 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시니,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요한복음 5:5~10)
⇨ 여기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 외에도, 병이 나아 돗자리를 들고 간 병자에게도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39가지 규정중 마지막 '39.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 것'을 위반한 것입니다. 이 규정은 심지어 화재가 발생했을 때에도 안식일 동안 먹을 음식 (화재 발생 시간에 따라 저녁이면 세끼분, 아침이면 두끼분, 오후면 한끼분) 외에 집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로 엄격한 준수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을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요한복음 9:6~14)
정리해보면, 예수께서 범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아닌, 안식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장로들의 유전'에 있는 규정들이었습니다. 그럼 '장로들의 유전'은 대체 왜 생겨난 것일가요?
유다 왕국은 BC 586년에 바벨론 (Babylon)에 패망한 후로 계속 다른 나라에게 유린을 당하면서, 거의 600년에 걸친 오랜 세월동안 외세의 압제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한 때 대다수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나라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이런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내린 결론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민중 봉기에 가담하고 (열심당), 어떤 사람은 외딴 곳에서 세상과 격리된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했습니다 (엣세네파). 이 중 한 그룹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준수하지 않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 짓고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영적 각성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들 가운데 특별히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열심으로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준수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함으로써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삶을 보급하고 알리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쳐 노력하였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Pharisees) 들입니다.
이들의 본래 의도는 지극히 선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의 계명은 그저 애매모호하고 간단하게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하루 종일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계명은 확실하게 지키고 싶으니,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실제 상황들을 다 고려해서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풀이해준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를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명하신 것과 정반대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왜 명하셨습니까? 모든 인간들과 가축들과 심지어는 땅 조차도 계속 일만하면 지탱할 수 없으니 그러지 말라고 인간/가축/땅을 위해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일 하지 말라 (do not work)'고 하셨으나 그 의미는 '쉬어라 (do rest)'고 하신 것인데, '장로들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그 쉼이 무거운 짐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들은 '관계'를 무미건조하고 메마르게 만듭니다. 부부 간에 '사랑하면'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습니다. 격려의 말도 하고, 시간도 함께 보내고, 선물도 주고, 가사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스킨쉽도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날 사랑한다면 구체적으로 정한 '사랑의 행위 A, B, C'를 매일 부지런히 하라"고 강요해서도 안되고, 또 의무적으로 매일 부지런히 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제한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만큼만 하면'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사랑은 이미 식은 것이지요.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유전'은 결국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아무 의미 없는 의무로 변질시켜 버렸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유와 기쁨 대신 거대한 멍에를 지우고 말았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28~30)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3:3~5)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마태복음 23:13)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1~32)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중심으로 마음이 굳어진 것을 비판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기 원해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아닌 평일에 훨씬 많은 치료를 하셨습니다. 그저 몇번의 치료가 안식일에 있었을 뿐이지요. 만약 갈등을 피하시고 싶으셨다면 평일에만 하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의 의미를 가르치기 원하셨기 때문에 구태여 그 갈등 상황에 정면 충돌하기를 선택하셨고 결국은 그것은 예수를 죽음으로 이끄는 주된 요인 (main driving factor)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멍에'라고 할 수준의 구체적인 지침을 강요한 적은 없고 대신 '최소한 지켜야 할' 몇가지 지침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3가지가 주일 성수, 금주, 금연이었습니다.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처음 왔던 구한말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리고 한국의 음주 문화를 보면 금주, 금연을 왜 교회에서 강조를 하게 되었는지는 납득이 가고, 사실 술과 담배로 인한 사회적 폐해는 지금도 생각보다 엄청납니다. 보통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상황도 대부분 술 취했을 때 범하지요. 한국에 있을 때 회식하면 2차까지는 늘 가서 맨 정신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예, 저 술 마시지 않습니다) 평소에 괜찮은 사람들이 술 취하면 어떤 종류의 멍멍이로 돌변하는지 잘 압니다. 아주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금주를 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술에 취하거나, 술에 인 박이지 (addicted to much wine)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지요. 되려 대홍수로 전 세계 사람들이 죽었을 때 남겨졌던 당대의 의인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추태를 벌였으나 책망을 받지 않았고 (한 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창세기 9:21), 화목제를 드리고 함께 먹을 때 독한 술도 허용했으며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신명기 14:26), 괴로와 하는 사람에게 술을 주라는 말씀도 있고 (독한 술은 죽을 사람에게 주고, 포도주는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주어라. 그가 그것을 마시고 자기의 가난을 잊을 것이고, 자기의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잠언 31:6~7),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이미 취한 사람들 더 만취하라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으며 (요한복음 2:1~10), 본인은 유대인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태복음 11:19) 라고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금하지 않은 금주, 금연이 마치 믿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할 행동으로 강요하다보니, 끊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만 오면 '아닌척' 행세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끊은 사람들은 마치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생활이 거룩하고 성결하다고 '착각'하며 끊지 못한 사람을 정죄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바리새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요?
<나침반>이란 출판사에서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라는 제목으로 책을 종종 냅니다. "당신의 자녀교육: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당신의 교회생활은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당신이 믿고 있는 교리,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등등. 현대 교회는 과연 전통보다 성경을 얼마나 더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교단과 교리를 중심으로 전통을 중요시하며, 관계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면 그 교회는 종교적 집단일뿐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며 결국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믿음 없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사랑하는 관계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상호신뢰를 깨뜨림으로써 관계를 파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라’고, ‘나를 따르라’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이 명령은 지극히 추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해석하고 싶어하고, 또 규정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그 명령은 원래의 뜻을 상실하면서 축소되고 맙니다. 사랑은 결코 실천항목 몇가지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일차적 문제점은 율법을 '해석의 테두리' 안으로 국한(confine) 했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 제한된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더 크고 중요시 여김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하나님의 의로우신 위치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사랑은 나와 상대방에게 참된 자유를 줍니다.
순종의 내용은 따로 있는가? 아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 것이 전부이다. 그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철두철미 내용 없는 일이다 (p. 40)
따라오라는 예수의 부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모든 법칙과의 단절을 뜻한다. 좇음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은 따름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이념적 파악, 은혜와 죄 사유의 체계와 그에 대한 일반 종교적 인식은 따름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배척하고 적대시할 것이다. 이념은 인식과 감격, 혹은 그것의 실현을 요구할 뿐 인격적 순종과 따름은 불필요한 것이다. 산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반드시 순종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순종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라 하겠다. (p. 41).
자유한 양심적 인간은 순종하는 자녀를 칭찬한다. 윤리적 갈등을 방패 삼아 순종은 오히려 과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현실에서 인간의 가능성에로, 신앙에서 의심에로 돌아오는 길이다. (p. 56)
청년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물었고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핵심은 '나는 너를 부른다'였다. (p. 59)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이 물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반역하는 것이다. 순종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이 할 일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애매하여서 나를 영원한 미궁에 몰아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라는가?"라는 물음은 이미 속임수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네가 아는 것을 행하라" 외에 없다. 묻지 말고 행하라! (p. 61).
Dietrich Bonhoeffer 著 <나를 따르라> 중에서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2) | 2022.05.29 |
---|---|
요한복음: 포도나무의 열매 (2) | 2022.05.21 |
요한복음: 인자의 영광 (0) | 2022.05.13 |
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4) | 2022.05.09 |
요한복음: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0) | 2022.05.07 |
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0) | 2022.05.03 |
요한복음: 육신의 빵과 생명의 빵 (6) | 2022.04.27 |
요한복음: 우물가 여인의 목마름 (2) | 2022.04.23 |
요한복음: 볼 수는 없어도 알 수는 있는 (1) | 2022.04.19 |
요한복음: 만민이 기도하는 집 (4) | 2022.04.17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2022.05.09 -
요한복음: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요한복음: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2022.05.07 -
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2022.05.03 -
요한복음: 육신의 빵과 생명의 빵
요한복음: 육신의 빵과 생명의 빵
2022.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