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요한복음 9장은 예수께서 날 때부터 시각 장애였던 사람을 고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요한복음 9:1~3, 6~7)
많은 나라에 편만하듯, 심한 병은 지은 죄로 인한 인과응보(因果應報) 라는 관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무척 보편적이었습니다. 문둥병으로 불리는 나병(한센병, leprosy)를 과거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불렀듯, 한국도 이런 관념은 마찬가지였지요.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요 9:2)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요 9:34)
병과 죄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문란한 성생활로 성병에 걸려 고생할 수도 있고, 임신 중 약물이나 과도한 술 담배를 한 엄마로 인해 아기가 기형으로 태어나 평생을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병으로 고생할지도 모른다.” (요 5:14)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경우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 9:3)
눈을 고쳐주신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 하나때문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 뜨게 된 사람과 그의 부모를 소환해 질문을 던집니다. 답은 들었으나, 그들이 원한 답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차 소환해서 자신들이 원한 답을 강요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은 쫓아냈습니다 (they had put him out).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말하였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요 9:16~17, 20~22, 24~29)
'회당에서 내쫓다 (be put out of the synagogue)' 는 표현은 단순히 건물에서 내어 보냈다는 뜻이 아닌 회당 출입을 금지하는 것으로 유대교에서의 출교(黜敎, excommunication)를 의미합니다. 모든 생활이 종교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대인들 사회에서, 출교는 공동체 자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장 큰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사람은 회당 모임에 나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회당 2m이내의 접근조차 금지되었으며, 다른 유대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금지 되었고, 그 사람에게 물건을 팔거나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 되었습니다. 죽어도 그를 위해 우는 것을 금하였으며 시체에는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요 12:4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하리라" (요 16:2)
비록 출교라는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될 상황에 몰렸지만, 눈 뜬 사람은 자신에게 벌어진 사실을 바꾸거나 왜곡하지 않으려했기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이 사건에서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면서, 나오지 않는 답을 찾겠다고 쳇바퀴를 도는 바리새 사람들은 마치 '전혀 잘못된 경계 조건 (boundary conditions)을 대입한 채 방정식을 풀겠다'고 하는 수학자와도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이 '전혀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사람들이기에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복음 9:41)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눈먼 사람'들이라고 칭하며 신랄하게 책망을 하십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하고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또 너희는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하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마 23:16~26)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확신이 지나쳐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폐기하거나 심지어는 바꾸고 왜곡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위에 많습니다. 정치적인 계파와 진영 논리에 갇혀 버린 사람들, 주어진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연역적으로 데이터를 생산해 내려는 과학자들, 무슨 책을 읽어도 결국 자기 사고의 틀에 맞게 다 잘라내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해버리는 독자들...
현대 교회는 어떨까요? 설교자들과 리더들은 Ctrl-C & Ctrl-P (copy & paste, 복사해 붙여넣기)에 갈수록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청중에게 '감동'만 주면 모든 것이 합리화 되는 풍조가 만연하고 늘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자료의 검증 같은 것은 거의 뒷전이 되는 상황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묵상보다는 참고 서적이나 예화집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쉽지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직접 보거나 읽지 않은 내용도 마치 직접 본 것인양 뻥쳐가며 가져다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 한명이 잘못된 내용을 말한 것이 인터넷 타고 돌고 돌아 결국 기정 사실화 되어버리는 상황이 교회에서도 벌어지곤 합니다. ("목사님, ‘빠삐용’ 영화를 보고서 얘기를 하셔야지요~")
이런 풍조 속에 '눈먼 사람'들의 의견도 디지털 무한 복제로 돌아 다니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마태복음 15:14,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6:39) 필요하면서도 같은 위험성에 빠뜨리는 것이 결국은 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각 교단마다 교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자리잡게 된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으나, 교리는 결국 '장로들의 유전'과도 같은 것이라서, 성경을 대체할 위험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octrine (교리)"). 카톨릭 교회가 이전 교황들의 '말과 해석'을 성경과 같은 권위에 올려 놓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성경의 내용과 상치되는 것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개신교에서 교단마다 자의적 해석을 진리로 굳게 믿어 서로 이단이라고 싸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교리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성령 운동'에 대해 비평적으로 혹은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읽고 있자면 '성경대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 살았던 바리새인들의 자가당착적인 행동과 사고방식을 답습하는 것 같은 답답함이 몰려옵니다. ("IHOP 비판에 대한 소견")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아니 보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한복음 14:11)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4) | 2022.06.06 |
---|---|
요한복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2) | 2022.05.29 |
요한복음: 포도나무의 열매 (2) | 2022.05.21 |
요한복음: 인자의 영광 (0) | 2022.05.13 |
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4) | 2022.05.09 |
요한복음: 현대교회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2) | 2022.05.05 |
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0) | 2022.05.03 |
요한복음: 육신의 빵과 생명의 빵 (6) | 2022.04.27 |
요한복음: 우물가 여인의 목마름 (2) | 2022.04.23 |
요한복음: 볼 수는 없어도 알 수는 있는 (1) | 2022.04.19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요한복음: 인자의 영광
요한복음: 인자의 영광
2022.05.13 -
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요한복음: 양과 선한 목자
2022.05.09 -
요한복음: 현대교회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요한복음: 현대교회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2022.05.05 -
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요한복음: 생명의 빵, 생수의 강, 세상의 빛
2022.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