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인자의 영광
죽어서 4일이나 지났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소문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졌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은 '호산나 (הושיעה־נא, 호쉬아나, 구원하소서)!'를 외치고 환호하며 예수의 일행을 맞아들였습니다. 이들 중 그리스인들 몇명이 빌립에게 찾아와 예수를 뵙기를 청했는데, 그 말을 전해들은 예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한복음 12:23~25)
'영광 (glory)'은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카봇(תִפאֶרֶת, kavod, 중요성/무게)'과 신약 헬라어 성경의 '독사(δόξα, doxa, 존엄성/칭찬)'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에게 쓰일 때는 존경/명예/칭찬의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께 쓰일 때는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신성(divinity) 혹은 임재(presence)를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아니지만, 유대인 랍비들은 그들의 기록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빛과 구름을 '쉐키나(שְׁכִינָה, shekinah)'라는 단어로 대신 표현했습니다.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이집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출애굽기 14:4)
주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다. 이렛날 주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다.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 (출애굽기 24:16~17)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나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15:29)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그의 처소에는 권능과 즐거움이 있다. 만방의 민족들아,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리어라. 예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가거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역대상 16:27~29)
너희는 주님께서 날을 어두워지게 하시기 전에, 너희가 어두운 산 속에서 실족하기 전에, 주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예레미야 13:1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가복음 13:26)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누가복음 9:29~31)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영광을 받을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영광'일 수 있을까요?
같은 '영광'이라는 단어이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뜻과 경륜(經綸, οικονομία, 오이코노미아, 뜻을 이루기위한 행하심)이라고 의역하는 것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구절들이 있습니다.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 (시편 4:2)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시편 19:1)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요한복음 7:18)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후 말씀하신 예수의 영광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예수의 하신 일을 듣고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뜻하고 계획 하셨던 바였고, 이 일이 바로 예수의 3년반에 걸친 사역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기에, 이제는 마무리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의도하신 뜻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요 예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유대 뿐만이 아니라, 사마리아, 그리고 아직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다 아우러 예수께서 대신 죄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던 것이기에 그리스인들까지도 믿음을 가지게 되는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요한복음 10:14~16)
히브리서는 예수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 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근원에서 났습니다. (히 2:9~15)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유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설교를 통해 수없이 들어온 것이라,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특별한 감흥이나 감동 없어진 '익숙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진지하고 자세하게 읽어보면, 인류 위에 군림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는 대신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내려놓은 '사람의 아들'로 보내어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려는 결심을 하나님께서 하신 후, 무려 2100년에 걸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들에게 미리 말씀하시고,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 하나님의 그 길고도 집요한(?) 섭리(攝理, divine providence)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섭리에 따른 모든 구약 예언의 궁극적 성취가 이루어지는 '이 때'야말로 다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속성과 신성과 임재로서의 영광이 극명하게 선포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닌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렇게 행하며 살다가, 마지막으로 그 분의 뜻에 따라 죽음을 준비하는 이 순간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순간이었고, 예수께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요한복음 12:27~28)
지난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성경을 구할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성경이 '흔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귀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고 점점 '별 가치 없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침마다 그날 마음을 위로해줄 성경구절 한두개, 혹은 일주일마다 작은 감동을 줄 설교 한편에 만족할 뿐, 더 이상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대 서사 (grand narrative)"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담긴 '숲'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 숲이 정말로 말해주고자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신성과 임재로서의 영광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그 숲의 거대한 나무와, 예쁜 꽃과, 지저귀는 새에 아무리 감탄하고 매료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Καιρός (카이로스): Frequency Domain"]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3:8~9)
성경이 허구라고 생각하여 만사를 제껴놓고 그것을 증명해 보려고 덤벼들었다가, 몇 년만에 '믿을 도리밖에 없구나'라는 결론에 결국 도달하며 항복해 버린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대 서사"로 묘사된 진정한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 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캐임브리지 대학 철학/문학 교수였던 C.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는 TIME 지가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변증가 중 한명"이라고 소개한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교회의 주교와 사제를 배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9세에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10대 초에 루이스는 무신론자가 되어 신화와 주술에 빠져들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저자 J. R. R. 톨킨 (John Ronald Reuel Tolkien)을 비롯한 3명의 절친들이 루이스에게 기독교 신앙을 종용하자 전력을 다해 저항하며 거부하는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합리론, 진화론, 비교 종교론, 프로이트주의, 시대주의, 회의주의, 낭만주의등 모든 주류 사상을 탐구하였지만 그 결과로 그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은 계실 수 밖에 없다' 였습니다. 31세가 되던 해 그는 마침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인정하며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루이스 본인은 "아마도 그날 밤은 영국 전역에서 가장 낙담하고 마지못해 하는 개종이었을 것입니다 (the most dejected and reluctant convert in all England)"라고 했고,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저항과 항복의 이야기"였습니다. 항복만 했을뿐 믿음을 갖지 못했던 루이스는 2년 후 J. R. R. 톨킨, 휴고 다이슨 (Hugo Dyson)와 더불어 새벽 3시까지 나눈 긴 대화를 통해 믿음을 정말로 갖게되었다고 합니다. ("The Conversion Story of C. S. Lewis" 소개 중에서) 루이스의 대표적인 저서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의 내용은 루이스가 항복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했던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The Most Reluctant Convert" (한글 자막도 제공)] -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의 법률 전문기자였던 리 스트로벨 (Lee Strobel)은 비과학적/비이성적인 기독교에 사랑하는 아내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법률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장한 증언들"의 허구성을 밝혀내 아내를 구원(?)하려고, 핵심 포인트를 짚어가며 그 부분에 해답을 줄 해당분야의 최고 석학 13명을 직접 만나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할 논거들을 찾는데 2년간의 시간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생각을 지지해 줄 대답을 단 하나도 듣지 못했고,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비과학적/비이성적이다"라는 결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 "The Case for Christ"] [책 "예수는 역사다 (The Case for Christ)"]
- 한국의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중 하나인 JYP의 대표 박진영은 2008년 불가항력적인 전세계 금융위기로 사업에 좌절하고, 너무도 사랑했던 이상형 여인과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2009년 결국 이혼을 하면서 극심한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그 후 자유와 방탕함도 즐겨봤으나 그의 공허함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나이 40세가 되던 해 그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기로 결심하면서, 창조주를 알아보기로 작정하고 모든 종교 서적을 구해 탐구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성경 외에 어느 종교 경전에서도 세상을 누가/왜/어떻게 만들었는지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2년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성경을 읽어가며 과장되거나, 검증/확인할 수 없거나, 왜곡 되었거나 한 내용이 있는지를 비평적인 시각으로 검증했고, 심지어 2달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대 역사서 및 지형등을 직접 찾아 성경에 기록된 것과 일일이 비교 확인을 하는 과정까지 거친 후, "성경은 벌어질 일을 미리 썼고, 거기 쓰인대로 그렇게 역사는 실제로 흘러왔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쓴 책이 아닌, 하나님이 쓰신 책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론은 명확해졌지만 믿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크고 황당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주위 사람 몇명과 성경에 관한 대화를 하다가 한둘씩 늘어나면서 2013년 시작된 모임이 나중에는 200명 규모가 되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여러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포기하고 지내던 2017년의 어느 날이 되어서야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유튜브 "복음 세미나" (저도 최근에 보기 시작해서 아직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의 주장과 이해는 마치 '교리(doctrine)'와도 같아서 성경의 모든 것을 담지도 못하고 논리적으로 완벽한 것도 아닙니다. ["Doctrine (교리)"] 그러나 교리의 한계를 감안하듯 이들의 생각도 한계를 감안하여 들으면, 이들이 만난 하나님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정말로 창조하셨다는 증거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거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다는 증거를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너무 많은 부분이 도저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양심적으로 인정하였을 뿐이고, 그래서 여전히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하나님의 대 서사"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통해, 믿음으로 향하는 표지판 (sign, 표적, 表迹, σημεῖον, 쎄메이온)을 제시하며 그 표지판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 서사"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조용히 지켜볼 뿐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대 서사"를 스스로 보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성경에 적힌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벌어지는 모든 비극과 부조리와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실망하고 불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이해하지 않은 사람을 타인이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무척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 "대 서사(grand narrative)"는 불과 몇 시간만에 수 많은 질문으로 가득 찬 타인을 납득할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 간단 명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 서사"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수많은 상징적 표현과 미래에 벌어질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때문에 신학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고,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는' 현대의 정통 기독교 교회에서는 설교 본문으로 가장 기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세한 해석을 현실에 대입해 단정적으로 내리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이단(異端, heresy)들이 그 위험성 때문에 탄생했으나, 이 부분을 빼고 "하나님의 대 서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대 환난과 재앙이 장차 온 인류에게 있을 것이고, 그 후에는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의와 악행과 불행과 참상을 지켜보시면서도 오래 인내하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벌여온 '세상의 임금' 사탄과 사탄에 속한 사람들을 영원한 불못에 던지시고, 심판대에서 각 사람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에게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고.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시편 90:4)
참으로 주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그 종 예언자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아모스 3:7)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바로 그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3:19)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 14:29)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말하여 두는 것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한 말을 도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6:4)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6~19)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5)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복음 10:28)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대 서사 (grand narrative)"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과 신성과 임재로서의 영광을 직접 발견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절대로 짧지도 쉽지도 않은 여정이지만, 성경은 이것이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삶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God’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he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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