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은 "표적(sign)" 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되고 종종 "기사(wonder)"라는 단어와 병행해서 기록된다. Sign이라는 말은, 표지판 처럼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음을 말하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대략 세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 표지판을 은폐하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 표지판의 초자연성에 놀라 그 표지판을 보여준 인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표지판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읽지 못했던 사람들
- 표지판에 주목했고,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바를 읽고 받아들일 수 있던 사람들
기독교의 핵심은 "믿는가 믿지 않는가"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많은 교회가 믿음의 경계선을 1번 그룹과 2번 그룹 사이에 설정하는 반면, 복음서는 그 경계선을 2번 그룹과 3번 그룹에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2번 그룹의 사람들은 나의 눈 높이로 내려와 다가오신 하나님을 "나의 시각, 나의 가치관"속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가치관"을 향해 끝내 나아가지 못했다.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신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약 2100년의 시간이 걸렸다. 왜 예수님께서는 BC 2100에 오시지 않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수 많은 선지자들을 먼저 보내신 후에야 오셔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나는 그 분께서 그 분의 영광과 권능을 내려놓은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이라고, 아브라함 때에 오셨으면 아무도 그 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2100년에 걸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와 세례요한을 비롯한 숱한 증인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못했다.
죄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인간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우리의 배고픔과 권세욕과 물질욕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기를 바랬지만 하나님께서는 함께 신음하고 눈물 흘려주시는 "인간의 아들"로 오셨다. 그 분께서 초기 사역에 보여주신 "표지판"들은 그 분의 참혹한 죽음이 "그 분의 가치관이요, 그 분의 나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For the word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고린도전서 1:18)
"He gave Him authority to execute judgment, because He is the Son of Man." (요한복음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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