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생애 (1): 성장과 회심
올해 5월 1일부터 성서 유니온의 <매일성경> 본문이 사도행전이었고 아마도 6월 내로 끝날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굳이 한 명의 주인공을 고른다면 사도 바울이라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을것입니다. 과거 사도행전을 여러번 읽었지만 이번 기회에 사도 바울의 생애만을 추려 시간 순으로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기본 토대는 그냥 사도 행전의 기록을 줄인 것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사도 행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이 쓴 서신서 내용에서 추론 가능한 내용들, 사도행전의 행간에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약간의 부연 설명, 그리고 서신서들이 쓰여진 추정 시기들을 이야기 속에 삽입해서, 서신서들을 읽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
모든 연도들은 추정한 것이라서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일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바울은 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를 거의 다 돌아 다녔는데 현재 지명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시리아, 튀르키예, 그리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길리기아(Cilicia, 실리샤) 지방의 다소(Tarsus, 타서스) 출신입니다. 자료에 따라 추정이 다르나 대략 BC 1년 ~ AD 6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연도가 얼추 그의 나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행 21:39)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행 22:3)
튀르키예 중남부에 있는 다소는 길리기아 지방의 행정 수도로서,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문화적 수준을 가졌었고 스토아 학파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했던 도시입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이었지만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속국의 귀족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융화 정책을 펼쳤던 것을 고려할 때 바울의 집안도 다소에서 상당히 유력한 가문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5)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행 22:27~28)
바울의 원래 이름은 히브리어 사울(שאול) 이었습니다. ‘간구함'이란 의미를 가지는 이 이름은 바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의 먼 조상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첫번째 왕이었던 ‘사울'왕의 이름과 같습니다. 나중에 헬라권 선교를 하면서 ‘낮은', ‘작은' 이라는 뜻의 형용사를 헬라어로 음차한 바울(Παῦλος 파울로스)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사울(שאול, 간구함) ↔ 바울(Παῦλος, 낮은)
현대에서 많은 해외 교민들이 한국어 이름과 현지어나 영어 이름 두개를 사용하듯, 로마제국 시대의 유대인들도 히브리어 이름 외에 헬라어나 라틴어 이름을 함께 사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로 들자면 바나바(Barnaba, 위로자의 아들)라 하는 요셉, 니게르(Niger, 검은)라 하는 시므온, 마가(Markus, 큰 망치)라 하는 요한, 디두모(Didumos, 쌍둥이)라 하는 도마 등 입니다. 유대 지방이 아닌 외국 다소에서 태어나 로마 시민권자로 자란 사울에게 원래부터 바울이라는 헬라어 이름이 있었을 수도 있고, 회심한 사울이 겸손의 의미로 새 헬라어 이름을 지어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만 13세에 바르 미츠바라 부르는 성인식을 마친 후 본격적인 율법 공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보내졌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저명하고 존경받던 바리새인 율법 교사 가말리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행 22:3)
스승 가말리엘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 있던 "산헤드린 (Sanhedrin) 공회"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이 기관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민사 및 형사재판을 관할하는 정치 기구이자, 종교 생활의 여러 문제와 율법(Torah) 해석하는 일을 하던 종교 기구로서 '국회의원+대법관' 정도 되는 당시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인데다, 한번 공회원으로 선출 되면 종신직이었습니다.
AD 32년 경 바리새인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하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는데도 그 추종자들은 갈수록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추종자들이 각 회당마다 변론을 벌이며 엄청난 기세로 불어나는 것을 보면서 사울은 이들을 그대로 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을 했기에, 본보기로 그 중 한명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그 때부터 예루살렘에서 교회에 본격적인 핍박을 시작했습니다.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 밖 각 지역으로 흩어진 추종자들이 계속해서 세를 불려나가자 그는 외국 성에까지 따라가서 도망친 유대 기독교인들을 예루살렘에 다시 끌고와 투옥 시켰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행 26:9~11)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40Km 떨어진 다메섹(Damascus)는 번창한 상업 도시로, 많은 유대인들과 회당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도망쳐갔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을 잡아오려고 사울이 길을 떠나 정오쯤 다메섹 성에 가까와졌을때 갑자기 하늘에서 해보다 밝은 빛과 함께 히브리어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내가 너를 구원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할 것이라"라는 음성을 듣고는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사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후에, 예수께서 보내신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안수를 받고서야 사울은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사울은 며칠간 다메섹의 제자들과 함께 있은 후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유대인들이 그런 사울을 죽이려 하자 그는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광주리에 담겨 성 밖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 9:23~25)
사도행전에는 다메섹에서 탈출한 이야기에 이어, 곧바로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던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가기까지는 3년간의 시간이 있었으며 그 동안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메섹에 돌아갔었다고 말합니다.
“나보다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를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6,17)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갈 1:18)
사울이 3년 중 정확히 언제, 얼마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아라비아에서 보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고독하게 영성 훈련을 했을것이라는 추측도 있고 아라비아에서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당시의 아라비아는 요르단 페트라를 수도로 아레다왕 (Aretas the king)이 통치하던 나바테아 왕국이었는데, 다메섹에서 사울을 잡으려던 무리들 중 아레다왕의 고관들이 있었던 점과, 사울이 다메섹에 긴 시간 있었다고 기록한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다메섹에서 3년간 있으면서 중간에 아라비아에도 다녀왔고, 아라비아에 있는 동안 사울이 뭔가 나바테아의 아레다왕에게 미움을 살만한 활동을 했으며, AD 35년 다메섹에서 탈출 후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갔을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 날(many days)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행 9:23~24)
“다메섹에서 아레다(Aretas)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 났노라” (고후 11:32,33)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울은 기독교인들과 교제를 원했지만 그의 과거를 잘 아는 기독교인들은 그를 믿지 않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와 연결 시켜준 것이 바나바였습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겪었던 사건과 그후 3년간 다메섹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을 자세히 전해 듣고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15일을 베드로와 함께 지냈는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행 9:26~27)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이유만으로 회심의 순간부터 죽을때까지 30년 넘게 유대인들로부터 살해당할 위험에 늘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를 전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음에도 유독 사울이 이런 위험에 직면해야 했던 사실은 그의 위상에 대한 반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에 15일간 있던 기간에 사울은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예루살렘에서 즉각적으로 살해당할 위험에 처한 사울을 가까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거쳐 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고, 그 후 사울은 다소가 있는 길리기아와 수리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갈 1:21~24)
사울이 고향 다소에 머물렀던 시기는 AD35년~45년까지 10년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울이 세째 하늘에 가는 체험을 한 것은 아마도 이 기간 후반부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고후 12:2)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에서는 AD 37년 2대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칼리귤라 가이우스 황제가, 그리고 4년 후인 AD 41년에는 다시 칼리귤라 황제가 근위대에 암살되면서 3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새 통치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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