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 동안 의역(意譯)을 많이 해 읽기 쉬운 <새번역>을 주로 인용해 왔는데, 이번 요한복음 21장은 가장 직역(直譯)에 가까운 King James Version과 한글 개역 성경을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릴 것은, 신약 성경 원문은 헬라어(Greek)로 쓰여 있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원래 대화는 아람어(Aramaic)였을 것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헬라어 단어 선정은 사도 요한의 의역(意譯)일 뿐입니다. 그래도, 당시의 정황을 직접 목격한 요한이 당시의 뉘앙스와 자신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단어들을 선정했다고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남겨두고 갈 제자들을 위해 길게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백향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기드론 골짜기(요 18:1)의 시냇물을 건너, 감람산(막 14:26)의 겟세마네(마 26:36, 막 14:32) 동산으로 가셔서 무릎을 꿇고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질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습니다.(눅 22:44) 세 번의 기도를 마치셨을 때 가룟 유다가 무장한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바리새인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몰고 그 곳에 나타나 예수를 체포해 갔습니다.
12제자 중 한 명이었던 가룟 유다가 왜 예수를 팔아 넘겼을까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겠으나 제게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내용을 소개합니다. (읽은 지가 무척 오래 되어서 정확치는 않은데 루이스 더 볼(Louis De Wohl)의 소설 <창 (The Spear)>에서 본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폭력항쟁을 주도하던 급진세력 열심당원(셀롯, Zealot) 가룟 유다는 (그가 열심당원이었는지는 신학자들간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음)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고, 그가 로마를 상대로 항쟁을 벌여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줄 것으로 믿고 3년간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가 변방 갈릴리를 중심으로 떠돌면서 예루살렘에는 계속 거리를 둘뿐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따돌리기도 하고, 자신은 죽으러 왔다는 둥의 이야기를 계속 해대자 유다의 불안과 조바심은 계속 누적되었습니다.
예수의 수 많은 기적을 3년 넘게 가까이서 봐 오면서 예수의 능력이라면 능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유다는,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으면 그 상황을 결정적 계기로, 분명 예수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세상의 메시아임을 온 세상에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어치나 되는 향유 옥합을 깬 그날 밤 유다는 드디어 자신의 결심을 굳히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기려고 찾아 갑니다. 그깟 송아지 6마리 값 밖에 되지 않는 은전 30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가고 맙니다.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싸우다 죽으려고 미리 준비했던 칼을 꺼내어 대항하며 대제사장의 시종 말고(Marco)의 귀를 잘라버렸지만 (요 18:10), 오히리 그 행동을 꾸짖으며 마르코의 귀를 치유해주기까지 했습니다. (눅 22:51)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 26:52~54)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의로운 선생 예수께서 죄 없이 사형에 처해지게 되자 뒤늦게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자각을 한 유다는 양심의 기책을 받아 은전 30개를 돌려준 후 목 매달아 자살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끌려가는 이 상황 속에 당황한 것은 가룟 유다 뿐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당황했고, 특히 베드로는 정말 죽기까지 함께 싸우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칼을 거두라고 명하시고는 무력하게 잡혀가시는 예수를 보며 멘붕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요한과 함께 대제사장의 집 안뜰까지 따라 들어가 먼 발치에서 예수를 지켜보는 베드로의 마음이 오만가지 생각으로 복잡할 때 갑자기 그 집 여종 하나가 베드로 얼굴을 빤히 쳐다 보더니,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했고 당황한 그는 "아니, 이 여자가? 난 그 사람을 몰라요!"라고 잡아 뗐습니다. 조금 후 다른 여종이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라고 했고, 1시간쯤 후에 또 한 사람이 "틀림없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소.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니까요"라고 했으나 그 때마다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소리 하는지 제대로 자각도 못한 채 맹세까지 하며 계속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마 26:69~74, 눅 22:56~60) 그 때 우는 닭 소리를 듣고서야 예수께서 불과 몇 시간 전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난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예수의 눈길을 피해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눅 22:61~62)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와 (막 16:1) 요안나가 (눅 24:10) 향유를 발라주러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지진과 함께 나타난 천사를 만났고 (마 26:2~5), 시신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고 돌아와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에 베드로와 요한이 한 걸음에 달려가 봤으나 그들 역시 빈 무덤을 확인했을 뿐이었습니다. (눅 24:12, 요 20:3~10) 무덤에 남아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요 20:11~16) 아무도 마리아의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날 베드로도 따로 만나셨던 것 같으나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는 기록된 바 없습니다. (눅 24:34) 같은 날 제자들 중 글로바와 다른 한명도 예루살렘에서 11Km 거리의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눅 24:13~33, 막 16:12~13) 그리고 그날 밤 여러 명의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모여 자신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에 갑자기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셨고 (요 20:19~23), 다시 8일 후에 도마도 있을 때에 또 찾아 오셔서 상처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요 20:24~29).
부활하신 예수를 아무도 첫 눈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숨을 멈춘 사람의 호흡과 생기가 회복되는 소생(resuscitation)이 아니라, 노쇠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한 육체로 변화되어(transformation) 달라진 부활(resurrection)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살과 뼈가 있고 (눅 24:39) 음식도 드셨지만 (눅 24:43) 부활한 그 몸은 이전의 몸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고전 15:42~54)
"거기서 만날 것이니 갈릴리로 가라"는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을 여자들을 통해 전달받고, 제자들은 (마 28:10, 막 16:7) 갈릴리로 갔습니다.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는 말씀은 마지막 날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막 14:28)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이름 모를 2명이 모여 앉아 있다가 베드로가 생선을 잡으러 갔습니다 (요 21:2~3).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 던지고 따랐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로 대체 뭘 해야할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은 제자들이 고향 갈릴리로 돌아 왔을때 과거의 일상에 따라 생선 잡으러 간 것은 나름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보여집니다 (놀면 뭐하니? 🙄) 다들 함께 가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제자들은 그날 밤 단 한 마리의 생선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동틀 무렵 바닷가(호숫가)에 서 계시던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5)
Children (Παιδία), have ye any meat (προσφάγιον)? [헬라어 원문]
파이디아(παιδιά)는 파이디온(παιδίον)의 복수(plural)로 유아(infant) 혹은 덜 자란 아이들(half grown children)을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모두 성인이고, 결혼한 사람도 있는 제자들을 이렇게 부른 것은 무척 이상한 일입니다. 단어 자체는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나, 성인을 파이디온(παιδίον)으로 기록한 것은 성경 전체에서 이 곳이 유일합니다. 프로스파기온(προσφάγιον)은 생선(ιχθύς, 익수스)이 아닌 빵에 곁들여 먹는 음식, 별미, 진귀한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제자들은 이 질문을 "잡은 생선(ιχθύς, 익수스)가 있느냐"고 물으신 것으로 이해한 것이 맞아서 고기/fish/meat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예수께서 물으신 것을 직역해 본다면,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고 멘붕에 빠진 제자들에게 "(덜 자라서 분별력이 모자란) 아이들아, 너희에게 뭔가 소중한/귀중한 것이 있느냐?" 라고 질문하신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같은 것을 물으십니다. "(덜 자라서 분별력이 모자란) 아이들아, 너희에게 뭔가 소중한/귀중한 것이 있느냐?"
밤새 잡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제자들은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생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겠지만, 그들이 자각하지 못했을 뿐, 예수를 잃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은 자신들에게는 더 이상 "소중한/귀중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선을 잡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표면적으로 그들이 얻은 것은 153마리의 생선이었지만, 그 생선이 그들에게 예수와 삶의 목적/방향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3년 반 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사람 낚는 어부로 처음 부르셨을 때(누가복음 5:4~7)의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으로 바닷가에 서 계시는 분이 예수이심을 요한과 베드로는 즉시 알아차렸고, 베드로는 불과 90m 거리를 노 저어가는 시간조차도 참지 못해 곧바로 바다(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이미 베드로와 2번을 만나셨으나(요 21:14), 베드로와 대화를 하신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리듯 베드로로서는 차마 예수께 말을 걸지도 못했을 듯 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마 26:33, 35, 눅 22:33) 라고 호언장담했던 그가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마 26:74)고 했는데 어떻게 예수의 얼굴을 다시 볼 면목이 있었겠습니까? 어차피 유구무언이겠지만 차라리 예수께서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버리고 모두 도망갈 수가 있었느냐?", "3년 반 동안 함께 먹고 자고 온갖 어려움을 함께 하며 사역했던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허무한 것이었냐?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이다" 라고 말씀이라도 하시면 차라리 죄송하다고, 죽여달라고 울고 불고라도 할텐데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않음은 꾸짖으셨지만 그날 밤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씀만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무일 없었던 듯 무심하게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시고 구운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주셨습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Simon, son of Jonas, lovest(ἀγαπᾷς) thou me(με) more than these(τούτων)? He saith unto him, Yea, Lord;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φιλῶ σε). [헬라어 원문]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6)
He saith to him again the second time, Simon, son of Jonas, lovest(ἀγαπᾷς) thou me(με) ? He saith unto him, Yea, Lord;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φιλῶ σε). [헬라어 원문]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
He saith unto him the third time, Simon, son of Jonas, lovest(φιλεῖς) thou me(με)? Peter was grieved because he said unto him the third time, Lovest thou me? And he said unto him, Lord, thou knowest all things;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φιλῶ σε). [헬라어 원문]
영어나 한국어 성경에서는 "사랑"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번역이 되어있으나, 원문에는 두가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과 대답이 3번 반복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 저는 주를 필레오로 사랑합니다.
-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 저는 주를 필레오로 사랑합니다.
- 나를 필레오로 사랑하느냐? 저는 주를 필레오로 사랑합니다.
두개의 단어 뜻을 살펴보면
- 아가페(ἀγάπη)는 기독교에서 신적인 사랑(divine love), 조건 없는 사랑(unconditional love)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져 왔습니다. 이런 이해의 시작은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해석이었고, C.S. 루이스도 그의 저서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에서 같은 맥락으로 아가페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가 실제로 신적인 조건 없는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된 것이 대다수인 것은 맞지만, 성경 전체에서 간혹 (심지어 요한복음 내에서도) 탐욕스러운 인간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한 곳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 21장의 본문에서도 신적인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대 신학계에서 더 이상 많은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진짜 신적 사랑일까요" by 이민규]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ἠγάπησαν) 것을 뜻한다" (요 3:19)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ἠγάπησαν)" (요 12:43) - 필레오(φιλέω)는 형제애 혹은 우정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다수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 단어가 문학적으로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바꿨을 뿐 거의 동의어로 쓰인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더 단어 선정에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습니다.
21장 15절에 보면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라는 비교격 표현이 나옵니다. 토우톤(τούτων)이란 단어는 사물도 될 수 있고, 사람들도 될 수 있어서 '이것들' 또는 '이 사람들' 양쪽으로 다 번역할 수 있고,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 3가지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 너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너는 네가 이것들을(배와 그물과 그외의 것들)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너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수의 신학자들은 3번째가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그 해석에 동의합니다. 이 해석이 맞다는 전제 하에 위의 사랑을 표현한 두 가지 단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가페가 신적인 사랑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요한복음 내에서는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아가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는 "맹목적일 정도로 열렬한 사랑" 혹은 "~보다 더 큰 사랑"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쓰인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보입니다.
베드로는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 26:35)고 자신있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요한복음에서 사용한 아가페라는 단어와 일맥상통하는듯 합니다. 신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주를 향한 자신의 사랑은 확고하고 변치 않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크다고 베드로는 확신했었겠지요. 그리고 그의 자신감은 그날 밤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실망과 좌절과 낙담 중에 가장 큰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완전히 주저 앉아버린 베드로를 3번째 만나시는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 나를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께서는 잘 아십니다.
- 나를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께서는 잘 아십니다.
- 나를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지요? 다른 제자들처럼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께서는 잘 아십니다.
손가락질 받을만한 정말 의리 없는 행동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마음 속에 타오르는 주를 향한 사랑은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몰라줘도 "주님 만은 알아 주시겠지"라는 베드로의 확신은 옳았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베드로 스스로의 입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직접 고백하며 본인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3번의 물음을 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뭔가 소중한/귀중한 것을 다시 주셨습니다.
혹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4월 중순부터 써 왔던 요한복음의 14번째이자 마지막 글입니다. 몇 분이나 계신지 모르나, 그간 읽어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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