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나다나엘(Nathanael)의 무화과 나무
요한복음 1장 후반부는 예수께서 12제자 중 4명과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prophet)라 부르던 세례(침례)요한에게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제자 중 두 명이 세례(침례) 요한의 말 (요 1:29,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는데, 그 중 한 명이 안드레(Andrew)였습니다. 안드레는 밤 사이에 그 분이 '그리스도(Christ = Messiah)' 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자신의 형인 베드로(Peter)를 데리고 가 예수께 소개를 하여 또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합니다. 이튿날 베드로/안드레 형제의 같은 고향 사람인 빌립(Philip)이 예수를 만났고 빌립 역시 그 분이 '그리스도'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평소 알고 지내던 나다나엘(Nathanael)을 데리고 가 예수께 소개를 합니다.
1장 본문에 나오는 4명의 제자들은 모두 북쪽 갈릴리 호수 (민물이지만 크고 풍랑도 있어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릅니다) 인근의 촌구석 출신들입니다. 2명은 하루 고기 잡아 하루 먹고 사는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돌고 도는 쳇바퀴 인생이 아닌 '오시리라 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His Kingdom)'이었기에, 걸어서 며칠씩이나 걸리는 예루살렘과 세례(침례) 요한이 있는 곳까지의 발걸음을 수시로 반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도 그런 갈릴리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친구 빌립이 자신이 삶 속에서 가장 목말라하며 찾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마침내 만나게 되자 제일 먼저 달려가 그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 나다나엘이었습니다. 평소 만날 때마다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둘이 나누었을지가 상상되는 대목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의 출신 지방 나사렛(Nazareth)이 성경에 기록된 것과 다르기 때문에, 회의적인 마음으로 (요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도, 자신을 알지도 못하던 예수께서 그를 보시자마자 이미 잘 아시는 듯 하시는 말씀 (요 1:47,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요 1:48~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무과화 나무 아래서 빌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 큰 도시에서는 성경을 공부하려고 모이는 회당이 있었지만, 그런 회당이 없는 시골에서는 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거나 토론하곤 했다고 합니다. 각 가정에서도 가난한 단칸방 집의 경우, 마당에 심기운 무화과 나무 아래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으로 보편적이었다고도 합니다. 성경에도 자주 언급되는 팔레스타인 땅의 무화과 나무는 가장 흔한 나무중 하나로, 작게는 5미터, 최대 12미터까지 자라고 잎이 아주 넓어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더운 날 사람들이 모여 쉬기 좋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느티나무 정도 되겠네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곤 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Who are you when no one's looking)”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모습이 있기 마련이고, 그 비밀스러운 모습은 보통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홀로 있을때 드러나곤 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나 까무러치게 놀랐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만이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그 비밀스러운 시간을 예수께서 마치 들여다 본 듯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의 그 비밀스러운 시간은 예수께서 '거짓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표현하시기에 걸맞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다나엘은 매일 거의 거르지 않고, 혹은 하루에도 여러번씩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의 비밀스러운 시간을 가져왔던 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삶은 외롭고 쓸쓸한 시간들의 연속입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은 알아주시기라고 믿으며 지켜왔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낸 나다나엘의 시간들을 예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은 그로 하려금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의 무화과 나무는 어디입니까?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다니엘 6:10)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편 56:8)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6)
성경 전체를 통틀어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요한복음 1장과 21장 두 곳에만 나옵니다. 21장 2절 본문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의 문맥으로 보면 그도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 바돌로매(Bartholomew)일 것이라는 해석은 9세기 이후로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 (Εὐσέβιος, 에우세비오스) 의 '교회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헬라 철학자였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판타누스(Πάνταινος)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고 회개한 판타누스는 동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인도 땅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인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나 판타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총회 본부에 인도 지역 전도 결과에 관해 보고합니다. 예수의 사도 중 한 명인 바돌로매가 이미 인도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마태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지금도 히브리어 마태복음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인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선교하다가,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피에타, 다비드, 바티칸 시스틴 성당 (Sistine Chapel)의 천장화등으로 널리 알려진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는 1536-1541에 걸쳐 그린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에 사도 7명을 포함 391명 을 그리면서 바돌로매를 '그리스도' 바로 앞에 크게 부각시켜 그려 넣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바돌로매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의 벗겨진 살가죽입니다. 이 살가죽의 얼굴 모델이 미켈란젤로 본인이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완성한지 21년 후인 1562년, 마르코 다그라테 (Marco d'Agrate) 는 밀라노 성당 (Duomo di Milano)에 "살가죽이 벗겨진 성 바돌로매 (St Bartholomew Flayed)"라는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동상에서 두루마기처럼 두르고 있는 것도 바돌로매 본인의 살가죽입니다. 거의 <인체의 신비전(神祕展)> 수준 만큼이나 인체 해부학적으로 정교하게 살가죽이 벗겨진 몸을 묘사했습니다.
[부연 설명]
-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만난 것이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 북서쪽 게네사렛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을 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4:18~22, 막 1:16~20, 눅 5:1~11). 공관복음보다 20~35년 후에 쓰인 요한복음은 앞서 쓰인 복음서에 이미 기록되었던 내용들을 중복해 다시 서술하는 대신, 추가 보완 되어야 할 내용들을 중심으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위에 요약한 요한복음 1장 후반부의 일이 먼저 있었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보편적입니다.
- 요한복음 1장 29절 ~ 2장 1절 기록에 따르면 3일 이내에 있었던 만남이라고 봐야 하는데 1장 28절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에 기록된 장소가 2장 1절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에 기록된 장소와 거리가 140Km나 떨어진 곳 (걸어서 약 28시간) 이라서 앞뒤가 잘 맞지 않게 보입니다. 거리와는 별개로, 또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께서 세례(침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가셔서 40일간 금식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에, 3일 간 있었던 일이라는 요한복음의 기록과 불일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아마도 1장 28절의 "이것은 (These things)" 이 29절부터 시작 되는 제자들과의 만남을 말한 것이 아니라, 19~27절에 기록된 바리새파가 보낸 사람들과의 대화를 말한 것으로 봐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아이슬란드(Iceland)의 경우 성(姓, family name) 없이, 욘의 아들 피알라르 = 피알라르 욘선 (Fjalar Jóns + son), 욘의 딸 카트린 = 카트린 욘도티르 (Katrín Jóns + dóttir) 등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성경에서 "바~ (Bar~)"로 시작되는 사람 이름은 "~의 아들"이라는 뜻 입니다. 나다나엘의 full name은 아마도 "바돌로매 나다나엘 (돌로매의 아들 나다나엘)" 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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