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사항: 나이가 들더라도...
대학교 시절부터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으면서 납득이 잘 되지 않았던 부분 중 하나가 아내 사라의 미모에 관한 묘사였습니다.
"아브람이 이집트 땅에 들어갔을때 이집트 사람들은 아브람의 아내를 보고 아름답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리고 궁중 신하들도 그녀를 보고 그 아름다움을 바로 왕에게 말하였으므로 그녀는 궁실로 안내되었다." (창세기 12장 14~15절)
"아브라함은 그 곳 마므레에서 남쪽 네겝 지방으로 이주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에 살았다. 후에 그는 그랄에 가서 머물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은 보내 그녀를 자기 궁전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창세기 20장 1~2절)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차이가 10살이었고,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까 12장에서 이집트로 갔을 때 사라는 60대 중후반이었을테고, 20장은 아브라함이 99세였으니 사라는 89세. 당시 인간 수명이 지금의 2배 이상 되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사라가 폐경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으니 현대 수명으로 환산하면 30대 중반 ~ 40대 후반은 족히 되었을텐데, 어떻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 정도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을지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30대 시절 대학원을 졸업 하고 취직을 해서 집을 사려고 주말마다 이집 저집 구경을 하러 다니던 때였습니다. 미국은 거의 개인 주택이라 같은 디자인으로 지어진 집들도 거의 없고, 내부 개조/보수 (renovation)를 많이 하기 때문에 매물로 나온 집들은 open house를 해서 구매자들이 구경을 하도록 합니다. 새로 크게 잘 지은 집들은 평균적으로 당연히 더 비싼데, 소위 말하는 좋은 동네의 오래된 집들은 그럼 대체 왜 그리도 비싸야 하는가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제 예산을 몇 배 초과하는 곳이라 엄두도 낼 수 없지만, 순전히 호기심에 가장 오래된 동네에 비싸게 나온 집들을 구경해 봤습니다. 저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대학 설립 후 교수들이 학교 앞에 모여 살던 Professorville이라는 구역입니다. 1800년대 말부터 형성된 곳이니 거의 대부분의 집이 100년이 넘었지요. (아래 사진들은 모두 부동산 사이트에 퍼온 해당 동네에 매물로 나온 집들)
가서 직접 보니 왜 비싸야 하는지 너무 납득이 가서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더군요. 100년이 넘은 집 답게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은 보였으나, 그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 집들은 너무도 멋졌습니다.
집 입구부터 보이는 커다란 고목(古木)들과 각종 꽃나무와 과실수로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들. 앞 마당에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들과도 같은 아름다운 선의 지붕과 창문들과, 현관문들... English 풍이건, Colonial 풍이건, French 풍이건, Spanish 풍이건 상관 없이 각 문화권이 오랜시간을 통해 만들고 다듬어온 아름다운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창문 정도를 단열이 잘 되는 현대식으로 바꿨을 뿐, 처음 지어졌을 때의 서까래와 고풍스러운 전등들과 벽과 천장선들을 그대로 살리면서 깨끗하게 잘 관리된 고택(古宅)들은 당시 비교적 젊은 나이에, 건물이나 예술품에는 완전 문외한이었던 (아직도 현재 진행형 문외한 😅 ), 제게조차 구석 구석까지 그 매력을 발산하며 어필(appeal)하고 있었습니다.
100살 이상 된 집들을 구경하고난 후 문득 10년 넘게 제 머리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래된 미스테리 "아브라함의 나이 든 아내, 사라의 미모"가 갑자기 이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y=constant 로 죽을 때까지 젊은 (혹은 어린) 버니걸 (bunny girls) 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휴 헤프너 (Hugh Hefner)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고, x+y=constant로 생각하는 도둑놈(?) 심보로 살아가는 인간들도 있지만, y=x+constant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알고 보면 더 많습니다. 파라오나 아비멜렉 왕도 그런 보통 사람이라서 "나이 든" 사라의 미모에 반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름다움' 이라고 묘사된 그녀의 모습은 아마도 다른 종족의 젊은 여인들에게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차원 다른 품격과 우아함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 거의 20년 전인데, 더 살면서 주위의 시니어(senior)분들을 찬찬히 둘러보니 그 때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 드네요.
신문에 거의 정기적으로 "나이 무색한 꿀피부, 동안 미모, 탄탄한 미모" 기사가 올라오는 중년 여배우들을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소속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니 가상히 여겨줘야겠으나, 이런 배우들은 대체로 세월이 지났지만 연기력은 전혀 늘지 않은, 품격이나 우아함과도 거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화 <유스 (Youth)>는 은퇴한 세계적 지휘자 ‘프레드 밸린저’가 스위스의 고급 휴양지에서 그의 절친 노장 감독 ‘믹’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최고급 휴양지의 투숙객들은 몸이 망가진 왕년 축구 황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 유명세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 등, 대체로 돈은 많으나 삶의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투숙객들과 더불어 지내는 프레드와 믹은 나이 들며 비대해진 전립선으로 인해, 아침마다 지난 밤에는 소변을 몇방울 봤는지를 서로 물어가며 지나간 젊음을 그리워 하고 동경합니다.
저도 몸 여기저기가 망가지기 시작하고, 몸의 체취를 조심하기 시작해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직하게 말해, 저도 젊은 시절의 그 싱싱함(?)을 그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생각의 시작은 "왕이 매료되었던 여성의 미모"였지만, 이 나이에 유부남인 제가 다른 여성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고, 그저 나이가 들어가는 한 사람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수술/약물을 써서라도 그 노화에 저항하려고 한다거나, 젊음과 견주려는 어리석음에 빠져들지 않고 나이에 걸맞는 제 나름대로의 존엄과 품위를 쌓아가고 싶은 소박한 희망사항은 생겼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아무리 얼굴 성형수술 해봤자, 결국 나이는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다 나타난다고...
오래된, 그러나 전혀 추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집들... 그 집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던 정원들, 지속적인 관리로 유지된 청결함, 서까래를 비롯한 기품 있는 인테리어와도 같이 제 남은 삶에도 지혜와 지식과 인격과 성품과 삶의 열매가 더 자라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소박하다고는 하나, 부단한 노력 없이 방치한다면 저 역시 그저 먼지와 거미줄과 녹과 때만 가득한 폐가(廢家)로 점점 변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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