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한사람을 찾는 목마름
'한 사람'을 찾는 목마름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신 하용조 목사님께서 ‘빛과 소금’을 창간하신 후 책 맨 뒤에 ‘빛과 소금의 생각’이란 한 쪽짜리 글을 연재 하셨는데, 그 글들을 모아 처음 출간한 책이 “한 사람을 찾습니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였다. 얇지만 하 목사님의 생각이 집약된 듯한 책이라 내가 늘 가깝게 두고 사는 책 중 한권이기도 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이던 1983년 부활절 영락교회 고등부에 친구의 인도로 나오게 되었다. 국민학교 시절 집 앞 교회가 멀리 이전하기 전까지 잠시 다닌 것이 있지만, 내가 정말로 원해서 교회를 다닌 것은 이 고등부 시절이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 신앙이라고 할 만큼의 무엇도 없었고, 교회를 다니시지 않는 아버지의 눈도 피해야 했고, 대학 입시를 앞 둔 상태라 마음의 여유도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내내 나는 교회를 빠질 수 없었다. 당시 고등부를 맡고 계신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에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그 분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대 일의 관계는 아니지만, 김 목사님과의 만남을 쌓아가면서 나는 그 분의 설교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한 신앙인으로서 ‘김동호’ 라는 분과 그 삶을 좋아하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김 목사님을 알게된 후 20여년간 일관되게 느껴온 것은 이 분의 ‘한 사람을 찾는 목마름’이다. 김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의 단결된 힘보다는 하나님 앞에 헌신된 ‘단 한 사람’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내가 ‘스티그마’ 모임을 시작했을 때 김 목사님은 영락교회에서 담임 목사 대우의 교육전담 목사셨다. 엉뚱하게도 (?) 목사님은 고등부 담임을 겸임하셨다. 성인들 예배 설교를 맡으실 수 있었지만, 그 분은 어린 학생들 가운데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그 ‘한 사람’을 향해 한 번이라도 말씀을 전하고 싶어 하셨다. ‘스티그마’에서 첫 자체 수련회를 계획하면서, 김 목사님의 말씀을 청해 듣고 싶어 목사님에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드렸다. 위치에 걸맞게 빡빡한 일정을 보내시면서, 일정상 많은 집회 요청에 일일이 응하시지 못하시고 또 큰 규모의 집회도 많이 거절하고 계셨던 것을 알면서도 15명 남짓한 모임을 위해서 부러 시간을 내달라고 당돌히 요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숫자의 많고 적음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목사님은 기뻐하시면서 그 조촐한 모임을 위해서 멀리 수유리까지 오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목사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분들은 이와 비슷한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 목사님은 설교를 정말로 많이도 반복하시는 분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재탕 삼탕을 해도 너무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보통 부흥사로 사역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그렇게 한다. 하지만, 김 목사님과의 작은 모임에 참여해 본 사람이면 쉽게 알게 된다. 이 분이 설교 원고가 모자라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누구에게든, 가장 전하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앞으로 올릴 글에 목사님께서 책이나 큰 집회에서 자주 반복하지 않는 설교를 몇 개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성격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 중 한사람이지만, 김 목사님의 설교는 반복이라도 좋아하게 되었다. 첫째, 준비하지 않고 게을러서 하는 재탕 삼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둘째 그 재탕 삼탕에 담겨 있는 김 목사님의 ‘목마름’을 그 때마다 새롭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측하기로, 누가 뭐래도 김 목사님의 같은 설교 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예배와 집회에 참석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 설교를 몇 번씩 이미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중의 혹시 어떤 한 사람이 아직 그 설교를 듣지 못했다면 이 사람이 바로 그 ‘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그 생각에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테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김 목사님이 대중성을 지향한 마케팅식의 목회를 한다고. 요즘 주장하는 것이 다 얄팍한 목회 전략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영락교회, 동안 교회, 높은 뜻 숭의교회 (이하 ‘숭의 교회’) 등 결코 작지 않은 교회의 목회를 해 왔고 요즘은 ‘교회 개혁’, ‘깨끗한 부자’등의 주장으로 많은 대중의 관심 (긍정적 관심과 부정적 관심을 모두 포함)을 모으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 분의 일관된 ‘한 사람을 찾는 목마름’을 느낄 수 있다. ‘청부론’ 논쟁을 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많은 사람’에게 읽히려고 하는 책으로 생각한다. 고세훈 교수님께서도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는 악영향을 지적하셨다. 김 목사님 스스로도 할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 목사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여전히 ‘한 사람’이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부자가 ‘단 한명’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작고도 희박한 가능성이 성경에서 전면 배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단 한명’의 부자로 인해 5000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먹여질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단 한명’의 부자가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가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단 한명’으로 인해 물질로 찌든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올바른 공의와 사랑이 선포될 수 있다면, 김동호 목사님은 결코 ‘깨끗한 부자’ 론을 철회하시지 않을 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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