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제, 꼭 필요한가?
담임목사제(擔任牧師制), 꼭 필요한가?
새로 담임목회자가 부임한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우리 교회는 새로운 담임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새로운 담임목회자를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땀과 기도를 요구하는지, 그 공백이 교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우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1) 지난번 청빙과정을 돌아보며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이 때로는 무의미할 수도 있고, 심지어 악영향도 초래할 수 있지만, 적어도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최소화할 수 있을것이라는 전제하에 2년전의 상황을 조심스럽게 반추해보려고 합니다.
10여년간 본 교회를 담임하던 목회자의 갑작스러운 사직후 구성된 청빙위원회는 약 9개월에 걸쳐 공고를 하고, 심사를 하고, 면담을 한 끝에 한 분의 후보를 신도들에게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헌법에 명시된 3/4의 찬성을 이끌어내지 못한채 부결이 되는 것으로 끝났고 그 결과로 1차 청빙위원회는 전원 사퇴하였습니다. 재 구성된 2차 청빙위원회는 1차 청빙위원회가 이미 심사한 바 있는 후보 중 한 분을 단도직입적으로 내정하여 초빙을 위한 교섭을 하였고, 신도들은 90%가 넘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임으로써 본 교회는 새로운 담임목회자를 맞이하였습니다.
일어난 일을 섣부르게 해석한다는 것이 주제 넘기는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당시의 상황를 이렇게 봅니다. "신도들이 생각하는 담임목사의 요건과 1차 청빙위원회가 생각한 담임목사의 요건이 일치하지 못했다"
(2) 담임목사의 자격요건 (?)
"설교"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주는 영향은 제가 따로 구구하게 쓰지 않아도 교우 여러분들 모두가 잘 알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부흥사를 읽어보면, 한사람의 설교가가 개개인의 영성과 교회의 존폐에 미치는 그 엄청난 영향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몇년전에 새밝지에 기고하기 위해 우리 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과반수의 교인들이 본 교회에 등록하게 된 계기가 "설교"라고 대답했습니다.
Saddleback Community Church의 Rick Warren목사님께서 쓰신 "The Purpose Driven Church"에 나온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무려 93%가 "목사님"이 좋아서 등록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보통 등록을 결정하는데까지 걸리는 짧은 시간을 생각할 때 그 대다수가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해서 등록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만큼 일반 평신도들에게 있어 좋은 설교는 담임목회자의 필수적인 자질로 생각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반면 좋은 설교가이지만 교회에서 제직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닌듯 합니다. 담임 목회자와 제직들간의 충돌이 신도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영향이 곳곳 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도들은 목회자의 잘못이라고 생각을 하게되고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도들은 이렇게 좋은 설교를 하는 훌륭한 목회자가 그럴리 없다고 단정하고 제직들을 힐난하기 시작합니다. 또 어떤 신도들은 어느쪽의 문제이건 나는 알고싶지 않다며 귀를 틀어막고 다른 교인들과 담을 쌓기 시작합니다.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는 상황에 따라 목회자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제직들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 문제가 많은 제직들이라고 하더라도 포용하고 설득하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선도해나갈 책임이 담임목회자에게 맡겨진 본분이라고 본다면 목회자의 인격, 덕망, 포용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정직함을 좋은 설교보다 더 우위에 두는 제직들이 많다는 것은 또 나름대로 이해할만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를 두 가지만 들었습니다만, 그 밖에도 엘리야와 같은 성령충만함, 종과 같이 섬기는 겸허한 모습, 평생을 무소유로 살아가는 청빈함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풍부한 유모어 감각, 잘생긴 외모, 신학박사 학위에까지 교인들이 바라는 것은 많고도 많습니다. 사모에 대한 바람 역시 결코 뒤지지 않게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상적인 담임목회자 상(像)이 사람마다 많이 다르고, 나아가서 그 많은 요건을 다 충족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다양한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목회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없기는 왜 없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 완벽하지는 못할망정 거의 충족시키시는 분들도 물론 계십니다. 저는 한국에서 영락교회를 다녔습니다. 얼마전 소천 하신 고(故) 한경직목사님께서 오랫동안 담임하셨던 교회인데, 12년간 출석하면서 교회 내외를 막론해서 적어도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한목사님의 단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을 단 한분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영락교회가 보이는 모습은 그다지 건강하지 못합니다. 제가 느낀 바에 의하면 영락교회의 문제는 ironic 하게도 한목사님께서 너무 지나치게 목회를 잘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탁월하게 훌륭한 목회자이다보니 후임으로 오는 분들마다 교인들의 눈에는 소위 "삯군"으로 보인 것입니다. 크고 깨끗하고 화려한 집에서 수십년 살다가 평범한 집으로 이사했을 때의 후유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후임 목사님들은 대부분 몇년을 넘기지 못하고 계속 그만두시곤 했습니다. 교회가 점점 침체되자, 당회에서 "한경직목사 기념사업"을 통해 교회를 재부흥시켜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영락교회에 오래 출석해온 가정들은 한 개인의 우상화(偶像化)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3) 자질(資質)의 문제인가 아니면 제도(制度)의 문제인가?
담임목사가 담당해야할 일반적 기본 직무를 열거해 보면 설교를 비롯한 예배인도의 주도적 책임, 심방, 교육 및 훈련은 물론이고 신도사무총회 및 제직회의 장이 되어야 하며, 본 교회의 경우는 추가로 인사위원장을 겸임하고, 세부적인 재정 집행에 까지도 관여해온 바 있습니다. 즉, 담임목사 한 사람이 교회의 "모든 일"에 실질적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개인마다 선호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뛰어난 설교가로 알려진 목회자들을 보면 소위 "카리스마"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일수록 좋게 말하면 소신이 강하시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세고 독선적이기가 쉽곤 합니다. 자연 이런 분이 회의를 주재하다보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주장이 앞서기 쉽고, 결국 회의가 그 분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던가 아니면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주변을 돌아보십시다. 존경받을만한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눈에 띄실거라고 믿습니다. 그 분을 그럼 마음 속의 담임목사 자리에 한번 대입해 보십시오. 탁월함은 고사하고 관련된 교인들과 제직들에게서 최소한 부족하다는 말 듣지 않고 위에 열거된 모든 직무를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이 있는가 한번 스스로 질문해 보셨으면 합니다.
성경말씀에 정통하고 가르침에 은사가 크신 분들 여럿 계십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분들은 적지 않은 경우 다른 사람들의 말에 잘 귀를 기울이시지 못하곤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시고 섬김에 큰 은사가 있으신 분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분들일수록 듣기는 속히 하시고 말씀 하시기는 더디게 하셔서 그런지, 가르침에 대한 은사나 리더쉽이 좀 미약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강조 하시는 분들은 기도가 상대적으로 약해보이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기도를 강조하시는 분들을 보면 또 상대적으로 말씀이 모자라 보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듯이 다재다능하시고 하나님께 헌신되고 그러면서도 사람앞에 겸손한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그런 분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면,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를 통틀어 그런 분이 몇 안된다면 확률적으로 그런 분들은 매우 희귀(稀貴)한 경우요 예외(例外)적인 경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은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① 목회자들의 전반적인 자질 문제다 ② 온전한 자질을 갖춘 목회자를 중심으로 mega-church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작은 교회로 분산되어 온 것이 문제다 ③ 교인들의 높은 기대수준이 문제다 등등.. 여러가지 진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문제의 원인으로 "담임목사 제도가 가지는 구조적인 결함"일 가능성을 지적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목회자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권한을 축소 내지는 박탈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의 모든 결정과 책임을 "한사람"에게 떠 맡기도록 유도하는 "담임목사"라는 직책이 과연 교회에 필요한가 반문(反問)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4) 담임목사제, 성경적인가?
현대 교회에서 담임목사제는 당연시되고 있는 부분중의 하나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담임목사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특히 담임목회자는 흔히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 "양떼를 이끄는 목자" 등의 개념과 동일시되었고 이런 개념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부터 위임(委任)받은 권세를 암시적으로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한 신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많은 부분이 쉽게 담임목사제를 전제로 해석되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면,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가 사울을 초빙하여 함께 사역하는 것을 원래 담임목사격 이던 바나바가 사울을 초빙하여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고 해석한다든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담임목사는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 인 베드로였다고 말하는 것등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보면,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한명의 사람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 것을 명령하지도 권장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Hierarchical한(계층구조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광야시대와 가나안땅 정복시에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것 정도라고 할까요. 그 후로 사사시대가 있지만, 그들이 백성을 대표하는 권한과 책임을 걸머졌다기 보다는 주위의 이방민족들과의 전쟁시 필요시 진두지휘를 했을 뿐 평화시에는 일반 백성들과 다름 없이 농사와 목축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임명된 후에도, 고향에서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하나님께서 왕을 달라고 구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상 12:17).
신약에 들어오면 성도간의 수직구조(권한과 책임의 면에서)는 더욱 약화됩니다.
•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너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태복음 23:8, 10)
•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에베소서 4:11)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린도전서 12:27-30)
•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5,16)
현재의 담임목사제. 몸의 일부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머리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Stanford 대학에서 유학생 선교 사역 (International Students Christian Outreach) 을 담당하고 있는 Johannes Rusckow 목사님께서는 개인적인 이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 주셨 습니다.
• "교회의 Leadership에 관해 확실한 지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의 사도교회를 보면, 단 한번도 지역 교회의 Leadership이 '담임목사' (Senior Pastor) 혹은 목사, 한 사람에게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성직권을 주장 하는 'One-man Leadership' 은 신약 성경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 지역교회의 Leadership과 돌봄은 항상 "장로들" (목사를 포함하는 단어) 의 일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장로를 일컬어 2가지의 헬라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presbyteroi' (장로) 로 연륜 과 성숙함을 갖춘 사람을 일컬으며 둘째는 'episcopoi' (감독) 로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두 단어 모두 헬라어 성경 원문에 항상 복수(複數)로 쓰였다는 사실 입니다. 이것은 신약 사도교회의 Leadership이 Senior Pastor 한사람에게 주어진 적이 없었 으며, 목사를 포함하는 장로들이 'Team'을 이루어 Leadership을 맡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 무엇보다도 교회의 '머리'는 담임목사가 아닌 주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5) 수평적 동역(同役) 목회
교회에서 "동역자"라는 단어를 우리는 자주 접합니다. Teamwork이란 말과 잘 상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좋은 teamwork을 이뤄 동역하는 교회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담임목사제를 전제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동역목회는 기존 교회가 가지는 틀과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담임목사"로 지칭되는 자리를 "설교목사"로 전환하고 예배의 설교를 제외한 모든 회의 진행권, 재정/인사에 관련된 책임이 행정목사 혹은 제직회로 전가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 규모가 작을 때에는 "설교목사"가 다른 직책 (행정, 선교, 교육등)을 겸임할 수 있고, 교회 규모가 커진다면 역으로 여러분의 설교목사를 초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가 최종 책임과 권한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여러 교역자 중 한분이 혹은 교대로 그 임무를 맡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사람"이 모든 권한과 책임의 중앙에 있지 않다는 면에서 현재의 "담임목사제"와는 큰 차이를 가지게 됩니다.
(6) 실제의 예가 있는가?
생소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비슷한 형태로 시행되고 있는 교회들이 있는데, 한인교회는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위치한 Menlo Park Presbyterian Church의 예를 들을 수 있겠습니다. 창립한지 130년이 된 이 교회는 현재 등록교인수가 약 5500여명 정도가 되는데, 28년간 교회를 섬겼던 Walt Gerber 담임목사님 (Senior Pastor) 께서 2002년에 은퇴하던 시점에 당회에서는 담임목사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현재 Doug Ferguson 행정목사님 (Executive Pastor) 와 John Ortberg 교육목사님 (Teaching Pastor, 이 분은 Saddleback Community Church와 함께 세계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 9년간 섬겼고 많은 책을 저술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각각 설교의 20~30%를 담당하되, 교인들의 설교 편식(偏食)과 한사람의 우상화를 방지하기 위해 다른 7명의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남은 50% 정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조금더 파격적(破格的)인 형태의 예로, 최근 일간지에 소개된 바 있는 한국 산울교회의 경우처럼, 아예 보수를 받는 전담 목회자도, 건물도 없이 자원 사역자들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된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조누가 전도사님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한달에 3번 설교를 하시는 것 이외에 모든 교회 행정이 평신도들 중심으로 되어있고 한달에 한번은 평신도 중 한사람이 설교도 맡습니다. 과거 주님의 교회를 10년간 담임하셨던 이재철 목사님께서 현재 이 교회에서 자원 사역자중 한명으로 중고등부를 맡아 지도하고 계십니다.
(7) 맺음말
담임목사제가 교회의 영성과 건강도를 결정짓는 유일한 척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좁은 소견으로 볼 때 무척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씁니다.
제직의 일원도 아닌 일개 평신도가 목회의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이 무척 주제 넘다고 생각하지만, 교회의 어려운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그 아픔을 함께 느낀 지체의 한 사람으로 화두(話頭)를 던져봅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건강한 토론이 게시판을 통해서 활발하게 이루어 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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