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사람을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
사람을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
세상에는 옳은 말과 그른 말이 있고, 또 사람을 살리는 말 (세우는 말) 과 죽이는 말 (넘어 뜨리는 말) 이 있는 것 같다. 옳은 말이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깨닫는 데에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경우는 그 말을 해야할 대상이 잘못되었을 때에, 더 나아가 주객이 전도되었을 때에 잘 생기는 것 같다. 좋은 예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에게 주는 말씀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주신 말씀을 부인이 대신 하고, 하나님께서 부인에게 주신 말씀을 남편이 대신 하는 가정을 두고 좋은 가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 부부 싸움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김 목사님께서 가끔 말씀하신 것이지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는 말씀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주장하면 사회는 상당히 살벌해질 것이다.
내가 대학 4학년때인 1987년, 충남 금산에 갔다가 시골 목회자 사례비가 3만원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사치스럽게 산 것은 아니었는데도 당시 내 용돈보다 적었다. 그 뒤로 졸업할 때까지 한달에 3만원으로 한번 살아봤다. 매일 점심은 학교 구내 식당에서 400원을 넘기지 않고 (구내 식당에서야 밥을 사먹지만,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가도 라면밖에 먹지 못할 돈이었다), 간식이나 커피등은 당연히 엄두도 못내고, 통학할 때도 훨씬 가까이 있고 빠른 좌석버스 대신 15분 걸어가야 타는 일반버스만 타고 해야 간신히 한달 3만원으로 살 수 있었다. 정말로 그 교회의 교인들의 능력이 되지 않거나, 목회자가 가난함을 자청해서 이 같은 생활을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교인들이 충분히 능력 (평균적으로 볼 때) 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목회자니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옳소’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강요’ 요 나아가서 ‘폭력’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 목사님께서는 “제가 가난하게 살면 저는 하나님께 상급을 받겠지만, 숭의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한다. (개인적으로 그 이야기를 김 목사님이 아닌 평신도 중 한분이 말씀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에 대한 ‘적절한’ 사례는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청빈을 결단하는 것은 아름답거니와, 남에게 청빈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믿는다.
평신도들도 한국에서는 기독교 관련된 단체에 들어가면, 월급 제대로 받지 못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선교라는 이름에 모였으니 재정 유지가 안되면 별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그런 모습을 당연시하며 ‘강요’한다는 것이다. 마치 월급 이야기 하면 믿음이 약한 것 처럼 말이다. 본인이야 그런 삶을 알면서 헌신했으니까 감수한다 치더라도, 함께 그런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부인과 아이들은 어떨까?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견뎌나가야 하는 남편/아버지로서의 마음은 어떨까? 하나님만 의지하면 다 채워주시므로 청빈하라고 말하는 것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 (야고보서 2:15-16) 하는 것과 뭐가 차이가 있을까?
제3번째 글에, 누구나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잘한 것은 잘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토론 중에 이랜드가 예로 나왔다. “정직하게 사업하고 세금 제대로 냈지만 노사 문제에 정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다” 는 것이 고세훈 교수님의 의견이었다.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이랜드에서 각고의 고통으로 회사를 일구어 온 분들을 낙심케 하고, 나아가 넘어지게 까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을 이와 같이 말하면 어떨까? “정직하게 사업하고 세금 제대로 내는 것을 통해 이랜드는 한국 기독교계와 경제계에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다. 한가지 숙제가 있다면, 노사 문제를 좀 더 정당하게 하여 회사 내의 근로자들에게 좀 더 개선된 근로 환경과 처우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랜드의 경우도 준비된 창업자와 초창기 직원들이 준비되지 않은 직원들에게까지도 어느 정도의 ‘청빈’을 강요한 경우라고 해석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록펠러와 카네기의 경우도 그렇다. 두 사람을 ‘십일조 잘해서 축복받은 사람들’ 로 일컫는 것은 온당치 못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나쁠 것이 있는가 모르겠다. 그 재산 축적과정의 안 좋은 부분은 비평하고 버리더라도, 그들이 환원한 재산이 미국 사회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이 부분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본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부자가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양심에 비출 때 정말로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돈을 벌어, 그 중 적지 않는 부분을 이웃들을 위해 쓰고 있고, 그런 삶을 기쁨으로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 사람을 신학적으로 ‘깨끗한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분명 그 사람을 무척이나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교만해질 정도로 추켜올리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보고 ‘그 정도 가지고 교만하지 말라. 그래봤자 당신은 이런 저런 부분에서 부정할 뿐이다’ 라고 말해 그 사람의 기를 죽이고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을 감동케 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의 재물 축적 과정은 잘 묘사되어 있지 않다. 쉰들러가 그 과정에서 나쁜 짓 하나 안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누군가 쉰들러의 재물 축적 과정을 낱낱이 까발리면서 “그러므로 이 사람을 선하다 평가할 수 없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시각을 ‘편향되고 왜곡되었다’ 고 보게될 것 같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한 부자의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나서, “당신은 이 불공평한 사회에서 재물을 획득했고, 그 재물의 극히 적은 부분을 베풀었을 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니까, 나는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베풀어야만 한다” 라고 말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너무 ‘굳었다’ 라고 느낄 것 같다.
우리가 ‘선한 일’을 보고도 그것을 ‘선하다’라고 인정해줄 줄 모른다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누가복음 7:32) 라고 책망하시지 않겠는가? 나는 한국 교회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입 바른’ 말일지는 몰라도 그 도가 지나쳐 상대방을 넘어지게 하고 낙담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범죄하고 있다면, 지적하고 권면해야 할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토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열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한 영혼을 칼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벌어지는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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