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그의 논리의 빈약함
도올, 그의 논리의 빈약함
한국 신문 지상에 잊을만하면 등장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다. 도올 김용옥(金容沃) 교수.
한두시간 남짓한 강의 한번을 할 때마다 그 준비를 위해 평균 10여권씩 책을 정독하고 수십시간을 들여 나름대로의 완벽을 기하는 그의 정성과 노력은 목회자들을 비롯한 많은 기독인들이 본받아 마땅한 부분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와 발언에서는 그의 공허함에서 메아리쳐 나오는 narcism 이상의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1. 예수도 무당이었다?
“醫는 곧 술먹고 춤추며 병을 고치는 무당의 모습이다. 침을 탁탁 뱉아 흙을 이겨서 소경 눈에 발러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하는 예수(요한 9:6∼7)의 모습은 바로 이 무의(巫醫)의 모습이다. 이러한 무치(巫治, faith-healing)는 예수시대의 팔레스틴의 예수류의 무의에게서나 중국의 상고(尙古)시대의 무속이나 오늘날 말썽을 빚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도원이나 보스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미쎄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크리스챤 싸이언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문화의 주요 패턴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엘리아데의 비교종교사적 공헌에 의하여 더 이상 샤마니즘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견된 소수민족의 특수종교현상으로만 국한해서 보지 않고 전인류의 보편적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찰모시스:스러져가는 하나님』(Zalmoxis:The Vanishing God)이라는 역저 속에서 카스피해 연안의 동구라파 민속종교, 희랍세계, 인도-아리안, 휘노-우그리안, 알타이안, 몽고, 스라브, 북아메리카 인디안 등등의 모든 종교의식과 형태가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의 틀 속에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철학사에서 알고 있는 파르메니테스나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가 바로 무당이라는 점 또한 희랍철학의 대가인 구트리(W.K Guthrie)를 위시하여 모리슨, 버케트 등등이 밝히고 있다.”
[“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을 마귀에게 시험받으며 고통당하는 것도 일종의 무병입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어둠의 동굴 속에서 백일간 고통을 당하는 것도 동일한 유형의 무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병이 끝나면 신어미가 신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내림굿이라고 하는데, 내림굿은 바로 이 이니시에이션의 의식의 전형입니다. 예수가 세례요한한테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에 고유한 내림굿의 이스라엘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내림굿을 통하여 만신에게 신의 계승자임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경우에도 세례요한이 세례를 행할 때, 하늘이 갈라지며 신(성스러운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마가」1장 10절). 우리나라 내림굿에서도 이러한 장면의 묘사는 보통 있는 일입니다. 신이 내려온다고 해서 보통 강신(降神)이라고 말하지요.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는 복음서가 바로 「요한복음」이며,...”
[“고교생을 위한 철학강의” 중에서]
그는 자신이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무교, 이슬람, 기독교등을 두루 두루 깊이 있게 연구한 “대가”라고 자처한다. 그가 정말 열심히 공부한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끌어내는 논리는 “대가”는 커녕 많은 전문가 중 한명이라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다. 그의 논리는 마치 다음과 같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에서 만들어 내는 차들을 일일이 분해해가면서 자세히 살펴봤다. 한국의 현대, 일본의 Toyota, 영국의 Rolls-Royce, 독일의 BMW, 중국의 Hongqi, … 어느 차들이나 동일하게 중심에는 엔진이, 운전석에는 운전대가, 밑에는 4개의 바퀴가 예외없이 달려 있었다. 중국 최대의 자동차 dealer인 X사의 보고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영국산 Rolls-Royce Phantom 와 중국산 Hongqi HQD, 그리고 독일산 Mercedes-Benz C 와 중국산 Geely Merrie 300는 제조된 나라가 다를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차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누가봐도 알 수 있는 외견적 유사성을 나열하며 ‘다 그게 그거’라는 사람을 일컬어 전문가라고 하지 않는다. 전문가라면 보통 사람이 볼 때 동일하게 보이는 유사성 뒤에 감추어진 진정한 가치의 차이를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타고난 천부의 감각과 각고의 훈련을 통해 짝퉁과 진품의 차이, 위조 화폐와 공식 화폐의 차이, 질 떨어지는 와인과 최상품의 와인의 차이를 구별해 낼 줄 아는 사람만이 전문가라고 인정을 받는다.
2. 학력=논리?
걸핏하면 그는 공개 토론을 하자고 한다. 나름대로의 논리에 꽤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자신의 강의나 발언에 대해 비평이 가해지면 의례히 이런식으로 말한다.
“내 강의 내용은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대 교수들도 인정하고 있으며 내 강의로 인해 유교문화를 다시 세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나의 한문 실력은 30∼40년간 피눈물 흘려가며 쌓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누가 감히 나의 한문 해석을 두고 운운하나”
“사람들은 나를 동양철학자,한문고전의 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나는 1967년 한국신학대학 전교수석 입학생이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을 가지고 나에게 덤비겠다니…”
본인이 진정한 학자라고 자처한다면, 학력자랑으로 논리적 설명을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3. 나도 예수교 신자다?
“예수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라는 사람의 가르침(Teachings of Jesus)이다. 나사렛에서 태어나 목수 일을 했고 갈릴리 지역에서 군중을 휘몰고 다니면서 천국의 도래와 같은 어떤 메시지를 전했던 사람의 가르침이 바로 예수교이다. [중략] 예수교의 직접경전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역사적 예수가 살았을 당시 그의 가르침을 적어놓은 기록이 있는가? 단언컨대 이러한 기록은 없다. [중략] 이들의 가설에 의하면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이집트·지중해연안·근동지역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미스테리아 비교(秘敎)의 신화적 운동의 유대인적 버전 속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신인(godman)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신화운동의 한 가상적 주체이다.”
[“도마복음 이야기” 중에서]
길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만, 요점만 정리해 보면 시작 부분에서는 “실존 예수”가 예수교의 핵심이라고 말하다가, 끝부분에 가면 “예수는 가상적 주체”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그가 말하는 예수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그래도 덜 애처로와 보일텐데, 갑자기 “나는 예수를 믿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내 심상에는 분명한 예수가 있고, 이것을 공유하고 싶다” 며 자신이 돌연 예수교 신자임을 자처한다. 뭐가 갑자기 아쉬워서 줄기차게 몰아쳐 세운 종교의 신자가 되고 싶어 했을까? 어쨌거나 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가상적 주체”로서의 예수를 믿는 그 허무함이 다시 묻어 나온다.
“예수님은 배고픈 군중들 앞에서 먼저 상황을 리서치 하신 후, 그 중에 있던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자’고 하셨다. 성경은 ‘떡을 들어 축수하시고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내 마음에 있는 예수는 그런 분”
이런 것이 동양학적인 신앙고백일까? 나눔의 삶을 살기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 많고 많은 나눔의 대명사들이 있는데 왜 구태여 예수교를 지목했을까?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있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한복음 6장 26~27절) 구절을 읽고도 이 사건이 예수교의 상징인 양 말하는 사람을 학문의 대가라 말할 수 있을까?
전국민을 상대로 요한복음을 강의까지 한다는 사람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요한복음 6장 5절)는 내용을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자”로 둔갑시켜도 되는 것일까? 1985년 세계적인 sentation을 일으켰던 Michael Jackson과 Lionel Richie가 쓴 노래 “We are the World” 중 “As God has shown us by turning stone to bread.” (비교: 마태복음 4장 3~4절) 대목을 듣는 기분이다.
이문열씨는 그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뿐 사람의 아들은 결코 아니다’라며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행동과 사상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논리로 일관되고 집요하게 예수를 공격하지만, 적어도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훼손하거나 왜곡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반기독교적이냐 친기독교적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학자로서의 소양과 토론에 임하는 예의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는 두 종류의 모순적인 삶을 사는 집단이 있다. 하나는 “성경은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어렵다. 재미없다”며 성경을 공부하지도 읽지도 않는 많은 교인들이고, 또 하나는 “구약은 당시 보편적인 근동지방의 신화를 수집해 만든 허구, 신약은 사도들이 중심이 되어 편집된 허구” 라고 말하면서도 그 ‘허구’를 평생을 바쳐 연구하며 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진리라 믿는 것을 위해 살아도 평생이 그리 길지 않을텐데, 허구라 믿는 것에 자신의 생애를 다 쏟아붓는 사람의 삶에서 ‘허무함’ 이외에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도올. 그의 기독교에 대한 조악한 논리는 그의 범신론적 동양철학이라는 뼈대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허무한 메아리들을 가져다 어설프게 살덩이를 붙이고, 자신의 화려한 학력으로 그럴싸하게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신학대학 학부과정 “중퇴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아마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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