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행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가?
왜 선행으로는 구원에 이를수 없는가?
[글을 시작하며]
나는 고등학교 학력고사(요즘으로 말하면 대입 수능시험)를 마치고 한 친구와 함께 기도원에 따라갔다가 첫 성령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내 생활에서 즉시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몇년이 흐른 대학교 2학년 여름, 교회 수련회와 하기봉사를 통해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단하게 되었고 그 후로 나의 삶의 focus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신화가 아닌 살아 역사하시는 실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감성적'으로는 알게 되었는데, 왜 하나님의 구원이 선행으로 얻어질 수 없고, 왜 많은 종교중에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종교이어야 하고, 왜 살인한 악인이라도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구원에 이를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성경에 쓰여 있다니까, 내가 믿게된 예수님에 대해 설교하는 모든 목사님들이 그렇다니까 받아들이기는 해야겠는데 내 머리속에서는 도무지 '이성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 문제는 나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에게 걸림돌일거라고 생각한다.
몇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행히도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행 혹은 고행으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에 '믿쉽니다~'의 맹목적 차원이 아닌 순수한 이성적 차원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영화 설명]
1986년 상영된 이탈리아 감독 롤랑 조페의 작품 "The Mission"은 1750년 경,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국경 부근에서 원주민 과라니족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벌이던 실존 두 Catholic 사제의 대비된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와 사랑, 정의가 무엇인가를 그려 1986년 제39회 칸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종교 영화이다. "Nella Fantasia"로 편곡되어 널리 알려진 주제곡 "Gabriel's Oboe"를 비롯해 영화 전체를 꽉 채우는 Ennio Morricone의 주옥같은 음악들 만으로도 감상의 가치가 충분하다.
18세기 예수회(Jesuit)에서는 남미대륙 각지에 다수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대규모 스케일로 선교를 시도하였다.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3국에 걸쳐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모든 것을 거부하듯 우뚝 솟은 대폭포 이구아스 상류 파라니강 연안의 삼림지역에 흩어져 사는 과라니 인디오 거주지에도 선교사들의 손길은 뻗어갔다. 그러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이 산 크롤로스 선교회 소속의 가브리엘 신부(Gabriel: 제레미 아이언스 분)였다. 몇 동료 신부들의 선교시도가 죽음으로 끝난 후 그 뒤를 이은 가브리엘 신부는 마침내 이구아스 폭포 위에 사는 과라니족들에게 다가가는데 성공한다.
가브리엘 신부와 영화 전체에 걸쳐 대조를 이루는 인물은 용병 출신의 노예상인 로드리고 멘도사(Mendoza: 로버트 드니로 분)이다. 많은 과라니 족을 생포해 노예로 팔아넘기지만, 과라니족을 인간이 아닌 원숭이쯤으로 생각하던 그 당시 많은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어느날 그의 부인 카를로타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동생 필리페와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하며 헤어져 달라고 요청한다. 두 사람 모두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며칠의 시간을 보낸 그는 어느날 카를로타와 필리페가 동침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마음을 겉잡을 수 없어 달려 나가게 되고, 뒤 따라온 동생 필리페와 우발적으로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동생 필리페를 찔러죽이고 만다.
당시 법에 따르면 결투에 의한 살인은 무죄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진 멘도사는 그 후 6개월동안 사람들을 멀리하고 감옥과도 같은 장소에서 죽을 날만을 고대하며 사는 폐인이 된다.
소식을 들은 가브리엘 신부는 멘도사를 찾아가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속죄의 길이 있음을 알리며 새 생활에 대한 소망을 가져보라고 challenge한다. 이 날 이후로 멘도사는 자신의 죄를 상징하는 갑옷과 칼이 들은 크고 무거운 보따리를 끌고 이구아스 폭포를 쉬지 않고 반복하여 오르내린다.
주위 모든 사람들은 '그만하면 됐다'고, '그 정도의 고행이면 그의 죄를 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중단하지 않았다. 본인 안에 있는 죄책감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멘도사가 과거에 노예로 잡아 팔던 과라니족이 이구아스 폭포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폭포 위에 도착하자 그 중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멘도사의 목에 칼을 겨눈다. (영어 자막이 나오지 않아 현지인 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정황으로 볼때 아마 추장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추장님, 우리 형제들을 팔아먹던 그 나쁜 놈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콱 찔러 죽여버리지요?')적막의 순간이 흐른다. 멘도사는 '올것이 왔구나. 이제 끝이다'라는듯 두려움 반 체념 반의 표정으로 기다리고, 가브리엘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과라니 부족민들은 추장이 무슨 말을 할까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본다. 이윽고 추장이 뭐라 이야기 하자 칼을 목에 겨눴던 사람은 멘도사가 걸머진 짐의 밧줄을 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잘라낸 짐 보따리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린다.
짐은 절벽 밑 깊은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자, 멘도사가 울기 시작한다. 진흙탕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 모습을 본 과라니 부족들은 웃기 시작한다.
가브리엘 신부와 선교사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옆에 와서 그를 감싸 안아준다. 드디어 멘도사도 웃기 시작한다.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그 후로 멘도사는 사제의 길을 걷기로 서원하고 가브리엘 신부를 도와 과라니족의 선교에 헌신한다.
[내가 깨달은 바]
'용서를 통한 구원'이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더니, 너무나 쉽게 상식적인 선에서 납득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의도적이건, 우발적이건) 살인했다고 하자. 그 일로 내가 50년간 징역형을 살고 나온다면 나는 과연 그 사람의 유가족에게 나의 죄가 씻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개과천선하여 세상 모든사람이 인정하는 선한 사람이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유가족들을 떳떳하게 대할 수 있을까? 결론은 '그럴 수 없다'였다. 열쇠를 내가 쥐고 있지 않고 유가족이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가족이 나를 용서하고 내가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필요충분'한 해결 방법이었다.
어떤 사람은 용서에 앞서 죄값을 치루는 것을 봐야 속이 시원한 사람도 있을테고, 잘못을 진정 뉘우치고 새사람이 된 것을 확인해야만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 반대로 (몹시 드물겠지만) 아무 댓가 없이 그냥 용서하기로 결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치루어야할 댓가'와 '용서'는 엄밀히 말해서 무관하다고 봐야 옳을 것같다.
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지만 대충 옮긴다면) "죄와 선행은 산술적으로 더하고 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죄대로 해결해야 하고 선행은 선행대로 칭찬을 받아야만 합니다. 5가지 죄를 범하고 10가지 선행을 할 경우 5가지 죄가 없어지고 5가지 선행만 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부분을 착각했기 때문에 자신은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죄인과 세리보다 악한 자로 책망을 받게된 것입니다"
[맺음말]
나는 세상에 대한 넓은 식견도 없고, 타 종교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한 적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아직까지 나는 기독교 이외의 타종교에서 '용서를 통한 구원'의 개념을 발견한 적이 없다. 그것이 내가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의 종교라고 굳게 믿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중략]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사람이 의롭게 됩니까? 율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것입니까?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
(로마서 3:2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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