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t-Making 목회
Tent-Making 목회
"그 뒤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본도 태생인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다. 아굴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갔는데, 업이 서로 같으므로, 바울은 그들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을
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18장 1~3절)
'Tent-making'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면서 선교를 했던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자비량(自備糧, 생활비를 자비로 충당하는 것)사역을 일컫는다. 목회자들에게 입국이 허가되지 않는 지역에서 본인의 전공분야 관련 직업을 가지고 들어가 선교를 하는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tent-maker로서 일하고 있기에 선교 분야에서는 전혀 생소하지도 않고, 이미 보편적인 개념이 된지 오래이다. 그러나 10여년 전 두란노 서원에서 실시한 설문 결과에 의하면 목회자가 별도의 직업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이나 일반 신도들이나 큰 거부감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여진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작용하고 있겠지만, "목회자"="신약시대 레위인"이라는 (성경적 기반이 부실한,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고와, "성(聖)"과 "속(俗)"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가 어느정도나마 기여하고 있으리라.
목회에 대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신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한국인 사역자들은 전에 가졌던 삶의 기반으로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도, 선배 목회자들도 한 목소리로 외친다. 목사가 별도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라고.
정말 그런 걸까? 하고 다시 질문을 던져 본다. 혹, 이런 신념이 천주교의 신부가 되려면 반드시 독신 서원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닐까 반문해 본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예배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만을 기뻐하시고 나의 생활비를 위해 일하는 것을 덜 가치스럽게 생각하실까?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問: 국민학교 교사와, 경찰과, 목사가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하면 누가 돈을 낼까? 答: 식당주인!"
Anti-기독교인들이 위와 같은 농담을 하는 것이 혹, 빈궁함과 부족함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삶이 너무 오래다보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는대로 '받기'에만 익숙해져버린 목회자들의 책임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역력하게 영성이 고갈되고 메말러 버린 목회자들을 종종 본다. 이 경우,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거의 예외 없이 그 사역하는 교회도 침체되고 갈등하여, 뒤에서 혹은 대놓고 목회자를 비난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만약, 그 자리가 무보수 였다면, 그래도 교인들은 그 목회자를 저렇게까지 공격하고 괴롭힐까? 저런 상황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 과연 목회자 자신의 소명에 대한 믿음과 부담 때문일까? 그 자리가 무보수 였다면, 그래도 목회자는 계속 저렇게 수 많은 교인들과 충돌하며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사임하는 것이 가족의 생계에 대한 걱정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저렇게 고갈된 영성을 무릅쓰고 설교단을 지키려고 할까? 절대화 할 수도, 내가 알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마 아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때가 더 많았다.
고갈되고 탈진한 목회자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있다. 사역을 무리하게 계속하려고 하기 보다는 쉬고 안식하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비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가족의 생계가 당장 걸려 있으니 내려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렇게 침체된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임하기도 힘든 노릇이고...(그 정도 믿음이 남아 있었다면 그렇게 고갈되지도 않았을테니까) 교인들은 월급이 아깝다고 아우성이고...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결과로 교회에 나타나는 상황은 정말 참담하기만 하다.
상황에 근거해서, "그러니까 차라리 tent-making 목회가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시되는 full-time목회가 성경적 근거도 빈약하고, 현실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교회 size가 커질 경우 tent-making목회로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냐고. 당연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실제로 잘 아는 후배 한명은 교수직과 목사직을 병행하다가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다. 아마도 대안은 협동+cell 목회일 것이다. 교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많은 행사들도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 없애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인들이 관객이 아닌 출연자로 사역에 동참해야만 할 것이다. 교인수 증가하는 것도 더디어 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유리하는 양떼와 같은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도, 그 군중의 숫자 자체에 주목하지 않으셨다. 그 분의 관심은 '교인 만들기'가 아니라 '제자 삼기' 였기 때문이다.
Full-time 일변도의 목회는 superstar 목회자, superman 목회자가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운 현실로 이미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목회자가 먹고 살만한 괜찮은 직장으로 인식되는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다. 이제는 많은 경우에(다 그렇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목회한다는 것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헌신하는 자리로 인식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끊이지 않는 담임목사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교회의 힘을 소모시키고 나아가 불신자들에게 조롱거리를 제공하는 단골 메뉴가 된지 오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비성경적인 자리를 놓고 우격다짐을 하면서, 그것이 소명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몸에 죄를 쌓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에 대한 calling을 주셨다고 믿는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당신의 tent를 만들 공구를 다 태워 버리라는 말씀을, 교수님이나 선배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셨는지에 대해서 다시 확인해 봐야지 않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믿음으로 순종하되, 잘 모르겠다면 계속 당신의 tent를 땀흘려 만드는 것이 오히려 합당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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