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스티그마와 바리새
‘스티그마’와 ‘바리새’
첫번째 글에서 잠시 언급한 스티그마의 첫 자체 수련회에 김동호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의 제목은 ‘스티그마와 바리새’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때 딱 한번 들었을 뿐 다른 곳에서는 다시 듣지 못한 설교이지만, 또 다른 자리에서 들은 분들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10년이 훨씬 더 되어서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강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의 소위 말하는 성서 중간 암흑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우리 민족이 이런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민중 봉기에 가담하고, 어떤 사람은 외딴 곳에서 세상과 격리된 금욕 수도 생활을 했습니다.
이 중 한 그룹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준수하지 않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짓고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영적 각성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들 가운데 율법과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은 율법을 날마다 열심으로 연구하여, 율법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율법 준수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바리새’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리새’는 애초에 아주 좋은 의도의 훌륭한 신앙 각성 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화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렇게 제한된 말씀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의 의로움과 죄됨을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의로와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고 죄를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선행과 범죄는 서로 상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행을 했다고 해서, 율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지은 범죄는 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그저 ‘용서와 긍휼’을 통해 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그마. 좋은 모임입니다. 말씀을 실험하면서 살겠다는 마음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높은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신차리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참 쉽습니다. 그러는 순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바리새인이 될것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 모임에 너무나도 꼭 필요한 그리고 적합한 말씀이었고, 이후로 나는 이 설교를 본회퍼 목사님의 “우리는 경건한 의인이 아닌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라는 말씀과 함께, 내 평생의 좌우명과 같이 여기면서 살고 있다. 나는 김 목사님의 이 말씀이 고세훈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영성적 가난함’ 이라든가 ‘자기 정당화나 자기 의의 수단’ 의 염려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며, 또 김 목사님 스스로 이런 위험이 있음을 늘 인식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번 높은뜻 숭의 교회게시판에 함께 스티그마에 있던 한 후배와 글을 주고 받으시면서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잘못하면 바리새인이 될 위험성이 높으니 늘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락교회 기도원에서 스티그마를 시작하는 예배 설교를 하면서도 했던 이야기인 것을 아마 기억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개혁을 한답시고 이것 저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다니는 저의 위험성도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못하면 함부로 사람을 정죄하고 더 잘못하면 쓸데없는 교만에 사로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염려를 늘 하신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 위험성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김동호 목사님을 아끼시는 분들은 모두 함께 이 부분을 놓고 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role model’이기를 고집하시는 김 목사님을 생각하면, 마치 새로 개발한 백신의 최종 확인 작업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의 몸에 백신을 주사하는 과학자의 모습과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지곤 한다.
나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몇년 살면서 느낀 것이 나를 포함해서 한국 사람들의 사고가 사람을 ‘한 마디’로 평가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누구를 존경하다가 그 사람이 뭔가 잘못한 일이 발견되면 대뜸 나오는 말이 “그런 사람인줄 몰랐는데 내가 속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때 OOO한 일도 나름대로 꿍꿍이 속이 있어서 가식적으로 한 것에 불과한게 분명하다” 라는 식이다.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잘 생각해 보면 얼마나 바리새적인 사고인지 모른다. 선행과 범죄가 한 사람에게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한가지 범죄로 인해 그 사람의 모든 선행을 상쇄시켜버리는 사고 방식이다.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로만 되뇌일뿐 실제로의 삶에서는 그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 최근 몇년간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스캔들이 여러군데서 터져 나왔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그 분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거의 볼 수 없고 무조건적인 덮어두기 아니면 ‘싸잡아’ 삯군으로 몰아가기 일색이라는 것이다. 양쪽 다 바리새 적인 사고에 깊게 물들어 있다. 그래서 이에 관련된 사람을 다시 살려 세우지 못하고 넘어뜨려 죽게 한다.
지난 20년간 교회 다니면서, 34.8%라는 수치는 고사하고 레위기와 신명기의 곳곳에 적혀 있는 이웃 사랑과 나눔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설교조차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나마 좀 강조하시는 분들이 대천덕 신부님, 김진홍 목사님, 김동호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최일도 목사님 정도일까? (이외에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더 있겠지만) .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기껏 강조하는 것이 십일조와 주일성수 정도 였다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십일조는 원래의 목적에도 맞지 않게 쓰여져 와서 교회가 담당해야할 ‘나눔’의 책임은 거의 도외시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가 읽을 성경이 없어서도, 그 내용이 성경에서 삭제되어서도 아니었다. 성경에는 쓰여 있는데 그런가 보다 하고 대충 넘어 가서 그런것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깨끗한 부자’라는 책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나눔’ 의 책임, ‘정직’ 과 ‘공평’ 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끌어내 공론화 했다는 면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첫번 째 글에서 바는 ‘깨끗한 부자’라는 책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부자 ‘한 사람’을 바라는 마음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주장했지만 독자층 전체를 한번쯤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깨끗한 부자’ 를 읽은 비교적 부유한 성도들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생각해 보면서 내 나름대로 한번 구분을 해 보았다. (1) 하나님 앞에 진정한 믿음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별 느낌 없이 구애 받지 않고 전에 살던 대로 살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이런 책 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2) 잘 읽은 후 ‘너무 요구사항이 과하다. 원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한국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3)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도전을 받고 좀 더 깨끗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벌고 34.8% 분배를 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열심히 살지만 그 목표에 잘 이르지 못하는 본인을 보면서, 덕분에 (?) 주님 앞에 겸손하게 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4) 또 어떤 사람들은 고세훈 교수님께서 우려한 것 처럼, 34.8%의 목표를 결국 달성(?) 했기에 ‘이제야 내가 깨끗한 부자가 되었구나’ 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5) 끝으로 34.8%의 목표를 달성 했지만, 그저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생각하며 할 수만 있다면 10의 10 전체를 드리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가 김동호 목사님께서 목마르게 찾고 계신 ‘한 사람’이며 고세훈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성적 가난함’ 을 제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 일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3) 정도에 해당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것 자체 만으로도 한국 개신교회의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4) 나 (5) 까지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고세훈 교수님은 (4) 의 경우를 우려하시면서, 부자들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하셨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1) 이나 (2) 의 경우라면 마음의 불편함을 오히려 느끼지 않겠지만, 마음의 불편함 없이 (4) 의 경우까지 갈 부자들이 있을까 하는 의아함이 생긴다. 그리고 전혀 근거 없는 막연한 내 생각 입니다만, (4) 가 많을까 (5) 가 많을까를 생각할 때, 나는 (5) 가 더 많을 것이다라는데 걸어 보겠습니다 (도박 용어를 써서 좀 그렇긴하지만 -_-). 왜냐하면, (4) 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시기 시작하면 내 생각에 분명 김동호 목사님께서는 다른 책을 하나 더 내실 것 같으니까 (^_^ 반농담, 반진담)
(4) 에 해당하는 사람들, 아마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을 우려해서 성경에 명확히 제시된 ‘일차’ 기준선을 말하지 말라고 목회자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4)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을 때 “김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 에 써 있는대로 했을 뿐이다” 라고 변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교만이 스스로의 눈을 멀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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