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Role Model
Role Model
오늘날 우리는 수 많은 엄마 게를 본다. 자기도 게 걸음질을 하면서, 아들 게에게 ‘그렇게 걷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이지만, 그는 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다. (고린도 전서 4:16,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는 스스로가 전하는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role model 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동호 목사님께 말한다. 개혁한다고 동네 방네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호를 외친다고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구호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role model’이 되어 몸소 보여주려고 하는 ‘고집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설교를 삶으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분들은 훨씬 적은 것 같다 (막연한 내 생각이다. 혹 내가 목회자들을 매도한 것으로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사과를 드린다). 내가 보기에, 김동호 목사님이 role model이 되고자 하는 그 ‘고집스러움’이 없으셨다면 최근 받고 있는 많은 지탄은 아마도 면할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 소재가 가까운 곳에 있다. 본인의 느낌, 본인의 가족 이야기, 본인의 결심, 본인이 만난 사람들…. 어떤 부분은 보기에 따라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본인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들까지도 있곤 하다. 몇년 전 목회자 사례비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그리고 ‘청부론’ 논쟁을 일으킨 것도 다른 분들처럼 어느 정도 감추고 있으면 될 부분을 굳이 드러내서 자초한 것이라고 보인다. 적어도 지금껏 내가 보아온 바에 의하면, 김 목사님은 타인에게 요구하기에 앞서 반드시 본인 스스로 그 요구를 실행해오셨다. 작게는, 이삭 줍기와 정직한 세금 납부로부터 크게는 목사 재신임, 정년 단축, 원로 목사제 폐지 등등. 내가 알기로 김 목사님은 결코 많지 않은 월급 받던 영락교회 교육 부목사 시절부터, ‘깨끗한 부자’에서 주장하신 34.8%의 나눔을 실천해 오셨다. 더 많이 받으시는 지금은 어떨까? 목사님 가족들과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34.8%를 넘기면 넘겼지 못 미치지는 않을거라는 것, 더 하시려고 하시면 했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실거라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목사님의 모습에 근거한 추측이다.
개인적으로 고세훈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영성적 가난함’에 깊게 동의하지만, 고 교수님께서 김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를 일컬어 ‘편하고 수월한 처방’이라는 표현은 솔직이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번째 글 쯤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고 교수님께서는 그것이 편하고 수월하게 생각하실 정도로 많은 나눔의 삶을 살고 계시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34.8%의 처방전 조차도 너무나 힘들고 버겁게 느껴지고, 반대로 내가 어떤 모습의 삶을 사는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영성적 가난함’을 말하는 것이 도리어 쉽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부족한 나의 경우만일까? 나도 사회 생활한 지가 한참 되었다. 그런데 월급 100만원 받으나, 200만원 받으나, 300만원 받으나, 나누어 주는 것은 여전히 힘들기만 하다. 곰곰히 잘 생각해 보면 수입이 더 많은 것이 여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기 저기서 조금씩 (조금 더 좋은 집, 조금 더 좋은 차, 조금 더 좋은 음식, 조금 더 좋은 아이들 과외, 정말로 조금씩…) 더 쓰다 보면, 티 나지 않게 결국 빠듯하게 살기는 대부분 마찬가지요 (엄청난 거부인 경우를 제외하면), 더 벌면 더 베풀겠다는 것은 내 합리화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결론이다.
김동호 목사님이 ‘role model’을 고집하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도 ‘영성적 가난함’에 쉽게 동의하고 쏟아지는 비난을 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님은 본인이 그 영성적 가난함의 필요를 느끼고, 먼저 실천 해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남들에게 요구하지 않을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김 목사님을 향한 고세훈 교수님의 “자기 정당화나 자기 의의 수단”를 염려하는 지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부분은 다음 번에 올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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