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CH에게 --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읽었던 책중에 "바라바"라는 소설이 있다. 무척이나 오래전이어서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 분노한 유대인들의 덕분에 바라바는 사면되어 풀려났다. 정확히 왜 풀려났는지도 잘 모르는채 그날따라 한산한 길을 방황하다가 그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죄책감에 절망하고있는 베드로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자기가 예수라는 자칭 메시아 대신에 풀려난것 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얼마후 그는 사소한 죄로 다시 징역을 살게되는데 감옥에서 만난 한 사하뜨라는 사람으로부터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해듣고 자신도 신자가 되기를 서약하여 자신의 죄수 목걸이에 물고기 표시를 한다. 어느날 죄수중 누구인가의 밀고에 의해서 바라바와 사하뜨는 간수에게 끌려가 목숨 이냐 배교냐의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고 바라바는 사하뜨의 순교를 보며 배교를 하게된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사하뜨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수 없었고 마음 한구석에 그로인한 무거움을 간직하게 된다.
세월이 다시 흘러 바라바는 징역을 마치고 로마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밤 로마의 구석구석에 화재가 났고 불이 점점 번져가는데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크리스티아누스들이 불을 질렀다!’ 순간 바라바는 그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자신의 배교를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더 생각할 것 없이 로마에 불을 더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곧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로마 감옥에서 그는 다시 베드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의기양양하게 자신도 로마에 불지르는 일에 함께 하였으며 이제는 배교하지 않고 떳떳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순교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황당한 눈초리로 바라바에게 말했다. ‘우리 크리스티아누스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올바로 안다는 것이 나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루터는 다미선교회와 비슷하게 예수재림일을 내세웠었고 칼빈의 예정론 덕분에 초기 장로교인들은 전도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성 어거스틴이나 성 프란시스코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진도 성경의 많은 부분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을것이다. 그 당시에는 성서의 역사적, 관습적 배경을 제대로 연구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나 누가 감히 그들보다 하나님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산다고, 더 올바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를 더 잘 믿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것인가. 그렇다면 올바른 신앙이란 것,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100% 결부시켜 생각할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 바라바, 위에 쓴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고 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판정을 내리실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비록 그것이 내가 착각하고 있는것일지라도 내가 믿는 옳다하는 바, 내가 믿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나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드릴수 있는 그런 열정을 부러워 했다. 사울은 분명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전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였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서 나온것을 아셨기에 그의 행동 방향을 돌려놓으셨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예리한 지적의 글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예리한 지적이 없더라도 교회와 지체에 대한 타는듯한 사랑을 뭉클뭉클 느낄수 있는 글을 볼 때면 나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존경하고 또 부러워 하지 않을수 없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롬 14:8) 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있다. 14장 전반부로 미루어 볼 때 음식을 먹고 안먹는 문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등이 있었던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라고 대답을 하고 있다.
오늘날은 다시 그것이 퇴색되어가고 있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에서는 술,담배를 엄격히 금해왔다. 과거 수도사들은 신앙의 표출이 얼마나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가에 의해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영국의 윈스턴 처어칠 수상이나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같은 사람들은 궐련을 즐기던 사람들이면서도 위대한 신앙의 본보기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교회에서 기타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지만 15년전까지만해도 나는 영락교회에서 단지 기타를 가지고 다니는 것 때문에 모 장로님으로부터 꾸준하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그 분은 소위 영락교회 고등부 터줏대감으로 유명하신 분인데 30~40년에 가깝도록 지각한번 안하신 지독한(?) 분으로 소문이 나신 분이다. 하루는 학력고사(요즘의 수능고사)를 앞둔 고등부 후배들에게 엿을 주려고 갔던 대학부학생들이 그 장로님에게 야단 맞고 있는 것을 구출(?) 하려다가 한바탕 또 야단을 맞아야 했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그분에게 항변을 하였는데 나의 항변에 대한 그분의 대답을 들으면서 비록 그분은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의 신앙의 절개와 신념과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나를 야단치는 그 횟수가 더할수록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다.
나는 대대로 영락교회에 다닌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사실 내 믿음을 키워준 대학부외에는 크게 애정이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영락교회 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하는 것은 다름아닌 영락교회 본당건물이다. 아마도 들어서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락교회의 본당은 돈많은 교인들 몇명의 과시적 헌금을 긁어모아 자랑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성전을 재건축하듯 피난민 교인들이 손수 정릉에서부터 돌을 지고와 일일이 씻어서 지어 하나님께 봉헌한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다운 신앙의 자취이다. 일부에서 비판을 하는 기념관은 어떤가?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기념사업 계획을 교회에서 발표하고 한달이 채 안되는 기간에 각 교인들이 가족회의를 통해서 결단하고 지속적으로 헌신한 결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다른 교회 같았으면 작정 부흥회도 몇번 열고 법석을 떨었을 일을 간단히 결정한 것은 본당을 직접 지은 교인들과 그들의 2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러한 헌신을 잘못된 신앙관의 소산물로 보고 싶지는 않다.
항상 그랬듯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신앙관에 있어서 많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영락교회 기성세대의 일반적인(이런 표현을 감히 써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앙관을 한번 살펴보자. (이 글을 읽는 사람중 모태신앙이었던 사람중 많은 수가 자신은 젊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기성세대의 신앙관이 아닌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아마도 느낄것이다.) 그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히 구분한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분하며, 영혼구원과 현세구원을 구분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교회에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고, 주의 종으로 쓰임받는 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고, 목회자가 되는 것과 교회를 개척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는 꾸준한 십일조와 많은 헌금과 교회 건축으로 표시되며 주의 종에게 잘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앙관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는 많은 토론을 요하겠지만 짧게 언급한다면 나의 신앙관은 위에 언급한 어떤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전통적일뿐 성경적이지 않고 성경에 입각해서 개혁되어져야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신앙관에 따라 믿음 생활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음 생활을 이어가는 기성세대를 하나님보시기에 악하다고 감히 단정할수 없다고 나는 또한 믿는다.
과거에 한국에서 교회가 사회의 온도조절계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에는 목사의 말이 권위가 있어 예배시간에 조금 늦었다고 목사님이 자신의 은사이신 장로님을 공개적으로 야단치고 끝날때까지 서서 예배드리게한 일이 있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에 숯불에 인두를 달구어 다리미질 한 돈을 드렸다. 나라 잃은 가운데에서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수십리 길을 걸어 전도하러 다녔다. 식민지의 착취하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헌신하여 돈이 없는 사람은 이부자리를 하나님께 바쳐가며 자신의 집은 못지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지었다. 이러한 헌신의 배경은 다름아닌 개혁되어져야할 현 기성세대의 신앙관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감히 이들의 헌신을 잘못되었다고 할수 있단 말인가?
교회의 개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기성교인들의 신앙모습을 보면서 비판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두었으면 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지혜가 부족한것일지는 몰라도 비판 받을만한 죄는 아니며 낡은 것과 악한 것은 분명 구분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 침례교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는 남미의 카톨릭 신자들 안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 때 그는 "그렇지만 하나님, 제가 어떻게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들이 행동하고 믿는 모든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항변을 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너와 함께 일하지만, 나 역시 네가 하는 것과 믿고 있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단다."
내게 가장 절친한 친구를 통하여 소개 받은 신학자가 있다. Dietrich Bonhoeffer. 그의 저서중 하나인 "신도의 공동생활", 한국을 떠나면서 가져온 몇 안되는 책중 하나라서 원문 그대로를 옮길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 앞부분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나의 생각을 마무리 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는 결국 자기의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
그가 온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외딴 은둔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는 것입니다. ...
그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은 흩어진 대로 있을 것인데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불신자들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서 먼 나라에서 그를 기억한다는 점에서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은 때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보이는 사귐 속에서 살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최후의 것을 은총으로 미리 받은데 불과 합니다. 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
어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존재냐 하는 것, 다시말하면 그의 깊은 내면성과 경건이 우리의 사귐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형제 관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서만 서로서로를 형제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 이외의 무엇을 바라는 모든 불손한 소원은 이로써 아주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것 이상 무엇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사귐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데서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사귐을 경험해 보고 싶은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사귐에다 깨끗지도 순수하지도 못한 소원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 형제의 사귐이 아주 처음부터 부딪히는 최대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 형제의 사귐을 자기가 바라는 어떤 경건한 사귐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사귐을 바라는 경건한 마음의 자연스런 욕망과 그리스도인 형제의 사귐의 영적인 현실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흔히 송두리째 깨어져 나가는 까닭은 그것이 무엇인가 바라는 생각에서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 뛰어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공동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데 대해서 아주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이같은 모든 꿈을 금방 깨뜨려 버립니다. ... 우리는 남에 대해서, 그리스도인 전반에 대해서, 아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주 실망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사귐속에 들어오는 인간의 모든 희망적인 꿈이야말로 참다운 사귐 속에 들어오는 인간의 모든 희망적인 꿈이야말로 참다운 사귐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에 부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사귐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보다도 사귐에 대한 자기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본래 뜻하는 바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꿈으로 그려보는 사람은 요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사귐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법을 세우고는 그것을 따라 형제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심판합니다. 그는 형제들 사이에서도 모든 사람을 나무라기나 하는 듯이 떡 버티고 서 있습니다. 무엇이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을 그는 실패라고 합니다. 그의 꿈이 부서지면 사귐은 깨어진 것으로 봅니다. .......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사귀는 생활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한몸이 되도록 묶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사귀는 생활로 들어갈 때에 요구하는 자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받는 자로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하면 죄와 곤궁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그의 은총의 축복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형제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 아니냐 말입니다. 죄와 오해가 공동 생활을 침울하게 만드는 때에도 죄를 저지르는 그 형제라고 해서 어찌 그가 나의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 나도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죄는 언제나 새로운 동기가 되어서 우리도 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아래서 살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에게 몹시 환멸을 느끼는 그 때가 바로 나에게는 비할 수 없는 유익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아무도 자신의 말과 행위로 살 수 없고 우리를 진정 하나로 묶는 오직 그 한 말씀과 행위로 살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모든 꿈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때에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동터 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경우와 같아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우리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권리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귐이나 우리의 성화가 정말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늘 자기의 영적 생명의 맥박이나 짚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도 우리가 끊임없이 그 체온이나 재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받을수록 더 확실하고 꾸준하게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날마다 나아가고 자라갈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Tent-Making 목회 (1) | 2008.07.26 |
---|---|
도올, 그의 논리의 빈약함 (0) | 2008.06.29 |
왜 선행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가? (2) | 2005.01.16 |
담임목사제, 꼭 필요한가? (0) | 2004.10.30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사람을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 (0) | 2004.05.22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깨끗한 금그릇 (0) | 2004.05.21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스티그마와 바리새 (0) | 2004.05.20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Role Model (0) | 2004.05.19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한사람을 찾는 목마름 (0) | 2004.05.18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글을 시작하며... (0) | 2004.05.17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스티그마와 바리새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스티그마와 바리새
2004.05.20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Role Model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Role Model
2004.05.19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한사람을 찾는 목마름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한사람을 찾는 목마름
2004.05.18 -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글을 시작하며...
내가 이해하는 '청부론' -- 글을 시작하며...
200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