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들어보고 싶은 구자범의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인터넷에서 우연히 2년전 KBS에서 방영했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말하다>라는 구자범 지휘자의 강의를 봤습니다. 아마도 작곡과 학생들을 상대로 했던 공개강의 같은데, 구자범 지휘자가 피아노로 부분 부분 연주를 해가면서 (피아노를 떡 주무르듯 한다는... 😵), 본인의 원래 전공인 철학적 지식을 기초로 자신이 해석하는 교향곡 9번을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해박하고 달변이라는... 😵). 작곡 전공하시는 분들께는 전혀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네요.
강의 첫 부분에 소개하기를 구자범 지휘자 자신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고 싶어 철학과 대학원을 그만 두고 지휘를 시작했으나, 곡이 너무 심오해서 아직까지도 감히 지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곡은 베토벤이 획기적으로 교향곡에 성악 부분을 넣으면서, 실러(Friedrich Schiller, 프리드리히 쉴러)의 시 일부를 빌려 사용했는데요, 찬송가에도 있는 익숙한 곡이고 예전에 지역 합창단의 객원 단원으로 낑겨 샌디에고 심포니 (San Diego Symphony) 연주에 맞춰 원어로 불러본 적도 있지만 가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구자범 지휘자는 이 곡의 한국어 번역의 조악한 부분들을 짚어 가면서, 베토벤의 일생과 괴테/칸트와 비교되는 실러의 철학 세계에 비춰 원어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풀어 나가고, 곡에서 각 성부와 악기들이 주고 받는 화자(話者, narrator)가 누구일지를 해석합니다. 자신이 이 곡을 지휘한다면 반드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할 거라고 하네요. 베토벤이 이 곡의 주 선율을 '도레미파솔' 5개 음만 사용하고 대부분을 정박으로 단순하게 작곡한 것 자체가 각 나라에서 번역곡으로 불리우기를 의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조심스러운 추측과 함께...
강의 길이가 1시간 8분으로 좀 긴 편이지만, 시간 되시면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티스토리에서 직접 동영상 재생을 하는 것이 막혀 있네요. 여기를 누르시면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구자범 지휘자가 교향곡 9번을 지휘할 때가 온다면 꼭 한번 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2023년 1월 25일 업데이트] 드디어 구자범 지휘자께서 2023년 5월 7일 오후 5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한국어로 연주하는 "합창"을 지휘한다고 합니다! [홍보 동영상]
구자범 지휘자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 중이던 25세에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10년 뒤인 2005년 독일 하노버 국립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로 발탁 되었습니다. 39세이던 2009년 광주시립 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1년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까지 순탄하게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2012년 말 첫사랑이던 부인이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떴고, 몇 달 만에 어렵게 마음 추스리고 돌아 왔는데, 단원 중 일부가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음해를 하자 환멸을 느끼며 2013년에 사표를 내고 지휘 자체를 그만하기로 결심한 바 있습니다. 그 후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5월 작은 연주회 도중 한 여성 단원이 연주를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에 따라 징계를 내렸는데, 평소 강도 높은 연습에 불만을 가졌던 (한편 이해는 가지만...) 일부 단원들이 그 여성을 부추겼고 (이건 도를 넘었지...), 인터넷 검색어 조작을 했다는 것 (이건 한참 넘었고...)으로 밝혀지면서 관련 단원들은 벌금형에 처해졌으나, 그에게는 이미 부도덕한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뒤였습니다.
2015년 12월 스위스에 방문한 길에,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클라우스 아르프 교수를 찾아 뵈었는데 암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교수께서 "다시 지휘봉을 잡겠다고 약속해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지휘를 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토요일에 만난 사람] 아내 죽음으로 지휘봉 놓고… 스승 죽음으로 지휘봉 들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 복귀를 했다고 보기에는 무척 뜸한 활동을 하고 있으나, 아직도 음악계와 팬들 중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구자범 지휘자의 젊은 시절 사진입니다. 로커(rocker) 박완규님의 젊은 시절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는... 😜
연세대 인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뒤풀이가 한창인 그 시각, 불 꺼진 강당에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술에 취한 한 남자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오페라 ‘나비부인’ 중 아리아 ‘어떤 갠 날’을 연주할 때 어디에선가 이탈리아어 가사로 그 노래를 읊조리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비로소 누군가 곁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라보엠’ 중 ‘내 이름은 미미’를 연주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다시 아리아를 토해냈다.
남자는 라이터를 켜 ‘미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얼굴은 당일 아침 캠퍼스에서 출발할 때 버스 타이어가 펑크나 남자가 타고 있던 철학과 버스로 옮겨 탄 사회학과 3학년 여학생이었다. 철학과 3학년생인 남자가 버스 안에서 오락시간에 ‘짝사랑하던 여자가 지금 우리 버스에 타고 있다’고 애정고백을 했던 여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 실력에 감탄하면서 동이 터올 때까지 말없이 연주와 노래를 이어갔다.
그를 경기필 신입단원 심사에서 외부 심사위원 자격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옥석을 가려내기 위한 만반의 음악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지원자를 테스트하느라 매우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그 심사 방식이 여타의 오케스트라 오디션과 매우 많이 달랐다. 그전에 해둘 말이 있다. 심사의 예민할 수 있는 얘기들은 피할 것이다. 그저 내가 만났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표현하는 정도로만 밝힐 것을 분명히 해둔다.
오디션은 일반적으로는 말 한마디 없이 주어진 과제곡을 한 번 연주하면 끝이었고, 그나마 그 곡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중간에 멈추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경우도 있어 통상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시험 중에 지원자가 잘 못하면 ‘지금 연주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해 보라’고 주문하였고, 자신의 지휘에 맞추어 연주를 해보라고 했다가 잘 따라오지 못하면 나를 비롯한 다른 심사위원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연주를 해보라고 요청했다.
테크닉이 어려운 것은 이제 그만하고 동요나 찬송가나 애국가 같이 쉬운 노래 중 아무거나 심사위원들에게 감동적으로 들리도록 연주해 보라고 하기도 했다.
타악기 오디션을 할 때면 인터넷 찬스, 전화 찬스, 사전 찬스를 사용하도록 허락했으며 이를 토대로 지금 주어진 악보가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연주하라는 지시인지 시간 내에만 알아내어 연주하라고 하기도 했다.
악보에 써 있는 말이 무엇인지, 그 악보가 곡의 어느 부분인 줄 아는지 그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음악을 왜 하고 싶은지, 하필이면 왜 경기필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지, 심지어는 당신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지 등등을 직설적으로 꼬치꼬치 물었다.
<중략>
모 주자가 취임 초창기 연습시간에 구자범 지휘자에게 대들고 자리를 차고 나간 것은 음악계에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그 당시에 들었던 속사정은 이랬다. 두번째 징계위원회에 들어가 그 사람을 살려주고 기회를 달라고 간청을 한 게 바로 다름 아닌 구자범 지휘자 스스로였던 것이다.
그가 징계당사자인 단원과 같이 가서, 징계위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오케스트라는 마음으로(!) 함께 음악을 하는 단체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마음이 떠났으면 함께 음악을 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의 1차 때의 징계는 정당했지만 사람이 반성하고 마음을 바꾸면 훨씬 더 좋은 음악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이 단원은 마음을 바꾸었으니 징계를 풀어 달라. 그가 함께 연주하면 훨씬 더 좋은 연주를 하는 단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용서해 달라.”
지금 구지휘자의 이런 속 모습을 아는 단원들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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