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마 故안수현: 2년만에 만난 백혈병아이 은진이
지난 10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10 월 26일이었다. 환자가 줄어들어 닫혀있던 53병동(소아과병동)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유를 물어보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한 번에 몰아서 치료를 받기로 한 날이라고 한다. 환자명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내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다. 김은진.
지금으로부터 만 2년전인 98년 5월경, 나는 소아과 인턴을 돌고 있었다. 당시에도 은진이는 간호사와 의사 모두들에게 칭찬거리였다. 당시 내가 써놓았던 글을 인용해보겠다.
은진이라는 아이가 있다. 7살짜리이지만 누구보다 어른스럽다. 척수강 내로 항암제인 MTX를 투여할 때에도 주치의와 cooperation이 가능한 아이이다. 고맙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
하루는 은진이 옆자리 아이를 항암제 투여하러 방에 들어갔는데, 은진이가 사탕을 집어준다. 어제 척수 검사할 때 힘들지 않게 잡아주어서 고맙다면서. 불현듯 누가들의 세계 작년호에 실렸던 글 내용이 기억났다.
만 두살 되는 아이였다. 그리고 심장에 심한 기형이 있었다. "네가 OO이니?" 나의 조심스런 목소리에 그 아이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그맣게 포장된 초콜렛 하나였다. 조금은 당황하며 나는 그것을 받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그 아이는 무엇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며칠 뒤였다. 이 세상에 남을 도와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나의 당황은 무엇에 대한 당황이었을까?..... (전우택, 두살짜리 아이와의 만남, 누가들의 세계 97년 3/4월호)
그 글에 실렸던 심장수술받았던 아이와 마찬가지로, 이 아이도 가장 약한 가운데에도 남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건강하지만 병든 이보다도 일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가졌지만 남과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나누는 순간 누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다. 언제나 부족함을 불평하며 거지의 구걸에 눈살을 찌푸리며 자기 쓸 것을 셈하기 바쁠 뿐이다.
병실을 나서면서 내가 줄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로 인한 희망을 나눌 수 있을까.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을까. 머리 속에 떠오르는 한 단어, '희망' 이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위한 책을 선물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5월 3일 새벽 5시, 옆 침대의 인턴 동료 삐삐소리에 잠이 깬 나는, 어린이 주일 아침인 지금을 D-day로 정하고 일어나 나누고 싶은 말씀을 10개 정도 준비해서 각 책의 앞장에 붙였다. 근무중인 간호사들도 도와주었다. 그리고 소아암 환자들의 병실 각각에 책을 조용히 배달했다. 만화책 [사랑의 학교],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합본집, [로아네 집], [그림 성경]...
내게 '나눔'을 일깨워주었던 그 아이. 정말 그 은진이일까? 그 이후로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는데.
흥 분되는 마음으로 병실로 들어서자, 내 눈 앞에는 훌쩍 커버린 은진이가 있었다. 빡빡이었던 머리도 예쁘게 자라 있었다. 은진이 어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상태를 물어보니 경과도 좋아서 이제 치료를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한다. 2년 반동안의 항암치료를 참 잘 견뎌냈구나. 숙소에 뛰어가 성구가 적힌 작은 액자와 찬양테이프를 나누고, 은진이는 이번에 퇴원하면 교회에 가겠다고 서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나는 좋은 경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다른 일이 있어 은진이 모녀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날 밤, 다른 환자때문에 소아과 병동을 다시 지나가다가 병동에 놓여있는 한보따리의 옛 입원기록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동안의 경과가 궁금해 은진이의 기록들을 들춰보던 내 눈에 각인되는 숫자. 921031-.....
은진 이의 생일이 10월 31일이었구나. 순간 내 마음에 한가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해보면 과연 어떨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 나는 다음날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9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어울릴 생일선물이 무엇이겠는지를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이 '모자'였다.
평소 옷이라고는 한번도 직접 사본 일이 없던 내가 백화점 아동의류 매장을 뒤져 예쁜 모자를 골랐다. 그제서야 뒤늦게 조카 생일때 무심하게 지나쳤던 기억이 나 모자 하나를 더 집어들었다.
입 원 차트에 적혀있던 은진이의 집은 경기도 군포시였다. 10월 31일, 주소를 적은 메모를 들고 예쁜 생일케익을 함께 준비해서는 무작정 군포시로 향했다. 가는 도중 차가 고장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어렵지 않게 은진이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 전화를 걸어서 은진이 어머니께 찾아왔노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은진이와 함께 나를 맞아준 은진이 어머니는 당황스러워했고, 집안이 손님을 맞기에는 너무 어수선하다며 옆집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나를 옆집 빈방으로 안내했다.
방 두칸짜리의 누추한 반지하집에서 커피와 순대, 떡볶이를 대접받으면서 한 시간 가량 시간을 보냈다. 은진이에겐 4살짜리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을 돌봐주는 모습이 기특했다. 은진이 가족은 부부가 모두 가내업을 하면서 어렵사리 생계를 꾸리고 병원비를 대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과연 내가 여기를 찾아와서 무슨 위로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불확실한 내일을 사는 이들에게 내 모습이 오히려 괴리감과 상처만 안기는 것은 아닐까? 내 만족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 그 반지하 방에서의 한시간 동안에 내 기억 속에 찾아온 것은 바로 내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 내가 어릴 때 살던 집도 이런 좁은 집이었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시간들 ―
아버지의 실직, 갑자기 생긴 부채, 차례로 입시를 코앞에 둔 4남매들의 뒷바라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추운 겨울.
차츰 나는 이 어려운 젊은 부부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도 아픈 사람이 있었기에 아기가 백혈병을 진단받았을 때의 절망감이 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와 같이 되신 성육신의 비밀 말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선물을 보내준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가 되셨다. 누추한 육신을 입으시고, 낮은 자를 보듬어주시며,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심으로 가장 큰 선물을 주셨다.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깊이 이해하며 위로하실 수 있다.
나 너를 위해 몸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은
너를 내 몸보다 사랑함이라
나 너를 위해 십자가 짊어져도
슬프지 않은 것은
내가 너를 기뻐함이라
나 너를 위해 일찍 죽임을 당했어도
억울하지 않은 것은
너를 살리고자 내가 죽었음이라
나 너를 위해 부활하여 영광을 보이노라
나 너를 위해 세상에 다시 오리라
<나 너를 위해>, 송명희
내가 은진이 어머니에게 전할 수 있는 메시지는 그렇게 두가지였다. 우리 가정 또한 비슷하게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주님을 의지했을 때 여기까지 선하게 인도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은 역시 은진이 가정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 앞길을 책임지시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당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여기를 찾게 하셨구나.
다행히 준비한 모자는 은진이에게 잘 어울렸다. 은진이에게 교회 가기로 한 약속을 다시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백미러로 두 모녀의 손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11월 말에 외래진료가 있으니 그때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무언가를 주고 온 것 같긴 한데 내 마음은 한아름 받아들고 나온 기분이다. 나의 작은 걸음이 9살의 백혈병 아이에게 복음과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를, 또 하나님은 반지하의 누추한 집에서 기약없는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기억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2년전 내게 나눔을 가르쳐주었듯이, 나를 울타리 밖으로 또 한번 움직이게 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한 고마움을 뒤로 한 채.
I talk to you, You talk to me 우린 서로 말하면서
We speak in our own language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These common truths that we believe 진리의 모닥불에 함께 모여
are like a warm, inviting fire we gather 'round 마음과 몸을 녹이지
But there's a danger lurking here 하지만 이 평안 속에
Inside our peace of comfort 숨은 위험이 있네
We've got to go out in the dark 우린 어둔 곳으로 가야 해
'Cause there's a hungry heart 주님을 알기 원하고
that's longing just to know 돌봄이 필요한
that someone cares enough to go 굶주린 영혼들이 있기에
CHORUS
Out there, Someone needs a friends 저 밖에서, 친구를 찾고 있네
who'll walk against the wind 낯선 땅을 향해서
to a place that's strange and unfamiliar 비바람을 함께 헤쳐나갈
Out there, where all of us have been 저 밖, 주님 사랑을 알기 전
until love brings us in 우리 모두 있었던 그 땅
so who will dare to go and be a friend 누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줄까
'cause someone really needs a friend out there 저 밖 누군가 친구를 찾고 있는데
So we'll sing for you, you'll sing along 우리 함께 노래하세
We'll let this song remind us 우리 기억할 것은
poor, hungry beggars all are we 우리모두 이유없이 잔치에 초대된
invited to a feast that none of us deserves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었음을
filled to go to love and serve 남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repeat chorus) Somewhere out beyond 놀라운 은혜의 음성
the sweet sound of amazing grace 들을 수 없는 저 너머에
Someone needs to see God's love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꼭 알아야 할
and mercy face to face 누군가가 있는데....
<OUT THERE>
- by Steven Curtis Chapman, Bob Briner, Michael W. Smith
from the album [ROARING LAMBS]
2000/11/22
스티그마 안수현
stigmas@nownuri.net
고대병원 내과 R2
한국누가회(CMF)EVER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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