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하나님이 신도의 마음에 임하실 때는 교회 내에 설치한 제단 위에서 임하시지 않습니다. 혹 고요한 수풀 속에서 혹은 큰 물결이 이는 해변에서 또는 회개의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침상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나는 교회의 절대적 불필요를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세상의 교회론자가 교회가 행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교회의 필요를 주창하는 것을 볼 때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 신자들은 열심히 협동일치의 필요를 말합니다. 나도 물론 그것에는 대찬성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들 가운데 과연 화합일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만 이것뿐입니다. 만일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이 소위 기독교 교회라는 것은 결코 화목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는 목사가 서로 반목(反目)하고 신도가 서로 다투며 참소가 있고 모함이 있고 파당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때로는 구역질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요사이 어떤 신자가 나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불신자 사회에 있었을 때에도 아직 한 번도 교회의 형제들 사이에 있는 그러한 끈질긴 싸움을 본 적은 없습니다"라고. 나 자신의 경험도 같은 것입니다. 나의 생애에서 내가 만났던 가장 나쁜 사람은 교회신자였습니다. 그의 궤계, 그의 간핵은 도저히 불신자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물론 여러분의 이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의 교회란 결코 화락일치의 마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일치가 만일 있다면 여러분의 교회 내의 일치에 그치는 것입니다. 널리 다른 교회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 나라에 대표적인 교회만 하더라도 40이 넘는데 그 다수의 교파사이에 실로 차마들을 수 없는 불화 경쟁이 있는 것은 당신께서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실상은 기독교신자는 아니다"라든가 "정통교회는 우리 교회뿐"이라든가 그밖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을 그들 교회 신자는 자기 교회 이외의 교회에 대해 하는 것이 아닙니까?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그렇다. 진정코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감독교회는 퀘이커교회를 주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신교와 구교 사이에 개와 고양이 보다도 더한 질투와 투쟁이 있느냐 말입니다. "형제와 연합하여 화목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성서의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조합교회와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관찰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 성스러운 가르침에 가장 좋은 반증을 얻으시고 눈물과 함께 당신의 확신을 더 굳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무교회 신자에 『성도의 교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못입니다. 우리들 사이에도 지극히 두터운 교제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회원증이 없으므로 서로 이것을 보이면서 교제를 구하는 편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주를 믿고 그 구속을 받은 자는 회원증을 보이지 않아도 결국에는 깊은 영적 형제임을 서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게 된 후의 우리들의 교제는 이것을 맛보지 못한 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칙에 복종하여 된 일치는 아닙니다. 이것은 성서에 말하는 바 『영의 일치』(엡 4:3)입니다. 그리고 이 일치는 특별히 반드시 무교회신자 간에만 한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속한 자, 속하지 않은 자의 구별 없이 무릇 같은 영으로써 같은 주의 구속받은 자 사이에 있는 일치입니다. 진심으로써 주를 믿는 자는 모두 우리들의 형제입니다. 우리들은 "귀하는 언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어 그 사람의 신자냐 아니냐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품성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의 감화력을 인정하여 그런 후에 그의 기독교신자임을 알고 그를 향하여 우리의 교제를 시작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에 대해...]
미국 농학자인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과대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찌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찌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에서의 사회운동과 앰허스트대학교(Amherst) 유학으로 신앙의 실천의 중요성과 신앙에 대한 생각을 굳혔고, 하드포드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성직을 특권으로 보아서 성직자가 되지는 않았다. 1888년 일본에 돌아왔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1891년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봉독식 때 정성 들여 예를 다하지 않은 '불경사건'으로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찌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등을 저술했다.
또한 《만조보》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하는등 바쁘게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라고 해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찌무라 간조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이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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