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노예제와 AI" 이재형
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는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우주 경쟁을 벌이던 1960년대 초, NASA에서 계산원으로 일한 세 명의 흑인 여성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컴퓨터는 물론 계산기조차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라, 우주 탐사에 필요한 모든 수학적 계산을 이들 흑인 여성 계산원들이 담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NASA에 컴퓨터가 도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계산원들은 공포에 빠졌다. 자신들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게 된다면 자신들은 실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흑인 여성 계산원의 리더격인 도로시 본이 FORTRAN 교재를 가져와 계산원들에게 프로그램 기술을 배우라고 설득한다. 얼마 후 NASA에 컴퓨터가 들어오고, 계산원들은 모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한층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러다이트 운동 (Luddite Movement) 이 일어났다. 기계가 숙련 노동자의 자리를 차지하여 노동자를 내쫓는 이른바 "기계가 사람을 먹는" 사회 현상에 반발하여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기계 파괴" 운동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 사회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단기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우려대로 고용은 악화되고 노동자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기계의 도입이 오히려 노동의 질을 높이고 노동자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러다이트의 오류"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당시 영국은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서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을 받아줄 수요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며, 식민지가 없었다면 노동 환경은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사실 식민지가 거의 없었던 18세기 네덜란드는 비슷한 상황에서 극심한 정체를 겪기도 하였다.
현재 AI가 빠른 속도로 인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수많은 직업군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어 가까운 시일 내에 대량의 실업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나는 평생 연구자로서 살아왔다. 요즘 AI를 이용해 보면 정말 엄청난 효율을 실감한다. 자료의 탐색, 수집, 정리, 데이터 분석과 이를 위한 프로그래밍, 보고서의 교정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므로, 노력이 절반 이하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사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따른 인간 일자리의 위협에 대한 우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떠오르는 화두이다. 최근에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1960년대 초기 자동화와 "트리플 레볼루션 (The Triple Revolution)"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컴퓨터와 자동화의 결합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불필요하게 되어 고용이 극도로 악화될 것이라는 공포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이것이 고용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사무 자동화와 ATM의 도입에 따른 고용의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좋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걸쳐 PC가 급속히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직업군이 위협받고 고용이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오히려 노동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터넷 혁명이 시작되어, 이로 인한 고용 축소 및 고용의 불평등 및 양극화가 크게 우려되었으나, 이 역시 오히려 고용 확대와 고용의 질 향상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새로운 시스템이 고용을 악화시키고, 나아가서는 국가 경제 자체를 붕괴시킨 사례도 있다.
로마 제국 초기 정복 전쟁으로 수많은 노예가 로마시를 비롯한 인근 이탈리아 각 지역에 유입되었다. 당시 로마시를 제외한 이탈리아 지방의 주된 산업은 농업과 광업이었다. 당시 건강한 남자 노예의 가격은 군인의 1년 치 연봉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 광산주와 농장주들은 너도나도 꼬박꼬박 월급을 줘야 하는 자유민 대신에 평생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를 투입하였다. 한편 일반 자영 농가는 노예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대농장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농토를 헐값에 팔고 자신의 터전을 떠났다.
로마시에는 여러 개의 노예시장이 있었고, 수많은 노예들이 거래되었다. 그럼 어떤 노예들이 가장 비싸게 팔렸을까?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 아름다운 미녀, 용감한 전사? 모두 아니다. 가장 비싼 노예는 전문가들이었다. 로마군은 점령지에서 1순위로 전문가와 사회 지도층을 노예로 뽑았다. 이들은 로마로 팔려와 의료 및 보건, 교육 및 학술, 경제 및 경영, 행정 업무 등 다양한 고급 직종에 투입되었다.
그리스와 인근 지역 출신은 철학, 예술, 교육, 소아시아 출신은 행정, 상업, 이집트 및 알렉산드리아 출신은 천문학, 수학, 의학, 시리아 출신은 금융, 무역, 세공 등의 업무에 많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세계의 인재들이 노예의 신분으로 로마에 모이게 된 것이다. 이들 전문가 노예들의 가격은 일반 노예의 몇십 배에 이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일반 로마 시민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단순 일자리는 물론 고급 일자리까지 노예들이 다 차지해 버렸으니 일할 곳이 없어졌다. 게다가 광산과 농촌을 떠나온 자유민들까지 몰리니 로마시는 거대한 빈민굴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로마의 소비 여력은 줄어들고 경제는 더 곤두박질을 쳤다.
로마에서 노예의 신분은 '말하는 도구'로서 주인의 자산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인간적인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노예는 노동의 동기가 낮으므로 자유민에 비해 생산성이 낮을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다. 노예는 보통의 자유민보다 동기가 더 높았고, 주인에 대한 충성도도 더 높았다. 그들에게는 열심히 일한다면 자유민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의 노예는 현대의 AI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업무 능력과 함께 낮은 비용이라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 일반 로마 시민들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노예와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로마시는 극소수의 부유한 귀족과 거대 상인, 소수의 자영업자 및 관리 그리고 압도적 다수의 빈민들로 구분되게 되었다. 당시 로마시의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는데, 노예가 40% 정도였다고 한다. 나머지 60만 명 중 20만 명이 빈민으로서 빵 배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빵 배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로마 시민(남자)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딸린 식구를 감안한다면 자유민 거의가 빈민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은 로마 도시 빈민들의 정치 성향이다. 이들은 거의가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극우적 성향을 띠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노예제도'라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은 노예들을 증오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우월감과 함께 심한 외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 제노사이드 (genoside) 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현대 미국의 러스트 벨트 (Rust Belt) 나 우리나라의 극우 태극기 부대 등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AI 혁명이 러다이트 운동이나 인터넷 혁명의 뒤를 밟을지, 아니면 로마제국 노예 시스템의 예를 따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전자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이재형: 고려대 경제학 박사. 전 통계청 통계개발원장
[원문 출처] Facebook
비슷한 관점의 강의 15:26부터
분명한 것은 미래의 고용 시장이 일자리의 절대적 부족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고용 시장에 대응하고 적응해야 해서 매우 불안정할 것이고 사람들은 금전적, 심리적 문제에 반복해서 시달려야 할것이다. 3년간의 높은 실업률이 히틀러에게 권력을 주었다면, 끝없는 고용시장의 혼란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줄까?
유발 하라리 著 「넥서스 (Nexus)」
"9장 민주주의: 우리는 계속 대화할 수 있을까?"의 '민주주의의 속도' 중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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