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내용 요약
서론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The New Human Agenda)
- "기아, 역병, 전쟁"은 20세기까지 인류가 매일 직면해야 했던 핵심 문제였다.
- 기근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5~10%가 사라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692~1694년 프랑스에서는 흉년으로 인해 인구의 15%(280만명)가 굶어죽었다. 이어서 1695년 에스토니아에서는 20%가, 1696년 핀란드에서는 25~33%가, 1695~1698년 스코틀랜드의 몇 지역에서는 20%가 기근으로 사망했다.
- 지금도 일부 지역에 이따금 대기근이 닥치지만 이례적이다. 이제 세계에 자연적 기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 기근만 존재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다. 2014년 21억명 이상이 과체중이었으나, 영양실조는 8억 5천만명이었다.
- 역병은 두번째의 적이었다. 도시는 문명의 산실인 동시에 병원균의 이상적인 번식처였다. 가장 유명한 '흑사병'의 경우, 1330년대 아시아 어딘가에서 시작되었는데 20년도 되지 않아 대서양 해변까지 퍼졌고 유라시아 전체 인구의 1/4 (7500만~2억)이 사망했다. 잉글랜드에서는 370만명의 인구가 220만명으로 줄었고 피렌체는 10만명 시민중 5만명을 잃었다.
- 신대륙으로 진출한 유럽인을 통해 퍼진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는 현지인의 무려 90%가 죽었다. 1520년 3월 2200만명이 살던 멕시코에 스페인 소함대로 인해 퍼진 천연두는 12월까지 800만명을 죽게했고, 각종 다양한 전염병으로 인해 1580년에는 인구가 200만명 이하로 줄었다.
-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가져온 독감, 결핵, 매독를 시작으로 75년간에 걸쳐 인구는 50만명에서 7만명으로 감소했다.
- 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년 연합군 사이에서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5천만명~1억명을 죽게 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4년간 사망한 사람은 4천만명이었다.
- 20세기 후반에 의학은 예방접종, 항생제, 위생등을 통해 역병을 현저하게 극복했다. 20세기초까지 1/3에 달하던 유아 사망율은 5%이하로 선진국에서는 1% 이하로 줄었다. 1979년 천연두는 완전히 박멸되었다. 여전히 에이즈나 말라리아 등이 위협으로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암을 비롯한 비감염성 질환이나 단순한 노환으로 죽는다.
- 전쟁도 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쟁은 드문 일이 되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15%에 달했던 폭력으로 인한 사망은 20세기에 5%, 21세기에 1%로 줄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 기업, 개인들이 미래를 생각할 때 전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물질적 기반 경제에서 지식 기반 경제로 변한것이 전쟁의 동기부여를 없앴다. 과거에 평화란 '일시적 전쟁부재 상태'였으나 지금은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여긴다. 여전히 평화롭지 않은 지역이 있으나 예외에 해당한다.
- 테러도 예외에 속한다. 테러는 실질적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나약한 전략이다. 테러는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고 과잉반응을 유도하는 show가 본질이다. 마치 스스로 도자기를 부술 힘이 없는 파리가 황소를 도발해 대신 도자기 가게로 돌진하게 하는것과 비슷하다.
- 기아, 역병, 전쟁"은 여전히 많은 희생자를 낼 것이지만, 이해도 통제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비극이 아닌, 우리의 능력으로 관리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난제가 되었다.
- 역사는 공백이 없다. 인간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 인간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은 만족이 아닌 더 갈구하는 것이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전례없는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것이다.
- 인간은 불멸에 진지하게 도전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생명권)은 이 시대의 지고한 가치이다. 죽음이 이 권리에 명백히 반하므로 죽음과 전면전을 치러야 마땅하다.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이념은 초월적인 존재를 신성시 했지 생명 그 자체를 신성시하지 않았고, 죽음에 꽤 관대했다.
- 현대의 과학과 문화는 죽음을 형이상학적 신비나 인생의 의미가 아닌 해결해야할 기술적 문제로 본다. 과학자, 의사, 학자들의 대부분은 불멸에 대한 노골적인 꿈과 거리를 두고, 자신들은 그저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 Google 자회사인 Calico는 '죽음 해결하기'를 위해 설립되었다. 그들은 2050년에 몸이 건강하고 충분한 은행 잔고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단순한 질병 치료가 아닌 노화 조직을 재생하고 손, 눈, 뇌의 성능을 높이는 것으로 불멸을 시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PayPal 창업자 Peter Thiel은 영원히 사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고백했다.
- 불멸이 아니더라도 기대수명을 2배로 늘리는 것만으로도 인간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다. 수명이 150년이 된다면 40세에 결혼해도 결혼생활이 110년이다. 90세에도 자기계발을 해야할 것이다. 65세에 은퇴하지도, 신세대에 자리를 비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90년 더 통치할 푸틴, 그리고 여전히 소련과 중국을 통치하고 있을 137세의 스탈린, 123세의 마오쩌둥을 상상해보라.
- 사실상 현대 의학은 자연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주어진 생을 온전히 누릴수 있는 업적을 이루었을 뿐이다. 불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생명이 신성하다는 믿음과, 과학계의 역학과,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가 결합하여 인류는 분명 죽음과의 전쟁에 달려들 것이다.
- 우리의 예술적 창의성,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앙심은 상당 부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료를 얻는다.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에 대한 욕구는 예술, 이념, 종교를 거부하고 돌진할 것이다.
- 인류에게 있어 최고선은 생명 자체가 아닌 행복이다. 내세를 의심할 때 인류는 불멸이 아닌 세속의 행복을 좇게 된다. 고대에 거부당했던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오늘날 모두가 동의하는 기본전제가 되었다.
- 현대 사상가들은 행복추구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집단적 과제로 선언했다. 하지만 19~20세기에 국가가 생각하는 성공의 척도는 국민의 행복이 아닌 영토의 크기, 인구 증가, GDP 증대였다. 교육제도, 보건제도, 복지제도의 목표는 개인의 행복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전쟁을 수행하고 경제를 일으키고 세금을 내며 국가에 충성할 유능하고 건강한 구성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보장한 것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아닌 '추구할'권리였다.
- 지난 몇십년간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행복할 권리로 바뀌었다. 우리를 불만족하게 만드는 것은 기본권 침해이니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성공의 척도였던 GDP (Gross Domestic Product)를 GDH (Gross Domestic Happiness)로 보완 대체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 물질적 성취만으로는 만족이 오래가지 않는다. 돈, 명예,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면 비참해질 뿐이다. 높은 수준의 부, 안락, 안전을 누리는 선진국 자살률이 가난과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보다 높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GDP가 6배 늘고 실질 소득이 2배 커진 미국인의 주관적 행복은 여전히 같은 수준에 머물고, 실질 소득이 5배 늘은 일본인은 1950년과 같거나 불만족했다.
- 행복의 유리천장은 심리적인 기둥과 생물학적 기둥에 의해 떠받쳐진다.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기대치에 달려 있고, 조건이 나아질수록 기대는 부푼다. 생물학적으로 볼때 기대와 행복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아닌 우리의 생화학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감각이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유쾌한 감각이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유쾌한 감각이 순식간에 불쾌한 감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기분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즘은 얼마 못 가고, 그런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더 많은 음식과 연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기대는 상승하고, 어제의 도전은 오늘의 일상이 된다. 어쩌면 행복은 흥분과 평안의 황금 배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스트레스와 따분함 사이에서 불만스럽게 살아간다.
- 과학은 행복이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에 달려있다고 설명하고 그 기제를 조작했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50년전 꺼려했던 정신과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늘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 350만명의 어린이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치료약을 복용했다. 영국에서도 복용자가 15년간 8.5배 증가했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도 성적을 올리고 부모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복용한다. 이라크 주둔 미군 12%,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17%가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생화학적 행복 추구는 세계 최대 범죄 원인이기도 하다. 2009년 미국 연방 교도소 수감자의 반은 약물 관련자였고, 이탈리아에서는 38%가 마약 관련 범죄자, 영국에서는 55%가 마약 복용이나 관련 범죄자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62%는 범행 당시 마약을 복용한 상태였다.
- 에피쿠로스는 무절제한 쾌락추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부처는 쾌감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생화학적 해법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수도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뭐라든 자본주의에게 행복은 곧 쾌락이다. 매년 더 나은 진통제,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 더 편한 매트리스, 덜 지루한 게임을 계속 생산한다. 그럼에도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므로 쾌락을 영원히 지속하도록 몸과 마음을 재설계하려고 할 것이다.
- 수천년간에 걸친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격변 속에서 단 하나의 상수가 있었는데 바로 인류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인류의 세번째 큰 과제는 신성(divinity) 획득이 될것이다. 불멸과 행복이 신의 특성이라서가 아니라, 노화와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물학적 기질을 신처럼 제어하고 성능을 upgrade해 신이 되려고 할것이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체 합성이 그 방법이다. 여기서 신은 성경의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그리스 신화나 힌두교의 특정한 초능력을 가진 천신을 말한다.
- 유전자 조작 아기나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은 아직 멀었다고 말하지만,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해보다 훨씬 빠른 속도라서 '아직 멀었다'는 말은 20~50년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빠르게 돌진하고 있고, 죽음 뒤에 숨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때 흔한 반응은 누군가 브레이크를 밟아줄거라는 바램이다.
- 그러나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다. 먼저 브레이크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가들도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뿐 흩어져 있는 모든 점을 연결해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둘째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게되면 경제와 사회가 무너질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는 무한성장이 필요하고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향상(upgrade)인지 명확한 선은 없다. 혈압 치료제였던 비아그라나 부상자들의 얼굴상처 치료였던 성형수술과 같이 유전공학도 시작은 치명적인 유전병 치료부터일 것이다. 선택과 대체 다음은 수선이다. 치명적이지 않은 자폐증, 둔함, 비만, 우울증으로 확대될 것이고 그 다음은 강한 면역체계, 평균보다 높은 기억력, 더 밝은 기질, 천재적인 예술가나 운동선수등으로 확산되어 결국 우리는 한발짝씩 유전자 아기 catalog를 집어드는 길로 들어설것이다. 모든 upgrade가 처음에는 치료를 이유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날 리 없다. 획기적인 기술이 일단 생기면 치료에만 한정하고 upgrade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나치의 우생학 운동이나 장기매매등과 같이 맞춤 아기도 제한될 수도 있다.
- 명확히 해두고 싶은 것은 첫째, 이런 것들이 개인이 아닌 인류가 집단으로 벌일 일이며 명백히 불공정한 것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래 왔다. 둘째, 이것은 역사에 대한 예측이지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셋째, 추구하는 것과 획득하는 것은 다르다. 시도를 할거라고 예측하지만 성공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넷째, 이 예측은 예언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선택들에 대한 논의의 한 방식이다. 인간의 발전 과정은 우리의 예측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 역시 용도폐기 된다.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을 인지시킴으로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역사는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는 않으나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이 책의 예측들은 현재의 딜레마에 대한 논의이며 미래를 바꿔보자는 제안이다.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 인류세 (人類世, The Anthropocene)
- 다른 동물들과 관련해서 인간은 오래전 신이 되었으나 그다지 공정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은 신이라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기 싫어한다. TV, 책, 판타지에는 야생의 동물들은 가득한데 현실에서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동물은 주로 인간과 가축들뿐이다. 지구상의 야생 늑대는 약 20만마리인데 개는 4억마리가 넘는다. 사자는 4만마리인데 집고양이는 6억 마리, 아프리카 물소는 90만마리인데 가축인 소는 15억 마리, 펭귄은 5천만 마리인데 닭은 200억 마리이다.
- 향후 100년안에 우리가 미칠 영향은 6500만년전 공룡을 없앤 소행성의 영향을 능가할 것이다. 사피엔스는 지구를 독립적인 생태구역으로 나누던 장벽을 깨뜨려 최초로 단일한 생태적 단위를 만들었다. 인간이 전 세계 동물을 거리나 지리와 무관하게 섞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형 동물 90%, 아메리카 대형 포유류의 75%, 지구 전체 대형 육상 포유류의 50%를 멸종시켰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몰랐을 뿐이다.
- 농업혁명은 새로운 형태의 생물인 가축을 탄생시켰다. 가축들은 개체로는 좁은 우리, 뿔과 꼬리 제거, 새끼와의 결별 등의 엄청난 고통을 겪지만, 충분한 먹이와 예방접종과 재해로부터의 보호, 인공수정을 통해 종(種)으로는 계속 번식하고 있다.
- "알고리즘(algorithm)"은 오늘날 세계에서 단연코 중요한 개념이다. 알고리즘은 계산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론적 단계들이다. 지난 몇십년간 생물학자들은 사람 역시 알고리즘이라는 확고한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을 제어하는 알고리즘은 감각, 감정, 욕망이다. 같은 알고리즘이 다른 동물들도 제어한다. 몸이 계산을 하고 그 계산 결과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포함한 결정의 99%는 감각, 감정, 욕망이라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듯 보이는 감정 하나가 어미와 새끼간의 유대감인데, 육류업계와 낙농업계는 이 근본적 유대를 끊으면서 출발한다. 농부들은 유신론적 종교의 미명하에 이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유신론적 종교들은 위대한 신뿐 아니라 인간도 신성시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창조물 위에 군림할 권한을 창조주가 인간에게 부여했고 인간에게만 불멸의 영혼을 주었다고 했다. 신들은 인간과 생태계를 중재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이 흔했던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 가축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 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 이념은 호모 사피엔스가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고 우주의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현대의 농장주들은 유행병, 병원균, 항생제의 비밀을 해독한 과학기술 덕에 더 극단적인 공장식 환경에서 가축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3. 인간의 광휘 (The Human Spark)
- 호모 사피엔스가 가장 강한 종(種)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종보다 높은 도적적 지위와 생명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면 더 강한 나라 국민의 생명은 더 가치있는가?
- 전통적인 일신교의 대답은 사피엔스만이 불멸의 영혼을 가진다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이 믿음은 여전히 우리의 법, 정치, 경제 제도의 중심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실험은 동물들에게서 영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뿐 아니라 사피엔스에게서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의심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과학적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진화의 기본 원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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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15%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신의 개입 없는 순수한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46%가 성경에 적힌 그대로 1만년 내의 어느 시점에 지금 형태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석박사의 29%만이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탄생을 믿는다.
- 다윈은 우리에게서 영혼을 박탈했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것이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나눌수(divide)없다는 것이다. 따로 떨어진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물학적 실체들은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작은 부분들로 이뤄졌다. 분리되거나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자연선택을 통해 생겨날 수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실체는 단계적 진화를 통해 생길 수 없으므로, 진화론은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란 부분만은 진화되지 않고 완전체로 출현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영혼의 '영'자도 없는 부모에게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아기가 탄생하는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가 지닌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은 유전자이고, 유전자 분자는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돌연변이의 운반체이다.
- 인간의 우월성의 또 다른 근거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지닌다는 것이다. 마음은 감각과 욕망에 따른 고통, 쾌락, 분노, 사랑같은 주관적 경험의 흐름이다. 솔직히 마음과 의식에 관해 과학이 아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800억개가 넘는 뇌의 뉴런들의 전기화학적 반응을 통해 의식이 생기고, 마음의 경험들은 어떤 필수적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과 전류가 어떻게 고통, 분노, 사랑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문제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시킬 뿐이다. 주관적 체험을 통해 일어나는 뉴런의 반응 과정을 파악할수록 역설적이게도 의식적 느낌을 설명하기 여러워진다. 뇌를 이해할수록 마음이 불필요해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큰 빈틈이다.
- 뇌과학자들은 뉴런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작업공간'에서 의식의 융합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은유일뿐 어디에 있는지 왜 그런것이 필요한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주관적 경험을 포함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할까? 우리가 알기로는 없다. 우리가 창조한 데이터 처리 장치 가운데 어떤 것도 작동을 위해 주관적 경험이 필요하지 않고 고통, 쾌락, 분노,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의식은 뇌의 특정한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생물학적으로는 쓸모없는 부산물이라는 가설도 있다.
- 우리는 악순환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신이 뭔가를 의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인간 의식의 특징을 찾을 수 있고, 그런 다음 그 특징들을 이용해 인간에게 실제로 의식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인공지능이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도 될까? 다른 사람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그저 추정할 뿐 확신할 수 없다. 과학적 정설에 따르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활동의 결과이고, 따라서 실제 세계와 구별이 불가능한 완전한 가상세계를 위조하는 것이 이론상으로 가능하다.
- 다른 동물들이 마음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로 돌아가서, 2012년 신경생물학자들의 케임브리지 선언에 의하면,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의도적인 행동을 보이는 능력과 함께, 의식적 상태를 구성하는 신경해부학적, 신경화학적, 신경생리학적 기질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만이 의식을 생성하는 신경기질을 지닌 유일한 생물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 인간의 우월성의 또 다른 방어는 동물들이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인간과 달리 자의식 (sense of identity)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동물들이 보이는 복잡한 행동 양식, 역으로 인간들이 보이는 무의식적 알고리즘에 가까운 행동들로 상호 반론들이 있다.
- 대부분의 연구들은 인류가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된 과정에서 도구 제작과 지능이 중요한 자질이었다고 본다. 개개인의 지능과 도구 제작 능력은 종의 힘과의 직접적 관련성을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경이로운 위업들이 대규모 협력의 결과라면, 이것이 과연 인간 개개인을 숭배할 이유가 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추가로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하는 것이라서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하게 된다. 돈, 법, 신, 나라, 가치관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봄으로,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십자군을 비롯한 중세 가톨릭 교회가 가졌던 가치관, 그들과 싸웠던 이슬람의 가치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냉전과 같이 민주주의나 인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100년 뒤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 (The Storytellers)
- 사피엔스들은 돈, 신, 국가, 기업에 관한 이야기를 초함해 3중 현실 속에 살아간다. 약 1만 2천년전 시작된 농업혁명은 상호주관적 연결에 필수적인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약 6천년전 생겨난 수메르의 도시에서 마치 오늘날 허구적 법적실체(법인)과 같이 신들이 논밭과 노예를 소유하고, 돈을 빌려주고받고, 봉급을 지급하고, 댐과 운하를 건설했다. 실은 신들이 아닌 사원의 성직자들이 관리한 것이었다. 이 사업들이 확장의 한계에 이르렀으나, 약 5천년전 문자와 돈이 발명되면서 그 장애가 사라졌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를 신의 대리인이 아닌 실제 신으로 여겼다. 실제의 파라오는 생물학적 몸, 필요, 욕망, 감정을 가졌었지만 실질적 통치자는 수백만 이집트인이 공유한 이야기들 속에 존재한 상상의 파라오였다. 수메르의 신들이 기업 상표와 같았다면 파라오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저스틴 비버등의 개인 상표와 같았다. 문자는 알고리즘을 짜듯 사회 전체를 조직할 수 있게 했다. 알고리즘의 이상에 따르면 당신의 운명은 시스템에 달려있지 누군가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 문자로만 기록된 허구적 실재로 인해 발생한 불행한 사건들이 역사 속에 넘치지만 일반적으로 효율적인 행정으로 인한 이점이 손해보다 많았다. 문자언어는 실제를 기술하기 적당한 방법으로 생겨났지만 서서히 실제를 고쳐쓰는 강력한 방식이 되었다. 공식 보고서가 객관적 실제와 충돌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은 대개 객관적 실체였다.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져,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해당 국가의 바람과 갈등을 반영하지 못하고, 와본 적도 없는 유럽 관료들에 의해 그어진 아프리카의 국경선들이 한 예이다. 산업시대에 공장과 정부 부처가 숫자언어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지고, 교육기관이 그 뒤를 따라 평점이라는 발명품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함으로 학생과 교사의 삶은 바뀌었다.
- 허구가 협력의 목표를 결정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허구는 우리의 협력을 돕는다. 파라오가 통치하는 이집트는 당대 최강의 왕국이었으나 평범한 농부에게 그 힘은 병원과 사회보장이 아닌 세금과 강제노동을 의미했을 뿐이다. 인간 network의 역사를 검토할때 이따금 실제하는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는 것이 좋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뿐 목표나 잣대가 되서는 안된다.
5. 뜻밖의 한 쌍 (The Odd Couple)
- 과학과 종교는 500년간 부부상담을 받고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남편과 아내 같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미신, 영성, 초자연적 힘 또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알고 있지만, 종교는 인간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추종자들은 싫어하겠지만 자유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근대 이념의 믿음체계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 종교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이다. 종교가 계약인 반면 영성은 여행이다. 종교가 세속적 질서를 굳건히 하려는 시도인 반면 영성은 그런 질서에서 도망치려는 시도이다. 영성은 종교에게 위협이다. 영적 여행이 사회 전체가 아닌 개인에게 적합한 외로운 길이기 때문에 역사적 관점에서 언제나 비극이다.
- 과학자들이 진행하는 모든 실용적 과제는 종교적 통찰에 기대고 있다. 모든 종교 이야기들은 거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같은 윤리적 판단 (2) '인간의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 시작한다'같은 사실적 진술(factual statements) (3) '수태되고 단 하루가 지났어도 절대 낙태해서는 안된다'같은 윤리적판단+사실적 진술에서 얻은 실질적 지침. 과학은 사실만을 다루므로 종교의 윤리적 판단을 반박하거나 확증할 수 없지만, 종교는 윤리적 판단만 다루지 않고 사실적 진술도 하므로, 치열한 종교적 논쟁 그리고 과학과 종교간의 갈등의 다수는 윤리적 판단이 아닌 사실적 주장과 관련한 것들이다.
- 윤리적 판단과 사실적 진술을 분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라는 윤리적 판단을 한 겹 벗기면 '모든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다'는 사실적 진술이 나타난다. 따라서 과학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해결은 무척 어려운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나 척도를 갖고있지 않다.
- 종교적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과학사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세속주의와 관용이라는 가치와 연관시키지만, 과학혁명은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관용되는 카이로나 이스탄불이 아닌, 역사상 가장 교조적이고 불관용적이고 종교적 광신도들로 가득차고, 관용의 수준이 가장 낮은 런던과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 근대사는 인본주의라는 특정 종교와 과학간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근대의 계약 (The Modern Covenant)
- 근대는 놀랄만큼 간단한 계약이다.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 근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문화는 인간이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계획 안에서 한 역할을 맡는다고 믿었다. 이 계획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인간의 힘을 제약했다. 근대 이후 문화는 그런 우주적 계획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역할도 의미도 없다. 우리가 아는 과학 지식에 따르면 우주는 계획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 아무 의미없는 소음과 광기로 가득할 뿐이다. 어떤 결말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어떤 일들이 차례로 일어날 뿐이다. 목적을 믿지 않고 오직 원인만을 믿는다.
- 근대라는 계약은 인간에게 굉장한 유혹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위협이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전능함을 거머쥘 수 있지만, 발 밑에는 완전한 무(無)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력적이고, 쉼 없이 조사하고, 발명하고, 발견하고, 성장하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의 어떤 문화보다 큰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린다.
- 근대의 동력은 과학의 진보와 경제 성장의 동맹이다. 전근대의 자연 시스템은 평형상태이고 고정된 파이(pie)를 재분배하는 것이라서 한 쪽이 성공하면 다른 쪽이 손해보는 zero-sum 게임이었다. 근대 이후 사회는 성장하는 경제에 기반한 win-win 상황을 믿는다. (1) 더 많이 생산하면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어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더 행복하게 산다 (2) 인류가 늘어나는 한 현재 수준 유지를 위해서도 성장이 필요하다 (3) 인구가 늘지 않고 중산층이 현재 수준에 만족해도 가난에 찌든 수억명을 위해서 성장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의 '더 많이'라는 교의는 거의 모든 종교, 이념, 시민운동이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각자 매우 다른 가치와 목표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나 모두 경제성장이 목표실현의 열쇠라고 믿는다. 경제성장이 세계 모든 곳에서 거의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다는 증거이다.
- 경제성장을 위해 가족 간의 유대를 포기하고, 부모와 떨어져 살고, 지구 반대편에서 간병인을 수입해와도 어쩔수 없다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확고히 대답한다. 이 대답은 사실적 진술(factual statement)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을 포함한다. 경제성장이 가족의 유대보다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윤리적 판단을 내리면서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과학의 땅에서 종교의 땅으로 건너왔다. 저 세상의 파이를 약속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자본주의교(敎)는 지상의 기적을 약속한다.
- 체스 같은 전근대 게임은 정체된 경제를 기본 전제로 했는데, 현대의 보드게임, 컴퓨터 게임은 대부분 투자와 성장에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것이 마인 크래프트, 카탄의 개척자, 시드 마이어의 문명과 같은 문명건설 전략게임인데 소박한 초기 자산, 초기 소득 제공, 현명한 재투자의 순환에 대한 것이다.
- '더 많이' 경제 성장은 계속 새로운 재료와 에너지원을 발견할 수 있어 가능했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되는 자원인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으로 새로운 형태의 자원을 발굴해왔다. 속도가 계속 빨라지므로 실수를 해도 되는 여지는 계속 줄어든다. 현시점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생태계 붕괴라는 인과응보일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인류는 그 재앙을 멈추는데 필요한 진지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희생을 할 의향이 없다.
- 역사에 정의는 없다. 재난 상황이 되면 그 비극이 부자때문에 초래된 것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고통을 당한다. 최상위 계층들은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최첨단 '노아의 방주'를 통해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상황을 계속 가속화함으로 인류와 지구 생태계 전체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현재의 경제성장을 둔화시켜 미래의 위협을 줄이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집세도 못 내는 사람들에게는 녹아내리는 만년설보다 자신의 마이너스 통장이 훨씬 더 큰 걱정거리이다.
- 경제 붕괴와 생태계 붕괴를 다 막아해도 계속해서 더 많이 일하고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은 개개인에게 큰 스트레스와 긴장을 일으킨다. 근대는 평형 상태가 혼돈보다 더 무서우며, 탐욕은 성장의 원동력이요 선한 힘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었다. 모든 정부, 기업, 조직들이 성장의 관점에서 성공을 평가하고, 소득과 삶의 척도를 높여야 한다고 개인들을 세뇌한다. 인간은 탐욕에 쉽게 물들고 어제의 사치는 오늘의 필수품이 된다. 어디로 질주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탐욕과 혼돈의 시스템을 신성화했다.
-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성공했고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했다. 근대 계약이 약속한 전례 없는 힘은 지금까지 지켜졌다. 그 계약은 우리가 힘을 얻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기를 기대한다. 이 계약대로라면 우리는 윤리, 미학, 동정이 없는 암흑 세계에 살고 있어야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대사회에 인류를 암흑세계로부터 구원한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닌 인본주의 였다.
7. 인본주의 혁명 (The Humanist Revolution)
- 힘을 위해 의미를 버린 무의미하고 무법적인 존재에게 해독제를 제공한 것은 인본주의였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자신에게 충실해라, 자신을 믿어라,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라,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을 해라." 현대의 심리치료사는 자신의 견해를 환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고, 환자가 자기 마음 속의 가장 내밀한 방을 살펴 답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 인본주의 윤리에서는 외도처럼 인간의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이 가장 흥미로운 논의이다. 역으로 어떤 행동이던 어느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
-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개개인의 자유선택에서 정치권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개인의 선택은 내면의 감정을 참조해 그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의 모토는 윤리학에서 '좋게 느낀다면 해라', 정치학에서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 자유시장에서 고객은 항상 옳다. 유전자 조작때문에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와 닭이라도 모든 것은 고객이 얼마를 지불할 의향이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 제품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당신이 뭔데 그들에게 틀렸다고 말하겠는가?
- 교육제도 역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중세에는 순종, 주입, 암기, 전통에 촛점이 맞춰졌으나 현대는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가르친다. 중세 유럽에서 지식=성경x논리 였고, 과학혁명은 지식=경험적데이터x수학 이다. 그 새로운 공식은 여러 학문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이끌어낸 반면 큰 결점이 있는데 가치와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실질절 문제에는 수학적 분석을, 윤리적 문제에는 성경을 사용했다. 그런데 인본주의가 지식=경험x감수성 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제시했다.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현상이고, 감수성은 그런 주관적 현상에 주목하고 나에 대한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점진적 내적 변화 과정으로 본다. 역사상 인간의 감정, 욕망, 경험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긴 문화는 없었다.
- 전근대 내러티브의 대부분은 외적 사건과 행동에 초점을 맞춘 영웅적 행위였다. 영웅들의 의미 있는 내적 변화 과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반면 현대의 소설, 영화, 시는 느낌과 내적 경험에 관한 것이다. 신, 황제, 장군이 주인공이었던 전쟁소설이 신병이나 일반병사의 감정을 주제로 한 전쟁영화로 바뀌었다.
- 인본주의는 3갈래로 나뉜다. (1) 정통파는 '자유 인본주의'로 독자적인 내적 목소리와 유일무이한 개인이 인간이며, 개인의 최대 자유가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인 간의 서로 상충하는 욕망의 충돌에 대해 자유주의는 답을 주지 못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절망과 이들을 받아들이는 독일인들의 불안, 투표결과를 승복하지 못하는 유권자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등이 그 예다. (2)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내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내 행동이 타인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을 두기를 요구한다. 개인의 자아탐구는 팔자 좋은 부르주아의 악덕이고 자아탐구를 시도하면 자본주의의 이런저런 덫에 걸려든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아탐구를 대신할 정당과 노조와 같은 공동기구를 주장한다. (3)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해 갈등은 자연선택의 원재료로 진화를 추동하는 좋은 것이다. 인류가 동물보다 우월하여 착취할 권한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월한 인간은 열등한 인간을 억압할 권리가 있다. 그들의 더 뛰어난 능력이 새로운 지식, 더 진보한 기술, 더 번영한 사회, 더 아름다운 예술로 나타나며 전쟁은 약자를 절멸시키고 강하고 야심찬 자에게 보상을 내리므로 가치있고 필수적이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히틀러와 나치같은 극단적 형태를 보이기도 했으나 근대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21세기에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 1914~1989년은 인본주의 세 분파 간의 종교전쟁이었다. 나치즘을 무찌른 공은 공산주의에게 돌아가야 한다. 붕괴한 유럽제국들은 대개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군사독재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1970년까지 대세였다. 사회주의의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자유민주주의의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보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했는데 이 불균형에서 NATO를 지켜준 것은 핵무기를 앞세운 상호확실파괴 전략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슈퍼마켓이 노동수용소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는 영리하고 겸손하게 사회주의와 파시스트에서 사상과 제도를 채택해 대중에게 교육, 건강, 복지를 약속했다.
-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건강보험, 국민연금, 자유로운 학교를 가치있게 여긴다면 100년전 산업사회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통찰력과 해법에 감사해야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신기술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개념을 확산해 정치구조, 사회적위계, gender관계까지도 바꿨으며 힘의 피라미드를 뒤집고 혁명가들에게 탄약을 제공했다. 이런 사회적, 윤리적 개혁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행정 시스템, 문서보관, 일정표, 데이터 처리기법, 선진농법, 경영, 시계, 대학설립등 경제적, 기술적 진보및 창조를 도맡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와 유신론 종교들은 교회를 추월한 20세기의 발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맞서야할지만을 고민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권위의 원천으로 계속 성경을 이용하므로 진보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창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자신들의 윤리적 태도를 지지할 수 있는 금언, 비유, 결정을 찾아내는게 주력하고 이런 생각이 마치 성경에서 유래한 것처럼 말한다.
- 자유주의가 이긴 것도 맞고 현재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공 그 자체에 파멸의 불씨가 들어었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자유주의 과제들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세계관에 내재된 결함과 고객,유권자의 무분별함을 은연중에 폭로할 것이다.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8. 실험실의 시한폭탄 (The Time Bomb in the Laboratory)
- 오늘날 세계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가 지배한다. 개인의 자유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닌 사실적 진술(factual statement)인데, 생명과학의 최신 연구결과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이 모순은 불편해서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중요한 문제이다.
-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 속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고 그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 뿐임을 알아냈다. 결정론과 무작위성이 케이크를 모두 나눠갖고 '자유'에는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이다.
- 사람들은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자유가 있다고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결정과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은 애초에 자신의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느냐이다. 순간적 느낌이건, 오랫동안의 진지한 추론과 합리적 숙고에 기초한 것이던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뇌영상은 사람의 욕망과 결정을 본인이 의식하기도 전에 예측할 수 있다. 뉴런 발화의 패턴을 연구해 리모콘으로 쥐를 조종하는 실험, 인간 뇌의 적소를 자극해 사랑, 분노, 두려움, 우울같은 감정을 일으키거나 없애는 실험, 경두개 자극 헬멧을 통해 차원이 다른 마치 영적인 경험같은 것을 만드는 실험등은 약물, 유전공학, 뇌자극을 통해 자유의지가 없는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대뇌반구의 연구에 의하면 좌뇌와 우뇌가 인간의 의사를 각각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결론내린다. 행동경제학자들의 결론 역시 의사 결정은 단일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내적 실체들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나온 것이었다. 사실적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은 하되 사실의 일부인 중요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의 평균에 의존해 결론을 내리는 '이야기하는 자아'간의 상충됨이 여러 실험을 통해 보고되었다.
- 머지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 도구, 구조의 홍수를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인권이 과연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9. 중대한 분리 (The Great Decoupling)
-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는 개인의 가치와 자유의지의 선택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3가지 상황이 이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것이다. (1) 인간은 경제적, 군사적 쓸모를 잃게 되어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것이다 (2)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가치는 여전히 발견할테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는 그렇지 않다 (3) 일부 upgrade된 새로운 일부 엘리트 집단에게서만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 자유주의가 지배적 이념이 된 것은 오류 없는 철학적 논증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가 단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이다. 권리에 위해 고취된 동기와 진취적 정신이 전쟁터나 공장에서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사적 경제적 가치를 잃을 것이다. 비의식적이면서 높은 지능, 경험을 뛰어 넘는 효율성, 예측 가능하고 실수하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자동화는 군인, 운전사, 은행원, 여행사, 증권사를 이미 위협하고 있고 변호사, 판사, 경찰, 의사, 약사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 산업혁명 이후로도 기계화가 대량실업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 능력인 육체 능력과 인지 능력중, 기계가 육체 능력을 대체하더라도 인간은 더 잘하는 인지 능력을 늘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뛰어넘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한 유기체는 유기적 알고리즘의 집합이다. 계산만 정확하다면 비유기적 알고리즘이 절대 하지 못하거나 더 뛰어난 일을 유기적 알고리즘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얼마전까지 비유기적 알고리즘이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던 얼굴 인식, 체스, 바둑등은 기계 학습을 통한 인공지능에 의해 정복되었고, 스포츠팀 선발, 트럭운전, 인력및 투자 관리, 심지어는 예술 창작도 대신하고 있다.
-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계급이 될 것 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고 사회의 번영, 힘, 영광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그래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쓸모없는 대중을 먹이고 부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에 몰입하고 만족할까? 약물과 컴퓨터 게임이나 3D 가상현실 세계에서 가짜 경험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들이 뭐가 신성한가?
- 자유주의가 직면한 두번째 위협은 시스템이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거라는 점이다. 시스템이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인간대신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것이고, 개인들에게서 권한과 자유를 박탈할 것이다. 자유주의의 믿음은 나만이 나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인데, 생명과학은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완벽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실수를 덜 하는 알고리즘이면 나에 대한 더 많은 결정과 선택을 맡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보다 우리를 위해 유익한 결정을 내려줄 것이고 그 조언을 따르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의학에 관한 한 우리는 이미 이 선을 넘었다. 유전자 분석에 따른 암, 심장마비, 알츠하이머의 예방, 이메일 검색을 통한 독감경보 발령등은 알고리즘에 의한 결정과 선택이다.
- 모든 과정은 단지 확률일 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알고리즘이 옳은 결정을 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권한을 넘겨줄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데이터베이스는 커질것이고, 통계는 더 정확해질 것이고, 알고리즘은 더 개선될 것이다. 그 시스템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만 하면 그날로 자유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아는 신탁이 되면, 그 다음에는 대리인으로 진화하고 마침내 주권자로 진화할 것이다. Google, Facebook, Waze, Cortana, Apple Siri, Amazon Kindle같은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동안 우리에 대한 자료를 계속 수집하고 있다. 맞춤 의학, 교육, 엔터테인먼트의 제공은 나를 분해하고 감시하고 해독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개인은 종교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 세번째 위협은 해독불가능한 소규모 특권집단이다. 자유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경험의 평등이 아닌 다른 경험에 대한 평등한 가치의 부여이다. 20세기 의학은 대중의 병 치료라는 평등적 목표였으나 21세기 의학은 건강의 upgrade 이며 이것은 일부 개인들에게 우위를 제공하려는 엘리트주의적 목표이다.
10. 의식의 바다 (The Ocean of Consciousness)
-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생할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이고,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 둘로 나뉠것이다.
- 기술 인본주의는 기술을 통해 창조되는 훨씬 우수한 인간모델 (호모 데우스)로 두번째 인지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새로운 영역에 접근하고 은하계의 주인이 될거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진화론적 인본주의가 1세기전 선택적 육종과 인종청소를 통해 창조하려했던 초인간의 꿈을 유전공학, 나노 기술, 뇌/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루려는 것이다.
-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upgrade해 새로운 경험과 의식상태에 접근하려는 것인데, 우리는 마음에 대해 잘 모른다. 게다가 지난 백년동안 심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연구한 대상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로 WEIRD(서구의 많이 배우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적인) 사회 구성원들에 국한되어왔다. 이 새로운 영토에 대한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몸과 뇌의 upgrade는 혹 성공한다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어 인간을 downgrade할 것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반면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의 생산 말이다. 확고한 결정과 빠른 해법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의심과 모순으로 가득한 인생보다 더 빈곤하고 얄팍할 것이다.
- 기술 진보는 우리의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마음이 없어 그 목소리를 통제하기 원한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목소리를 죽이고 어떤 목소리를 증폭할지 어떻게 결정할까?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를 재설계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의지를 모든 의미와 원천이라고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술 인본주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봉착하며, 더 과감한 기술종교는 인본주의의 탯줄을 아예 끊으려 한다. 그렇다면 욕망과 경험을 대신할 권위의 원천은 무엇이 될까? 단 하나의 후보는 바로 정보이다.
11. 데이터교 (The Data Religion)
-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지고 어떤 것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진화론에 기반해 유기체를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보는 생명과학과 점점 더 정교한 전자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컴퓨터 과학자들의 합류이다. 데이터교는 이 둘을 합치면서 똑같은 수학적 법칙들이 두 알고리즘에 적용된다고 지적하면서, 동물과 기계의 장벽을 허물 것으로 본다. 경제란 욕망과 능력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해 그것을 결정으로 전환하는 메카니즘이다. 그렇게 보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통제 공산주의는 경쟁관계의 이념, 윤리, 제도가 아닌 경쟁관계의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멀티 프로세서, 공산주의는 중앙 단일 프로세서이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기술변화의 가속 시대에 분산식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의 데이터 처리 조건이 다시 바뀌면 민주주의는 몰락하거나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 현재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비대한 정부관료 조직이 사이버 규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동안 인터넷은 열번쯤 이미 변신했을 것이다. 정부는 밀려드는 데이터로 뭘 해야할지 몰라, 계속해서 어설프게 일을 망치고 있다. 미국은 마치 포커 게임에서 상대가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번번이 지는 사람 같다. 전통적인 민주정치는 중요한 사건들을 제어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유의미한 비전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슬픈 진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데이터교도 시작은 가치중립적 과학이론이었으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화하고 있다. 지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우주의 어느 한 부분도 생명의 거대한 웹과 연결이 끊겨서는 안된다. 가장 큰 죄악은 데이터 흐름의 차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의 자유가 중요하한데, 오래된 자유주의와는 달리, 정보의 자유는 인간이 아닌 정보 자체에 주어진다. 이것은 정보의 자유가 가져오는 막대한 이점때문에 우리가 사생활을 단념할 때 가능한 것이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이것이 새로운 모토이다.
- 이미 점점 많은 예술과 과학창조물이 모든 사람의 협업으로 생산된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세계정치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종자'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이 알고리즘은 성장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따라 인간이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으로, 그리고 어떤 인간도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 데이터교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인본주의적이지도 않지만, 인간의 경험에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그 경험 자체에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데이터교는 인간의 경험을 데이터 패턴으로 여김으로 권위와 의미의 원천을 파괴하고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우리가 만물 인터넷을 만들려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고 강하게 해줄거라는 기대때문인데, 실제로 운용되면 우리는 엔지니어에서 칩으로, 그 다음에는 데이터로 전락하여 데이터 급류에 휩쓸려 흩어질 것이다.
- 데이터교의 교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긴급한 정치적, 경제적 과제이다. 생명을 데이터 처리와 의사결정 과정으로 이해할 때 놓치는 것은 없을까? 우주에는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의식적 지능이 그보다 우월한 비의식적 알고리즘으로 대체되면 혹시 잃는 것이 생기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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