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rine (교리)
[4년 전에 썼던 글인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각한 상황에서 대면 예배 강행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올려봅니다]
"썰"을 한번 풀어보려고 한다.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굼벵이, 메뚜기, 바퀴벌레, 좀 고급스럽게 먹으면 쥐 같은 것으로 연명하면서 살았다. 몹시 불결한 음식들이라서, 다들 병치레를 많이 했고 오래 살지도 못했다.
BC 2100년경 신께서 아브라함에게 소 한마리를 주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인데 다들 소고기를 풍족히 먹으면서 살거라고 하셨다. 그 후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신께서 주신 소를 먹고 살면서 다른 민족들보다 월등히 건강한 몸으로 장수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 살게되었다. 그런데, 삶이 편해지면서 다들 소의 관리를 점점 소홀히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소들이 차츰 병들어 죽게 되어 BC 400년경 급기야 소들이 완전히 멸종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후로도 수백년간 쇠가죽, 쇠뼈, 돌덩이 같이 말라버린 육포, 소 그림,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그린 그림 같은 것들을 신전에서나마 구경하면서, 어느 훗날 "메시야"라는 분이 오시면 자신들도 전설의 소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갈릴리 촌구석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길러 나눠주는 짐승의 고기가 전설의 소고기이며, 예수가 메시야라는 소문이 실제로 맛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오랜 세월동안 소의 전설을 팔아 먹으며 기득권을 장악했던 세력들은 위기감 속에 결탁하여 예수를 사회를 혼란시키는 사기꾼으로 몰아세워 죽여 버렸다.
그렇게 끝난 사건인줄 알았는데, 예수와 함께 소를 3년간 길렀던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 소를 기르고 소고기를 나눠줬다. 한번 맛보면 더이상 굼벵이, 메뚜기, 바퀴벌레, 쥐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대고 싶지 않을 정도의 환상적인 맛 때문에, 불법 식품임에도 불구하고 소고기는 암시장을 통해서 점점 퍼져나갔다. 단지 소고기를 먹은 것 때문에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고 사형을 당하면서도 소고기의 맛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백년이 흘러 소고기의 유통을 더이상 공공연한 비밀로 방치할 수 없게 되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소고기를 나라의 대표음식으로 공인하여, 그 유통을 양성화하게 된다. 워낙 오랫동안 암시장에서만 유통되어서 짝퉁이나 유사 소고기도 많았기에, 니케아라는 곳에서 회의를 열어 그간 내려온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고 의논해 "진짜 소"가 가지는 세가지 특징도 정리하게 했다.
이 후로 소고기는 전 유럽에 급격하게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소를 기르고 도축하고 판매하는 모든 것이 점점 체계화 되고 조직화 되었다. 조직화된 정육협회는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 하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소를 기르고 도축하는 과정을 숨기고 철저하게 비공개로 유지하면서 독점판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동방 정육협회와 서방 카톨릭 정육협회는 서로의 정통성을 놓고 다투다 갈라지기도 했다. 투명하지 못하게 관리되다 보니, 대다수의 소들은 다시 병들어 죽어 나갔고 개체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지만, 정육협회는 개의치 않고 병들어 죽은 소, 상한 고기, 다른 짐승 고기를 태연히 속이면서 팔아먹었다.
다행히도 정육협회와는 별도로 산에서 목장들을 운영하면서 영세한 규모로 소를 길러오던 수도원들이 있었기에 그 와중에도 소는 멸종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16세기 독일 수도사 중 한 사람인 마틴 루터라는 사람이 소를 기르고 도축하는 과정이 더 이상 비밀로 유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기록된 문서들을 번역하고 일반인에게 공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이라는 사람이 5가지 기본 향신료 (5 solas)만을 사용한 홍두깨살 요리를 설파했고, 이보다 조금 늦게 네덜란드에서는 알미니우스라는 사람이 갈비 요리를 전파했는데, 어느 요리가 진정한 소고기 맛의 진수인가의 논쟁은 그 이후로도 근 500여년간 계속되어 왔다.
서쪽으로 계속 전파되어온 소고기는 미국을 걸쳐 약 100여년전에 한국에 본격적으로 전파가 되었는데, 해방후 급격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삶이 윤택해지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를 기르는 것에는 더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전에는 안심, 등심, 갈비, 목살, 사태, 양지는 물론이고 꼬리, 족, 위, 곱창까지 가리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였는데, 지금은 입맛도 점점 까다로와져서 마블링이 엄청난 filet mignon정도가 아니면 입에도 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정육점들도 그 기호에 맞춘 제한된 공급을 경쟁적으로 하고 있고,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도 맛있으면 그만이라는 풍조도 점점 심해져 간다.
경전(scripture)이 소 한마리 전체라면, 교리(doctrine)는 대략적인 sketch, 신학은 recipe 정도될까?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경전 자체를 멀리하고 교리에 집착하는 것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들로 얼룩져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때 부터인지 율법서 토라대신, 장로들의 율법해석서 미슈나를 더 따르게 되었다. 기독교는 점점 많은 부분을 교리화하고, 교인들을 만들어진 교리의 틀 안에 가두는 노력에 점점 더 치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카톨릭이건, 성공회건, 개신교건 현대 교회가 열심히 추구하는 바는 사실상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이 아닌 교단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현실이다.
교리에 무게를 두는 것이 얼핏보면 좋게 보일 수 있다. 일관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학을 전공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점들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어떤 교리도 경전(scripture)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교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결국 경전에 칼질을 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요리를 완성하여 먹는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멀어지게 된다.
식재료로 요리를 할 때면 종종 모양을 잡아주는 도구들이 필요하다. 케익을 만들때면 스폰지빵을 굽는 틀이 필요하고, 새우를 구울때엔 꼬챙이가 유용하게 쓰인다.
이들의 공통점은 앞 단계에는 필수적이지만, 일단 모양이 잡힌 후에는 제거해야만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리가 마치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초기에는 기본적인 모양을 잡아주기 때문에 아주 좋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 시작한다. 경전을 읽는데 교리와 상반되는 것 같은 부분을 만난다면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이런때면 과감하게 교리의 틀을 내던진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먹음직스러운 그림의 떡에 만족할 뿐, 차려진 음식의 그 근사한 맛을 음미할 수도 그 음식을 통해 내 몸을 보양할 수도 없다.
한국교회는 "구원"이라는 한 단어에 참으로 오랫동안 집착해 왔다. 나는 그 틀을 이제는 제거해야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정부에서 대면 예배 중지 조치가 내려진 하에 종교 탄압, 자유 침해 등을 주장하며 강행을 하는 교회들이 이해하는 "예배"라는 단어는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 본다. 9월 9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손봉호 교수님의 인터뷰가 "예배"라는 것에 대한 좋은 고찰을 던져주어, 일부를 발췌해 본다.
“구약 성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무슨 뜻인가. 예배의 절차와 격식, 그런 외형적인 것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내 뜻을 접고 신의 뜻에 순종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거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청교도는 영국 정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배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던 이들이다.” 손 교수는 백스터가 만든 요리문답(주요 교리에 대한 문답서)에 전염병 발생 상황에 대한 대처 내용이 있다고 했다. “‘만약 전쟁이나 전염병 상황에서 국가가 예배를 금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 책에 담겨 있다. 청교도는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답이 놀랍다. 국가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고 돼 있다. 더 큰 유익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고 돼 있다. 정부의 간섭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들이 청교도였다. 그런 그들이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게 중요하다. 요즘 한국 상황과도 딱 맞지 않나. 예수님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역사 속의 기독교인은 내 생명보다 이웃의 생명을 더 중요시했다. 로마 시대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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