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생애 (7):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결국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을 만나 그간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했습니다. 바울의 보고를 들은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이 바울을 받아들일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시아에서 오순절때가 되어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발견하고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 폭행하기 시작 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던 바울은 보고를 받고 군사들과 출동한 로마군대 천부장에 의해 군중들에게서 간신히 구출되었습니다. 부대 안으로 호송되던 중에 바울은 천부장에게 발언을 허락 받아 유대인 군중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히브리어로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 중에 들은 이방인을 향한 사명에 대해 말하자 군중들은 소리를 지르며 맹렬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행 22:21~23)
히브리어를 몰라 군중들이 흥분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천부장이 바울에게 채찍질을 해 심문하려고 했으나,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자, 풀어주고 대신 제사장과 공회를 소집해 바울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행 22:29~30)
바울은 공회 앞에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부활의 소망때문에 심문을 받는 것이라고 외쳐 말했습니다. 그러자 서로 믿는 바가 전혀 다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간에 엄청난 논쟁과 다툼이 벌어졌고 그 다툼 속에 바울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천부장은 바울을 빼앗아 다시 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증거했듯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하니 담대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유대인 40여명은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바울을 유인하여 죽일 흉계를 꾸몄습니다. 다행히 상황을 알게 된 바울의 조카가 천부장에게 알려 주었고 천부장은 밤 9시에 470명의 군사를 동원해 가이사랴 항구에 있는 총독 벨릭스(Felix) 에게로 편지와 함께 바울을 호송해 보냈습니다.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진 뒤 5일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 장로들과 변호사를 대동하여 가이사랴로 와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양측의 이야기를 다 들어본 총독은 바울을 감금하지도 않았고 지인들의 방문을 포함해 많은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총독 벨릭스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둘째 부인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기 때문에 유대의 정세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는 아마도 부인 드루실라에게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간의 분쟁, 그리고 바울을 향한 산헤드린 공회의 분노와 고소 내용을 이미 자세히 들어 상황을 잘 알고, 바울의 결백함도 알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벨릭스가 바울을 풀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행 24:22)
벨릭스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보였으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게서 뇌물을 기대하며 자주 불러 이야기 하기를 퇴임할 때까지 2년이나 계속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행 24:24)
신임 총독 베스도(Festus)가 부임한지 3일 후 예루살렘에 방문하자 대제사장과 유대인 지도자들은 절호의 기회로 알고 매복해 죽이려고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유대인 지도자들로 가이사랴에 가서 재판을 열도록 했습니다. 이 재판에서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항소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아무 기약 없이 2년씩이나 가이사랴에 억류당해 시간을 허비한 바울로서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오랜 소망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낸 것으로 보입니다.
며칠 후에 신임 총독을 만나러 아그립바 2세 가 부인 버니게를 대동하여 가이사랴에 방문해 며칠을 보내었는데, 총독 베스도가 바울의 처분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에 아그립바 2세가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다고 했고,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지만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일을 간증 하게 됩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미쳤다고 말하며 복음을 거부했지만, 바울이 저지른 잘못이 없고, 만약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지 않았더라면 풀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행 26:31~32)
바울의 로마 호송이 결정되어 율리오(Julius)라는 근위대 백부장에게 맡겨졌습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내내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이 항해에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 그리고 에베소에서 군중들에게 잡혀 야외 극장으로 끌려갔던 마게도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가 동행 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해 시돈에서 친구들을 만난 후, 루기아의 무라에 도착해서 큰 배로 바꿔 탔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으로 인해 항해는 더디었고 그레데 섬의 미항(Fair Havens)에 도착했습니다. 대속죄절의 금식 기간이 끝나는 10월초부터 시작되는 겨울 우기의 지중해에는 흔히 폭풍이 발생해서 항해가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항해에서 화물뿐 아니라 목숨도 잃을수 있다고 경고하며 항해를 잠시 멈추자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과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겨울 나기에 적합한 뵈닉스(Phoenix) 항구까지는 가보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와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바울이 경고했던 대로,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 닥쳐 표류를 시작했습니다. 그레데 아래 가우다라는 작은 섬 남쪽까지 밀려갔을 때에야 간신히 배에 매달아 놓는 구명선을 잡아 끌어 올려 고정시킬 수 있었고, 바람으로 생기는 모래산에 걸려 좌초될 것을 염려해 돛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다녀야 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바다에 던졌고 사흘째가 된 후에는 배의 장비들조차 바다에 던졌습니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큰 폭풍이 여러날 동안 계속 되자 모든 사람들은 살아날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은 낙담한 사람들에게 전날 밤 천사가 나타나 자신은 로마 황제 앞에 서야하고, 배는 부서지겠지만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을 살리실 것이라고 들은 바를 알려주며, 어느 섬에 걸리게 될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호송되고 있던 죄수 바울이 큰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고 로마 군인들도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14일째 되는 밤에도 여전히 표류하던 중 선원들이 점점 줄어드는 수심을 확인한 후 배 뒷편에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배 앞편에도 닻을 내리는척 하면서 도망치려고 구명선을 띄우자, 바울이 이를 로마 군인들에게 알려서 구명선을 떠내려 보냈습니다.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14일간이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주렸으니 이제는 모두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배에 있는 276명이 모두 그의 말을 듣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천사가 배는 어차피 부서질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수송 화물인 밀도 바다에 버렸습니다. 날이 밝았을 때 경사진 모래사장이 있는 항만을 발견하여 조심스레 다가 갔지만 결국은 모래톱에 좌초되어 뱃머리는 움직이지 않고 뒤는 심한 파도에 깨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죄수들이 탈출할까 우려한 군인들이 죄수 모두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위대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살리려고 군인들을 제지하였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널판조각을 잡고 가기도 해서 무사히 상륙을 했습니다.
배가 도착했던 곳은 멜리데(지금의 Malta 공화국)이었습니다. 토착민들이 피운 모닥불에 나무를 집어 넣다가 그 속에 있던 독사에게 물렸음에도 바울은 죽지 않았고, 또 바울이 섬 지도자의 아버지의 열병을 기도로 낫게 하자 사람들이 바울을 신처럼 여겨 병든 사람들을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1월말 혹은 2월초 쯤, 3달 간의 겨울을 멜리데 섬에서 보낸 로마 군인들과 바울 일행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출발해서 시실리섬 동쪽의 수라구사(Syracuse)에서 3일을 보내고, 시실리섬과 마주하는 이탈리아 반도 끝의 레기온(Rhegium)에서 하루를 보낸 후, 남풍을 타고 다음날 나폴리 서쪽의 항구 보디올(Puteoli)에 도착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의 형제들과 일주일을 지낸 후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의 형제들은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70Km 떨어진 압비오(Appius) 광장까지 마중을 나왔고 바울은 그들을 통해 용기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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