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더호프 (Bruderhof)와 국가
사전 설명을 먼저 하자면,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세례(洗禮, 머리에 물을 바르는 것)와 비자발적인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오직 성인이 자의적 믿음의 고백으로 하는 침례 (浸禮,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 유효하다고 주장하던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으로 인해 재세례파 혹은 재침례파 (Anabaptist, Αναβαπτιστές)로 불렸으며 천주교와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요. 21세기까지 그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대표적인 종파들로 유럽본토에서 발생한 아미시,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그리고 영국에서 형성된 퀘이커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박해의 이유가 세례(침례)라는 종교의식에 관한 논란이었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그들이 추구했던 기독교적 공동체의 삶이 핵심인 것을 보게 됩니다.
아미시 (Amish)의 예를 들자면 30여만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거주하면서, 자동차나 전기·전자제품, 전화, 컴퓨터 등 현대문명 거부로 유명하며, 종교적 이유로 스스로 외부세계와 격리한 채 생활하고, 군대에 가지 않고, 공적연금을 수령하지 않는 등, 정부로부터 어떤 종류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대부분 의료보험에도 들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자치적 삶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고 수 없는 박해와 난관을 거쳐오며 정부의 결정을 얻어낸 결과였지요. 완전 폐쇄된 것 같지만 16세가 되면 바깥 세상을 의무적으로 돌아다니며 경험을 한 뒤 잔류할지 떠날지를 결정하게 하는데 약 90%가 잔류한다고 하고, 그래서 20세기 100년간 아미시의 규모는 30배 커졌다고 합니다.
조금 더 작은 규모로 현대문명에는 열려있는 공동체의 대표적인 예가 독일에서 100여년전 시작된 브루더호프 (Bruderhof, brothers court라는 뜻) 인데 미국, 영국, 독일, 호주, 파라과이의 23개 공동체에서 약 2,700명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홈페이지 (한국어 포함)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을 알리고 있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브루더호프의 가치관을 알리는 "쟁기"라는 출판사가 있는데, 기독교인으로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유지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다룬 글이 있어 일부를 발췌해 소개합니다 [전문 읽기]
- 1933년 11월, 독일 헤센. 125명의 남녀, 어린이로 구성된 브루더호프가 뢴 산지에 있는 한 농장에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공동체는 국가사회주의 나치 정부로부터 모든 시민들은 이 정권에 대한 승인을 입증하는 국민투표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된다는 새로운 지시를 통보 받았다. 정부 관리는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이 국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집단수용소에 감금될 거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이 수용소는 이 정권이 시작된 지 10개월만에 반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5일 후 이 작은 공동체는 140명이 넘는 무장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 자발적 가난이라는 그들의 모범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집, 우리가 사용하는 차량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폭력의 뿌리인(폭력 때문에 정부가 필요하게 된다) 돈의 지배에 실제적으로 반대하는 삶을 추구한다(디모데전서 6:10). 우리는 이 땅 국가의 시민이지만, 국가를 넘어서고 국경에도 매이지 않는 교회의 한 부분이다.
- 우리는 평화와 기본적인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행정 당국을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존중한다(로마서 13:4). 그리스도 성령의 통치 아래 놓인 교회의 유일한 기준은 아가페적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국가가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피터 리데만은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로서1524년 헤세 주 통치자 필립 왕자에게 했던 변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땅의 지배자들에게 주어진 권위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리데만이 나아가 선포했듯이 행정 당국 권위의 한계도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양심과 우리의 부르심에 반하는 어떠한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기를 원합니다”(사도행전 5:29).
-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침해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관련된 어떠한 직위에도 관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아주 분명하게 경찰, 전쟁 그리고 사형제도 등이 포함된다. 나는 경찰관 등과 군인들처럼 폭력적인 공격자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이들을 깊이 존경한다. 비록 나 또한 나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꺼이 내 생명을 내어놓아야 하겠지만(요한복음 15:13), 그리스도의 말씀과 본보기는 나로 하여금 그를 위해 살인을 고려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의 권세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선출되는 공직에 나서지 아니하지만 준비위원회 또는 프로젝트팀이나 지역의 소방대와 구급대 등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인이 공적인 선출직을 유지하거나 폭력과 강제력을 사용하는 자리에서 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시도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절대적 우선성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 우리의 접근 방식은 그리스도의 길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국가 권력에 의한 검의 사용을 반대하는 대신 영적 전쟁의 무기를 선호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무기들은 상호 헌신과 권면으로, 공적 영역에서는 기도,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 그리고 추방이나 심지어 순교를 무릅쓰고 양심에 따르는 시민 불복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때로 교회는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세속 인문주의에서 표현되는 생각을 통해 그리스도의 기준을 증진시킬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로 다가갈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이러한 것들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인간 존재의 진실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할 경우, 우리는 그것들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정의와 평화의 실현은 세상적인 제국의 진보로 성취되지는 않고 단지 계몽될 뿐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룰 때 성취될 것이다.
- 교회는 또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선을 찾고 그들의 종교 자유를 옹호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국가의 불의를 지적하고, 개선을 제안하며, 통치자들에게 정의와 자비를 촉구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수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1527년 아나뱁티스트의 지도자 한스 뎅크는 이렇게 적었다. “믿음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강요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그때 이미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지상 권력을 위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부패하게 하고, 정치적 영역에 전적인 충성을 부당하게 강요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 하나님 나라의 실질적인 선언으로써 교회 공동체는 존재 자체로 세상에 크게 외치는 바가 있다. 이는 특별히 온전한 제자도의 삶과 겸손한 섬김의 헌신(마가복음 20:25–28), 절제된 성(性, 마태복음5:28)과 소유물을 포기(누가복음 12:13–24)한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이 되고 법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국가와 맺는 수많은 강제적 상호작용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요구가 양심과 상충할 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법을 어길지라도 거부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 히틀러를 위해 싸우는 것에 대한 거부도 일이지만, 히틀러에 맞서 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더한 일이다. 평화주의는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아나뱁티즘의 한 면모일 것이다.
- 우리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국가의 강압적인 힘으로 종교적 비전을 강요하기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 동시에, 정치적 절차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면 사실상 현상유지에 투표하는 셈이 되고, 개인과 집단적 무관심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일부 브루더호프 멤버는 자신이 선택한 정당에 등록하지만, 특정 정당이나 후보가 '기독교인의 선택’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점을 모두 분명히 하고 있다. 타협은 정치의 속성이기에 영원한 진리에 관해 답을 줄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특정 당의 강령 전체를 채택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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