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를 마치며
베드로 전서를 마치며
(부제: 하나님 나라를 묵상함)
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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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베드로전서 성경연구를 시작할 때 제 마음 속에 그렇게 큰 긴장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분량이 길지 않은 본문인지라 얼른 끝나리라는 생각도 압도적이었고, 더더군다나 매주 모여서 공부하면 너무 빨리 끝나 버릴텐데 그 다음에는 뭐하지 하는 약간의 근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얼른 훑어 본 본문은 어릴 적부터 교회학교에서 익숙해 왔던 요절들, 사도 베드로의 평이한 당부의 말씀들, 권면의 말씀들이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적어도 저만의 이해로는 아주 평이한 많은 서신서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학기의 성경연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저는 이런 생각과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차원에서 계속 베드로전서를 대하고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베드로서를 보았을 때 비로서 베드로서는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가지고 제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 제가 이해한 베드로전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밝히고,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밝힌 윤리장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의 두 가지 질문은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 (즉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벧전2:9)이고요 둘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충만(fullness)에 들어가지 전, already but not yet의 이 땅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떤 태도로 어떻게 살 것이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베드로의 말하고자 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벧전4:1;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의 벧전4:17)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의 질문에 답한 베드로 사도의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는 어던 곳인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함께 충만히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공간이고 하나님과 접속 혹은 함께 거함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안식과 만족과 행복과 영생의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적 관계성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을 기초로 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정의할 수 밖에 없고 이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한편, 논의의 초점을 약간 달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떻게 될 수 있는가 하면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되어 지는데 세상에는 두 가지의 복음이 존재하고 있어 보이는 것이 제게는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두 가지의 복음이란 바로 로마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로마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로마의 복음은 힘을 가지라고 이야기 하고 힘으로 세상을 바꾸라고 이야기 하고 높은 것, 큰 것, 호사스러운 것, 눈에 보기에 좋은 것, 탐스러운 것, 몸에 보기에 편한 것을 바라보고 취하라고 (소위 고지를 점령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힘”이라는 가정을 끝까지 견지합니다. 로마의 복음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 땅에서의 가시적인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승리라고 보여 집니다. 필요하면 세상의 문화와의 세력다툼을 통해서, 혹은 필요하면 세상의 임금과의 협조를 통해서, 혹은 직접 세상임금의 자리에 올라가서라도 이 땅에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승리 혹은 구현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고 보는 듯 합니다. 이러한 태도와 경향성은 알게 모르게 제 자신의 신앙에서도, 비신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일상의 일과 성취의 모습에서도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내가 더 유능해지면, 내가 더 높아지면, 내가 더 많은 결정권을 가지게 되면 더 많이 더 큰 복음의 일꾼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오랜 세월 저를 push해온 면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제가 복음서를 새롭게 읽으면서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반대로 낮아짐을 이야기하고, 좁은 길을 이야기 하고, 한 알의 밀알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길이 넓어 찾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실현하고가 아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직위와 권세를 지고가 아님) 나를 좇을 지니라고.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심이라고. 아무든지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얻을 것이라고. 자아실현과 주도를 말하는 대학교육, 세상풍조와는 정반대의 길, 정반대의 진리.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시종일관 낮은 자리에 앉을 것 (심지어 초대받은 잔치상에서도) 자기를 낮출 것 (누가 높으냐를 두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을 말씀하고 계심은 참 흥미롭고 정말 새롭게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복음은 자기가 낮아짐(예수 그리스도), 자기를 비움(한 알의 밀알), 자기 것을 나눔(부자청년 니고데모, 삭개오) 이외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비유들을 통해서 복음서에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겨자씨. 누룩, 밭에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 바다에 쳐 놓은 그물, 땅에 뿌리는 씨앗(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 밭), 임금님의 잔치초대, 지혜로운 다섯 처녀, 어린아이 비유, 달란트 맡은 종, 포도밭 일군을 초대하는 주인 등. 이들 비유를 종합하여 보건데 하나님 나라는 굉장히 좋은 곳인데 얼마나 좋은 곳인가 하면 자기 모든 것을 주고 값을 치르고 살만큼, 한쪽 눈을 빼어 버리고, 한 쪽 손을 자르더라도 들어가기를 힘 쓸 만큼, 그리고 열심히 일한 종에게는 그 나라에서 행위대로 상을 주는 곳으로, 다섯 처녀처럼 어린아이처럼 날마다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와 대비되는 곳은 이 세상인데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좇는 것은 재물입니다. 복음서에서 이 세상은 한 마디로 세상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운 곳으로, 세상임금(가이사)들이 세금을 걷고 지배하는 곳으로, 예수님을 미워하는 곳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미워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환난 당하는 곳으로 일관되게 묘사되어 있음에 주목합니다.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빛을 미워하듯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고, 그 이유는 예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고 세상의 행위가 악하다고 정죄하셨기 때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복음서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생명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천하를 다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이 말씀하심 같이 생명이 세상 무엇 보다 소중하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예수님 주시는 생명(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므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오셨고 병든 자를 고치러 오셨지 이 땅에 자기 왕국을 건설한다거나 세상임금인 가이사와 세력을 경쟁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임금들과 자신이 관련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터인데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세상의 힘을 가진 이 세상임금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그곳이 육신과는 상관없는 살아있는 영의 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고 그의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임금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힘과는 아무 상관 없이 구현되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나라로 보여 집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은 세상의 고지를 정복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세상의 희소가치와도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전도의 미련한 것과 한 알의 밀알의 썩어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로마의 복음은 이데올로기 논쟁인데 사실 승리하더라도 공허함만이 남는 가짜 복음이라고 보여 집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을 모집하는 운동인데 그 목표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들에게는 생명 즉 영생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볼 때 이 진짜 복음의 모습은 낮고 천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볼품없고 어리석고 (전도의 어리석은 것) 겸허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추인 진리입니다.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현대로라면 “내 양은 내 음성을 알고” 입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사람들은 “내 양이 아닌 고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인데 그 일체의 비결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달리 표현 드리자면, 세상에는 없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살지만 영원히 살 것도 이 땅에 속한 것도 아닌 자들이므로 나그네로 불리 운다는 베드로전서 1장 전반부의 선언은 매우 실감나는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보여 집니다. 아울러 하나님 백성이 누리는 이러한 생명과 나그네적 본질은 비신자들에게는 감추어진 대단한 비밀이므로 베드로는 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그들도 구원을 얻도록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당부해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비백성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닌 무리)로 크게 양분된다는 것이 베드로 사도 뿐 아니라 복음서의 예수님과 다른 사도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러므로 비백성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베드로서의 핵심 메시지라고 봅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다르게” 사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우선 베드로전서 1장 하반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부르심에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부터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의 관계성 설정에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위한 마지막 기도의 요지가 거룩함과 하나됨임을 기억할 때, 거룩함의 요구는 일관된 하나님 백성의 윤리강령으로서 이 곳에 재천명 되어진 것으로 이해 합니다.
다음으로 베드로전서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주는 윤리강령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라”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표현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본 강령은 베드로전서 전편에 걸쳐 일관되고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데요 이를 살펴보자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하는 것”,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것”, “인간들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는 것”,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 등등 다양하지만 녹녹치 않은 환경과 역할과 상황 가운데에서라도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 내는 것을 지칭함이 아닌가 보여 집니다. 또한 어떤 의미로든지 자아확장적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삶, 순복하는 삶, 자아실현을 원하는 높아짐을 원하는 물질적 부유함을 원하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을 권고함이 공통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좁은 길, 썩어지는 밀 알, 자기부인, 십자가를 짐과도 매우 일관된다고 하겠고 결국 낮아짐, 자기 것을 비움, 나눔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본질적인 면모라고 결론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살기에 녹녹치 않은 이 세상의 본질과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대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세상을 향하여 악하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영을 소유한 우리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세상을 본받지 않기에 때로는 고난으로 때로는 불시험으로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을 준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베드로전서도 말하고 있고 저도 그렇게 이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함이란, 의를 위함이란 단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서 생명의 구주로 시인하는 것,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 (예를 들면, 복음전도. 구령운동, 성경공부, 복음전파와 관계된 일) 등이 우선 생각납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하기에, 하나님 나라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그 백성의 무리 안에 있고 각 성도의 내면에 임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므로 하나님 나라 운동은 무슨 이데올로기 운동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운동, 구령운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고, 복음전파란 결국 영혼들에게 생명을 얻도록 소식을 전하는 생명 나눔 운동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된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살되 (예수님 때문에 고난, 불시험, 환난을 당하지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요약 하건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 방안이 베드로전서가 주는 메시지라고 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거룩하게 살고(1장), 건축자의 버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 삼아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해 순복하고(2장),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해 고난 받으며 (2, 3장),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4장)이 구체적 실천이라고 요약합니다. 아직 공부는 마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며(5장),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고 믿음으로 사탄을 대적하는 것(5장)도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보다 내게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살아계시고 가장 소중한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그 분 앞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고,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 보다 이 땅에서 나그네인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고, 사실 세상임금과 연루된 이 세상 일 중에 그렇게 크고 대단한 일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삶도, 바울의 삶도, 베드로의 삶도 이 세상임금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삶, 모두 세상임금에게 목숨을 잃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복음서 속의 케리그마에 대한 질문들
[1]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한 쪽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려라.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으로 지옥불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는 귀절의 해석은? (마5:30, 마18:8-9, 막9:47)
[2] "몸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 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불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는데 과연 나는 이 정도의 강도로 그 분을 두려워하는지..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떻게 두려워 하는 것..? (마10:28)
[3]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어린아이의 모습은 무엇인지...(마18:3, 눅18:17)
[4]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너희 안의 해석은? .(눅17:21)
[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셨는데 부자는 누구를 말하는지? 그리고 이 귀절의 전반적 이해는? (마19:23, 24, 눅17:25)
[6] "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예수님 잡히실 때 친히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 아닌 다른 노력의 필요는 ? (마26:53, 요18:36)
[7] "나는 세상임금들과는 관계가 없다", "세상임금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고 예수님 잡히시기 전날 밤,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 발을 씻기신 후)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세상임금과 관계가 없으시므로, 나도 세상임금과 상관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세상임금들하고 세력경쟁은 아니라고 보는데....? (요14:30)
[8]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이사와 세력경쟁하지 말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면서 살라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눅20:25)
[9] "밭에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 --> 하나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가진 것을 다 파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움? (마13:44,45)
[10]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 "썩어질 것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는데…? (눅16:13)
[11] "보물을 이 땅에 두지 말고(좀과 동록), 하늘에 두라"고 하셨는데 보물을 하늘에 두는 삶의 이해, 혹은 예시는..? (마6:20)
[12]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소견은..? (요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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