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에 대한 4가지 오해
4 Myths about Giving
by Scott Morton (Director of Donor Department, The Navigators)
[허구 1] 10퍼센트를 드려야만 한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헌금의 강도를 낮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의 고된, 그러나 공정한 헌금의 기준을 탐구하도록 하자.
과거에 나는 모든 사람이 10%를 헌금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더 공부하면 할수록, 10% 십일조를 무효화하는 테마를 더 많이 보게된다.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두번으로 제한된다. 한번은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에도 기록됨) 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드리지만 의와 인과 신은 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를 그만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 십일조를 드리면서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동기부여를 공격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 또 누가복음 18:12에서 언급하시며 “나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나의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를 드립니다” 라고 바리새인들의 흉내를 내신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서 찬성도 반대도 하시지 않으신다. 그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베드로, 바울, 야고보는 서신에서 십일조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이 지침(guideline)으로서의 십일조에 대해 침묵한다면, 신약성경은 또 다른 것을 제시하는가?
그렇다! 누가복음 21:1~4에서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잘 알려진 이야기속에 그것이 숨겨져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과부가 겨우 “두개의 매우 작은 동전 (렙돈)”을 헌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어느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부자는 “남아도는 돈 중에서” 드렸고 “그녀는 빈곤한 중 (혹은 생활비중)에서 드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액수에 상관없이, 삶에 영향을 초래할 정도의 헌금을 칭찬하신다. 만약 우리가 남아도는 돈만을 헌금한다면, 우리는 핵심을 놓친 것이다.
만약 10%가 헌금의 목표라면, 화요일 오전 성경공부에서 내가 만난 초신자 아담 (가명) 에게 벌어질 일을 한번 생각해 보자. 아담은 매달 $806, 혹은 매년 $9,672을 번다. 십일조를 하려면, 그는 매달 $80을 헌금하고 $720로 생활해야 한다. 매우 검소한 아파트에 사는 그의 월세는 $500이다. 십일조를 하던 하지 않던, 그 돈으로 두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아담은 희생적으로 헌금하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매달 $50을 드리는 것 조차 희생적 헌금일 것이다.
또 다른 한 친구는 매년 $250,000을 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그는 헌금에서 예수님을 공경하기 원하는, 성장하는 신자이다. 만약 그가 소득의 10%를 드린다면 $225,000이 세금공제후 생활비로 남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를 알겠는가? 십일조를 낸다고, $250,000을 버는 내 친구가 의무에서 해방되는가? 아니다. 그가 더 드릴 수 있고, 더 드려야 한다고 우리 대부분은 말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C. S. 루이스가 “성경적 자선이란, 없어도 별 지장없는 것을 그저 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좋은 질문 제기를 했다.
바울은 10%를 헌금하라고 가르칠 충분한 기회가 있었고, 또 과거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가르칠 법도 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1~4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십일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신자들에게 매주 첫날에 “각자의 소득에 따라” 헌금을 따로 모아두라고 권면한다.
고린도후서 8:3에서, 바울은 “힘 닿는대로, 그리고 심지어는 그보다 더” 헌금한 마케도니아인을 본받으라고 고린도인들을 권면하면서 희생적 헌금에 대해 한결 더 강하게 호소한다. 7절에서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헌금에 “탁월하기(excel)”를 권고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십일조를 기준으로 설정하는 대신, 좀 더 폭넓고 널리 응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음속에 가진듯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를 헌금해야 하는가? 신약성경은 고정된 %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이 영향받을 정도로 헌금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저 당신에게 남아도는 부분(merely your surplus)이 아닌 “당신의 생활비에서(of your living)” 드리라.
[DJ Readers Survey]
교회, 사역, 자선기관에 기부하는 액수
• 수입의 10% 또는 그 이상 74%
• 6~9% 14%
• 1~5% 8%
• 액수에 상관없이 정산후 전액 3%
• 보통 기부하지 않는다 1%
[허구 2] 첫 10퍼센트는 당신이 섬기는 지역 교회에 드려야만 한다.
흔히 창고 십일조라고 알려진 이 가르침은 말라기 3:10말씀에 근거한다 –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라.” 십일조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를.
어떤 교회들은 이 말씀이 십일조 전체를 지역 교회에 드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만약 10% 이상을 드리기 원한다면 (종종 권장되어진다), 선교 기관이나 가난한 자들 혹은 궁핍한 친구들을 도울 수 있다.
성전의 “창고”는 십일조로 드려진 곡물을 보관하기 위한 특별한 방이었다. 그러나, 지역교회가 유대인의 성전과 동등한가? 성경학자들은 유대인 성전의 관습을 20세기 교회의 방침으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같은 논리를 따라 우리는 다른 유대 관습을 채택할 의무가 있지는 않은가?
“말라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서 월터 C. 카이저는 “우리는 ‘창고’십일조를 강요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하는것에 조심해야만 한다... 그 창고는 지역교회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목회자들이 수입의 첫 10%를 지역교회에 드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성경적 명령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내 목사친구 한사람은 말하기를 첫 10%를 지역교회에 드리라고 하는 것은 “좋은 방침(policy)이지만, 그 방침을 말라기 3:10에서 취할수는 없다”고 한다.
나는 우리 헌금의 가장 큰 몫이 지역교회에 드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 근거가 될 성경구절 때문이 아닌 단순한 논리 때문에. 만약 교구민들이 지역공회(local assembly)에 헌금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그 이외에 또 어디에 헌금할 수 있을까? 성경적 제안들은 가난한 자 (갈라디아서 2:10), 고아와 과부 (야고보서 1:27), 전임 사역자 (신명기 26:12), 선교 (고린도전서 16:3, 빌립보서 4:10~20, 요한3서 5~8), 우리를 가르치는 자 (갈라디아서 6:6)등이다. 당신이 선택한 곳에 드리라. 그렇게 제한없이 해도 될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9:7에서 요점을 정리한다 “각 사람은 마음에 정한대로 헌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역교회에 대한 후원의 숨통을 끊지는 않을까? 아니다. 헌금이 제자도의 일부분으로 가르쳐진다면, 그리고 일년에 단 한번의 헌금이 아니라면.
[허구 3]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그리스도인 리더라면, 사람들에게 요청할 필요가 없다.
이 신념의 뜻하지 않은 수호성인 (accidental patron saint)은, 사람들에게 요청(appeal)하지 않고도 그의 고아원의 후원을 위해 들어오는 막대한 금액을 본 경건한 목사, 영국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이다. 우리는 “막판의 공급(last-second deliveries)”에 대해 듣기를 좋아한다. 뮬러에게 우유가 바닥 난 바로 그날 우유 마차가 고아원 앞에서 고장났을 때와 같은 것 말이다. 우유가 상하게 두는 대신, 그 우유장수는 전부를 고아원에 주었다. 기적인가? 그렇다! 마음속으로, 우리는 모든 교회와 선교의 필요가 이와 같이 기적적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번 생각해 보라…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가 더 이상 없다고. 저녁 식사시간에 후원을 바라는 전화가 더 이상 없다고. “작정 주일(Stewardship Sunday)”이 더 이상 없다고. 헌금 바구니(offering plates)가 더 없다고!
그러나, 진실하고 정직한 기금 요청(appeals for funds)이 비성경적인가? 만약 기금 요청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런 것은 어떤가?
- 12제자와 70제자들에게, 그들의 선교여행을 위해 식량을 가져가지 말고 방문한 마을의 “합당한” 사람에게 신세를 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대접이 후한 중동 문화의 견지에서 보면, 문 앞에 서는 것은 후원 요청에 버금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11)
-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도움받기를” 로마인들에게 바라는 바울 (로마서 15:24)
- 유대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믿는자를 도와달라고 교회에 요청하는 바울 (고린도 전서 16:2)
- 성막을 짓지 위해 금, 은, 그리고 기타 헌물을 드릴 것을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모세 (출애굽기 35:5)
- 사렙다의 과부에게 한끼 식사를 요청하는 엘리야 (열왕기상 17:10~11)
- “주님의 성전을 복구하기 위해” 헌금을 요청하는 요아스 (역대하 24:4~5)
나 역시 선교사이지만, 대조적으로, 나는 재정 관리를 할 뿐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나는 망설이다 내 친구에게 물었다 “엘리야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한 것은 어느쪽이었는가? 까마귀가 매일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올 것을 믿는것? 아니면 유대인이 아닌 사렙다의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그녀의 마지막 식사를 요구하는 것?” 그는 하나님에게만 (까마귀) 구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구하는 것 (과부) 모두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뮬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뮬러 시대의 여러 큰 도시에서 대규모 정오 기도 모임들이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뮬러의 동역자들은 종종 이 모임에서 기도의 응답 혹은 기도 요청을 했다. 뮬러 역시 재정상황을 포함한 그의 고아원 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그러는 것이 마땅했다). 맞다. 뮬러는 직접 후원요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알려졌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디에 헌금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필요를 먼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이고 진실하고 거짓없는 후원 요청을 하는 목사와 선교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구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하나님을 신뢰한다.
[허구4] 한 번 작정한 헌금은 절대 중단할 수 없다.
신명기 23:21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맹세하여서 서원한 것은 미루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미루는 것은 당신들에게 죄가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근거해, 작은 액수라도 우리가 후원을 줄이면 선교사의 사역이 무너질 것이라고 우리는 느낀다.
하지만 신 23:21은 신 16:17의 “저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에 따라서 그 힘대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드리는 것은 당신이 얼마만큼 받았느냐에 비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면, 헌금을 줄일수도 있다. 어떤 부부들은 믿음으로 이전과 같은 수준의 헌금을 계속하지만, 줄인다고 해도 잘못은 아닐것이다.
단순히 선호도로 인해 (out of preference) 헌금을 줄이거나 재분배하는 것은 어떤가? 어쩌면 10년간 지속해 온 도시 빈민사역 서약(pledge)을 계속하는 대신 카자흐스탄의 선교를 지원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빈민사역 지원을 줄이고 카자흐스탄 지원에 보태도 되는 것인가?
헌금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민수기 18:21에서 발견되는 수직적 드림과 받음의 원칙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안에서 바치는 십일조 모두를 레위인들에게 준다… 일에 대한 보수로”
선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헌금하는 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헌금할 특권과 책임이 당신에게 있지만, 당신이 원천(source)은 아니다. 당신은 헌금을 하는 사람인가? 긴장을 풀라. 당신은 헌금을 받는 사람인가? 긴장을 풀라. 받을 특권이 당신에게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부자가 아닌 하나님을 향하라.
당신이 후원을 중단하면, 구제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낙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아닌 하나님의 후원을 바라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헌금의 선호도를 재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두번째 이유는 고린도후소 9:7에서 발견되는 “기쁨지수” 때문이다 -- “하나님은 기쁘게 드리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제사역에 대한 당신의 열정이 즐거움 없는 “의무”로 저하되었다면, 먼저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헌신을 점검해보라. 만약 당신의 모든 헌금이 고역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세속적 산만함으로 싸우고 있는 중일 것이다. 당신의 영적 건강을 점검한 후에, 어떤 사역을 즐겁게 후원할 수 있는지 결정하라.
당신의 서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생각없는 전환을 삼가도록 하라. 그러나 그 서약을 평생에 걸친, 바꿀수 없는 쇠덫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번역출처] 2006년 "생명의 삶"을 기본으로 원문을 참조하여 재 번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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