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합의 일기 (3) - 점토판에 기록된 신
라합의 일기 (3) - 점토판에 기록된 신
긴장과 공포로 히브리인들의 동태를 지켜보던 중 얼마 전 히브리인들의 진영에 큰 곡소리가 났다. 왕은 아니지만 그들의 우두머리가 죽었다고 들었다. 무려 한달간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그 길고도 긴 곡소리는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히브리인들의 구심점을 잃었을 것이며 그러니까 여리고성을 노리지 않을것이라는 안도감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우리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군대가 식량을 준비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갑자기 들려왔고 이로 인해 한동안 안도하고 있던 성 안 분위기는 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사장과 사제들이 성을 휘젓고 다니면서 젖을 갓 뗀 어린 아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는걸까? 저렇게 어린 아이까지 데려간 적은 없었는데.... 신전에 있을 때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나이 많은 제사장 할아버지를 찾아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들었을때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브리인들의 병력규모로 보았을 때 여리고성이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맹세의 신 몰렉에게 어린 아이를 산채로 태워 제사를 드리기로 왕이 결정했단다. 설혹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몰렉 신께서 우리 성의 굳건함을 통해 히브리인의 공격을 막아내도록 도우실 거라는 믿음의 고백이란다.
제사장 할아버지를 다그쳐 물어봤다. 그렇게 해서 몰렉신이 도와준 적이 있느냐고. 하다 못해 신의 계시라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할아버지는 "우리 성은 강하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 사람들의 일치된 용기인데. 한 어린 아이의 희생을 통해 우리 성이 하나로 뭉칠수 있다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조상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내 안에서 약해질대로 약해졌던 신들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우리를 안심시킬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무력한 신. 과연 그 신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엉터리 신, 아니 나무토막 돌덩이를 의지 한답시고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를 산채로 태워 죽인다고? 힘센 것들이 약한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유린하고 착취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말도 안되는 엉터리 신들을 앞세워 성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 자신의 지위를 지켜내려는 발악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아이를 태워죽이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그 제사에 참여할 성 사람들을 생각을 하니 치가 떨려왔다. 하루라도 빨리 이 저주받을 성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장 할아버지께 히브리인들의 신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어떻게 생겼냐고? 신상이 있느냐고?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히브리인들은 신상을 만들지 않는단다. 그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본 사람이 없어. 대신 그들의 신에 대한 기록이 적힌 점토판은 우리에게 있지."
할아버지는 조용히 구석에 있는 점토판을 꺼내 읽어 주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겠다고 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것이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점토판에 적힌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가슴은 터질듯이 뛰었다. 그간 들어왔던 무수한 신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 끊임 없이 치고 받고 싸우고 빼앗는 인간들의 삶을 그대로 담은 허접한 가짜 신이 아닌, 천지만물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절대자... 그러면서도 인간의 삶에 관심을 기울여 듣고 말하시는 구세주... 히브리인들의 신이 정말로 점토판에 적힌 이야기 속의 신이라면 어릴 때 들었던 애굽에서 벌어진 일이나 바다가 갈라졌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과장 없는 사실일 수 있지 않은가?
[Note] "점토판" 개념을 비롯한 여러 부분이 김성일님께서 1992년 출판하신 소설 "다가오는 소리"를 참고했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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