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 or 불경?
친밀함(Intimacy) or 불경(Impiety)?
교회에서 음악부서를 섬기다보면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다들 눈감고 기도하는 시간에 이동을 하면서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기도하는 자세를 종종 보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 신자들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목회자들의 기도 자세가 전형적인(typical) 모양과는 사뭇 다른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사실 기도할때의 자세가 이러 저러해야 한다는 규범은 없다. 요즘은 보통 눈을 감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은 눈을 뜨고 때로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했던 것 같고,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경우 선 채로, 혹은 무릎 꿇은 채로 기도했던 것 같다. 양 손을 모으고 할수도 있고, 손을 높이 들고 할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영과 마음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자세가 가끔 내 눈에 거슬릴(?) 때가 있다.
아래 두 사진은 내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 역시 존경하는) 복음주의 목회자들중 한 분께서 설교를 마치고 기도할 때의 모습이다. (이 분을 예로 들고 싶지 않았는데 예배중 목회자 기도하는 모습 몰카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리고 늘 이런 자세로 하시는 것도 아님을 밝혀둔다) 인터넷으로 설교 동영상을 보던 중 끝 부분에 갑작스레 들어온 저 모습은, 솔직히 말해, 한국에서 자랐고 이미 중년 나이의 내게 의외였고 당황스러웠다.
한가지의 단편적 모습 + 내 선입견으로 한 분의 신앙을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짧지 않은 햇수를 살았지만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의 에티켓과 문화차이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과 정말 친밀하게 느껴서 격식 차리지 않고 대하는 것이 일상화 되다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게 정말로 부족한 부분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걸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교인들을 향한" 설교를 마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시간이 되었는데도 혹 목회자는 여전히 "교인들에게" 설교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61년에 발간된 개역 한글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기록했고 1977년대에 발간된 공동번역은 '야훼'라고 기록했다. 히브리어 원문에 יהוה라고 자음으로만 적힌 이름이 너무 거룩히 여겨져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읽는 것 외에는 그 단어를 늘 '아도나이' (주님) 이라고 바꿔서 읽다보니 읽는 법이 완전히 잊혀졌던 것이 그 이유다. 같은 이유로 현대에 사용되는 영어 성경 상당수가 the LORD로 번역했고 2008년 교황청에서도 “거룩한 네 글자(tetragrammaton: YHWH)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이름을 전례에서 사용하거나 발음하지 말고 ‘주님’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느냐는 핀잔을 줄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실재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친밀함을 느끼는 것과는 거리가 꽤나 있는 외경(awe) 혹은 공포(fear, dread)에 가까왔다고나 할까?
자유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매주 적게는 한번, 많게는 7~8번의 예배를 드린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세련되어지고 entertainment화 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함께 예배를 진행하는 한 명으로 나는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를 늘 기억하며 그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제집처럼 편해진 교회 속에서 사람들만을 의식하면서 또 한 시간을 그냥 보내다 오고 있는 것일까? 목회자들의 기도하는 자세에서 그 분들이 만나고 있는 하나님 대신 그저 그 분들의 professionalism(?)을 느끼고 있다면 내가 너무 꼰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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