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꼼꼼과 자폐의 경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요즘 주목을 받으며 시청률이 급상승 중이라고 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시청하기] 소위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 전반적으로는 정상인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나 특정 분야에 대해서만은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인 자폐 스펙트럼 장애 (ASD, Autism Spectrum Disorder)의 여변호사를 그렸습니다. 4편까지 봤는데 주인공 자폐 연기를 열외로 하면, 각 편당 바뀌는 소송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완성도 높은 드라마 인것 같아 추천합니다. 드라마 제작 처음 해보는 회사가 돌풍을 일으킬만 하네요. 소송 당사자들로 한회씩만 등장하는 조연들 연기력이 너무 훌륭하고, 특히 여성 연기자들 최고입니다. 처음 보는,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연기를 하는 숨겨진 배우들을 발탁한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자폐는 보통 저지능을 동반하고, 약 20~30%만이 정상적인 IQ (지능지수)를 보이는데, 100만명 당 1정도로 드물게 특별한 능력(서번트 스킬, savant skills)이 있는 고기능 자폐인이 있습니다. 고기능 자폐인들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종합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는 드물고 일차적인 지식 암기, 암산, 체육, 그림, 음악등 특정 분야에 편중된 능력을 보입니다.
이런 고기능 자폐인을 주인공으로 그린 작품이 몇 있었지요. 1988년 작 영화 <레인 맨 (Rain Man)>, 2013년작 드라마 <굿 닥터>가 같은 범주입니다. 세 작품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고, 주연들도 자폐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자폐의 발생 빈도가 0.1%로 꽤 높은 편이고, 미국에서는 아이에게 혹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감추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 주변 가정에서 자폐아를 여럿 보았습니다. 실제 자폐인을 본 경험에 따라 개인적으로 주연들의 자폐 연기력에 점수를 매겨 본다면
- <레인 맨> 더스틴 호프만 (Dustin Lee Hoffman) 95점. 언제나 믿고 보는 연기력. 이 영화로 오스카상 받았죠.
- <굿 닥터 미국판> 프레디 하이모어 (Alfred Thomas Highmore) 98점. 한국판이 오리지널이고 미국판/일본판이 있는데 각각 1편만 본 후 미국판을 선택해서 시즌 2까지 봤습니다. <어거스트 러시 (August Rush)>의 아역 배우 출신인데, 이보다 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폐인 연기를 잘 하네요.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박은빈 85점. 잘 하는 편이긴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자폐라기 보다는 <스타 워즈>의 로봇 3PO 보는 느낌입니다. 각본 쓴 사람과 연출 감독이 자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자폐의 재현은 많이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들이 좀 있어서 꼭 박은빈의 잘못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폐인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다시 생각나는 것이 있어 몇자 적어봅니다. 저는 규칙과 정돈된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같은 시간에 잠드는 규칙적인 생활이 마음 편합니다. 결벽 수준은 아니어도, 물건들은 잘 분류해서 제자리에 두어야 하고 마구 어질러진 방이나 주방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보통 일단 치운 후에야 다른 일을 합니다. 완벽주의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문서를 작성할 때도 글꼴이건 그래프건 일관성 없는 부분들이나 조악한 부분은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전부 다 바꾸는 편이 마음 편합니다. 이런 제 성격과 성향은 공돌이라는 제 직업에 도움이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공돌이들의 궁극적인 사명은 가급적 균일한 물품을 불량 없이 대량생산 해내는 것이니까요.
<굿 닥터 미국판>의 시즌 2 제 6화에 보면 주인공 션 머피(Shaun Murphy)가 좋아하게 된 이웃 여자 레아(Lea)와 한집에 살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래 유튜브 영상 참조) 레아는 자유분방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여자입니다. 반면 션은 전형적인 자폐의 특징대로 "특정 상황과 사물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단순한 흑백논리와 원칙"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에게는 화장실에 칫솔을 두는 "옳은" 위치가 있고, 화장지를 거는 "옳은" 방향이 있고, 매일 같은 양의 같은 음식을 같은 시간에 먹어야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션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논리과 확신이 있지만, 레아는 당연히 이런 션의 요구로 인해 단 하루 만에 미쳐버릴것만 같습니다 😅
화장지 방향과 치약 짜는 방법의 견해 차이는 신혼 부부 싸움의 가장 흔한 이유중 하나지요. <굿 닥터>를 보면서 매사꼼꼼함과 자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며 그 경계선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 행동이 혹 자폐 비스므레 하지는 않은지 다시 점검해 보는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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