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원 (David E Ross) 선교사
“지금 있는 이곳이 어디쯤일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우린 아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 엘렌과 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린 하나의 문화를 떠나서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여백의 시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여백은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 선교에 대한 소명을 재확인했고, 인생과 선교에서 ‘여백(Space)’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일부러 한국어는 미리 배우지 않았다. 사투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억양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웠다.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종로 거리를 누비며 대화를 시도했다. 빵집과 다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생활 한국어를 익혔다. 엘렌과 난 한국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둘이 있을 때도 한국어로 대화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한국말을 잘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사랑을 나누고 싶듯이,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그들과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국인을 사랑하게 되니 한국어도 빨리 배울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선 매일 오전 6시 영어 성경공부가 열렸다. 대학교수, 고교 교사 등 20∼30명이 모였다. 전남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왔다.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모임을 마칠 때 돌아가면서 영어로 기도했는데 한번은 내가 깜박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 피곤해서 잠이 든 내가 깰까봐 사람들이 소리 없이 돌아간 것이다. 또 한번은 추운 겨울, 눈이 오는 날이었다. 늦잠을 잔 내가 후다닥 나가 문을 열어 제치니 30여명이 눈을 맞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면 될 텐데, 내가 깰까봐 그냥 열어줄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미숙한 선교사를 이렇게 멋있는 분들이 양육해 준 것이다. 그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전주에서 여름 대학생 수련회가 10일 동안 열렸다. 첫날 저녁식사로 김치찌개가 나왔다. 맵고 뜨거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금식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나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김치찌개가 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나님께 “하나님 너무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느냐? 그냥 먹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먹을 권리를 포기하고 힘들어도 그냥 먹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1971년, 한국에 온 지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변화를 위한 ‘여백’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년간 미국에서 재충전을 하고 오기로 했다. 목사나 선교사가 일이 잘 안 될 때 하나님께 먼저 구하기보다 공부하기로 쉽게 결정하곤 한다. 공부를 더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서다. 나 역시 안식년 동안 선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물어오셨다. “너는 누구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느냐?” 그 말씀에 순종해 결국 공부는 내려놓게 됐다.
지난 10년 동안 우린 모든 인간적인 힘과 지혜를 다해 선교사로 일했다. 우리는 열심히 준비했고, 오랜 시간 일했으며, 주의 깊게 계획을 세웠고, 학생들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인간적인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 성령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그가 선택하는 방식대로 따라가자 우리는 두려움과 의심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은 사실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이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우린 그와 나눠야만 한다고 느꼈다. 1961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지적인 능력과 예수님에 대한 열정에 감동을 받았었다.
1972년 10월, 계엄령이 내려 지방에 살던 학생들은 집으로 내려가고 그곳엔 다섯 명 가량의 학생만 남아있었다.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그로 인해 젊은 지성들은 더 예배에 집중했다. 학생들은 서울공대 앞에 있던 우리 집에서 날마다 6시간 정도 기도와 찬양, 성경공부를 했다. 다섯 명의 학생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고 예배 중에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 퍼지자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생들도 공릉동에 있는 우리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10명에서 30명, 50명, 나중엔 100명의 학생들이 늘어났다.
기도 중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모임의 이름이 예수전도단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니? 그런데 너희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이 밤에 왜 증거하러 나가지 않지? 성탄전야에 수많은 젊은이가 모이는 곳으로 나가야지. 지금 당장 명동으로 나가라.”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맞다. 그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했지만 전도하지 않았다. 예수전도단 선교 초기에 우린 매일 기적을 체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치유를 받았으며 악한 영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너무나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린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의 작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보통사람들을 통해서 사역하셨다.
예수전도단 선교 초기에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났다. 그 중 ‘귀신집’이 ‘예수집’으로 불리게 된 일을 잊을 수 없다. 전남 곡성에 10명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였다. 낮에는 가가호호를 방문해 전도하고 밤에는 교회에서 복음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마을엔 ‘귀신집’이라고 불리는 집이 있었다. 우린 며칠 동안 그 집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전도하지 않았다. 좁은 방에 모두 앉을 수 없어 누워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주위를 둘러서서 찬양하며 기도했다. 우린 할머니 할아버지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20분가량 기도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다소 실망스런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3주 후 시골교회의 젊은 전도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병이 깨끗하게 나으셔서 우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계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노부부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다고 한다.
1973년 9월, 국제 YWAM 선교봉사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로렌 커닝햄, 딘 셜만, 조이 도우슨 등을 비롯한 180명의 대규모 선교봉사단을 만났을 때 ‘우린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기도하고 찬양하며 전도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79년 장로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예수전도단과 국제 YWAM의 연합을 결정했다.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9월 24일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80년 봄 태국에서 열린 국제 YWAM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두 단체의 연합을 선포했다. 예수전도단의 영어이름은 YWAM Korea로 사용하되 국내 이름은 계속해서 예수전도단으로 부르기로 했다.
엘렌과 난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 결혼 전부터 자연스럽게 2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일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갈등하지 말고 입양하자고 약속했었다. 결혼 후 6년이 지났을 때까지 우리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2년쯤 되던 시기였다. 우린 세 명의 한국아이를 기쁜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선택된 우리의 삶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사역과 자녀양육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마음속 깊이 아이들에게 미안해했다. 사역을 하느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79년 하와이에서 ‘크로스 디티에스(DTS·예수제자훈련학교)’에 참여했을 때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을 위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말씀하셨다. 난 아들에게 “그동안 아빠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아들은 거절했다. 그만큼 상처와 불만이 깊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싸움이 끝났으니 이제 감사기도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들의 거절에 개의치 않고 계속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후 수양회에 참석한 아들은 완전히 변화됐고 나와의 관계도 회복됐다.
예수전도단 사역이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난 힘겨운 시련을 마주해야 했다. 1986년은 나와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88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해외 선교사들이 거리에 많이 다니면 후진국가로 보인다며 선교사들의 활동을 원치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나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61년 이 땅에 발을 디딘 우린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우리에게 정부의 추방명령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86년 8월, 우리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을 갑자기 떠남에 괴롭고 슬펐다. 머릿속은 혼돈과 후회로 가득했다. 한국을 떠난 뒤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LA의 한 공동체에서 하루 6시간 이상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님께 회개하는 데 여러 달의 시간을 보냈다. 2년이라는 기간 동안 공동체 안에서 상담도 받고 격려 받으며 회복되어갔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안다. 한국에서 우리를 떠나게 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다시 기름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 동포들에게 선교하라는 커다란 비전을 주셨다. 엘렌과 난 뉴욕에서 8년 동안 청소년과 대학생 사역을 하며 비전을 발전시켜 나갔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교훈련이라 생각했다. 1994년 시애틀에 안디옥선교훈련원을 개원했다. 훈련원은 국제YWAM 소속단체로 선교 훈련, 북한연구학교, 캠퍼스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세계선교를 할 한국의 해외 동포를 훈련시키는 것이 우리 사역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우리 훈련원의 핵심과제 중 하나는 북한선교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NKSS(새코리아 섬기는일꾼학교) 과정을 열고 있다. 우리가 ‘새 코리아’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력한 힘을 갖고 한국으로부터 세계 모든 국가에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더 남과 북에 있는 백성들이 합쳐지도록,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한반도에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북한 어린이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아이는 며칠 전 9세 생일이 지나갔다. 아이는 새로 파묻은 형의 무덤 옆에 무릎 꿇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정말 혼자 남았다. 어머니는 2년 전 영양실조로 죽었으며, 아버지는 음식을 구하는 중에 없어졌다. 이 작은 소년에게는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희망의 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환상은 계속되었다. 아이는 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남북한 통일을 이루는 하나의 열쇠는 북에서 내려온 2만 여명의 탈북주민이다. 북에서 남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커다란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적인 해답은 그들이 박해 때문에 내려왔거나 북에 있는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이 남과 북의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한국 백성들을 북에서 남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믿는다.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다. 60년 이상 떨어져서 살아와 두 개의 다른 문화가 생겨났다.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우리를 축복하시고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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