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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書齋)'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7.12.30 호모 데우스 - 내용 요약 (2)
  2. 2017.12.29 호모 데우스 - 서평
  3. 2017.05.11 사피엔스 - 내용 요약
  4. 2017.05.10 사피엔스 - 서평 (2)
  5. 2016.04.10 God is Fair and Just
  6. 2013.07.27 Evolutionism & Post-Modernism
  7. 2013.05.03 Rich Country and Poor Country
  8. 2013.04.28 Unity and Diversity (2)
  9. 2013.04.15 Risk of 'Syncretism'
  10. 2013.04.14 Contextualized (Appropriate) Christianity

호모 데우스 - 내용 요약



서론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The New Human Agenda)


  • "기아, 역병, 전쟁"은 20세기까지 인류가 매일 직면해야 했던 핵심 문제였다.
  • 기근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5~10%가 사라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692~1694년 프랑스에서는 흉년으로 인해 인구의 15%(280만명)가 굶어죽었다.  이어서 1695년 에스토니아에서는 20%가, 1696년 핀란드에서는 25~33%가, 1695~1698년 스코틀랜드의 몇 지역에서는 20%가 기근으로 사망했다.
  • 지금도 일부 지역에 이따금 대기근이 닥치지만 이례적이다.  이제 세계에 자연적 기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 기근만 존재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다.  2014년 21억명 이상이 과체중이었으나, 영양실조는 8억 5천만명이었다.
  • 역병은 두번째의 적이었다.  도시는 문명의 산실인 동시에 병원균의 이상적인 번식처였다.  가장 유명한 '흑사병'의 경우, 1330년대 아시아 어딘가에서 시작되었는데 20년도 되지 않아 대서양 해변까지 퍼졌고 유라시아 전체 인구의 1/4 (7500만~2억)이 사망했다.  잉글랜드에서는 370만명의 인구가 220만명으로 줄었고 피렌체는 10만명 시민중 5만명을 잃었다.
  • 신대륙으로 진출한 유럽인을 통해 퍼진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는 현지인의 무려 90%가 죽었다.  1520년 3월 2200만명이 살던 멕시코에 스페인 소함대로 인해 퍼진 천연두는 12월까지 800만명을 죽게했고, 각종 다양한 전염병으로 인해 1580년에는 인구가 200만명 이하로 줄었다.
  •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가져온 독감, 결핵, 매독를 시작으로 75년간에 걸쳐 인구는 50만명에서 7만명으로 감소했다.
  • 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년 연합군 사이에서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5천만명~1억명을 죽게 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4년간 사망한 사람은 4천만명이었다.  
  • 20세기 후반에 의학은 예방접종, 항생제, 위생등을 통해 역병을 현저하게 극복했다.  20세기초까지 1/3에 달하던 유아 사망율은 5%이하로 선진국에서는 1% 이하로 줄었다.  1979년 천연두는 완전히 박멸되었다.  여전히 에이즈나 말라리아 등이 위협으로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암을 비롯한 비감염성 질환이나 단순한 노환으로 죽는다.
  • 전쟁도 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쟁은 드문 일이 되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15%에 달했던 폭력으로 인한 사망은 20세기에 5%, 21세기에 1%로 줄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 기업, 개인들이 미래를 생각할 때 전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물질적 기반 경제에서 지식 기반 경제로 변한것이 전쟁의 동기부여를 없앴다.  과거에 평화란 '일시적 전쟁부재 상태'였으나 지금은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여긴다.  여전히 평화롭지 않은 지역이 있으나 예외에 해당한다.
  • 테러도 예외에 속한다.  테러는 실질적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나약한 전략이다.  테러는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고 과잉반응을 유도하는 show가 본질이다.  마치 스스로 도자기를 부술 힘이 없는 파리가 황소를 도발해 대신 도자기 가게로 돌진하게 하는것과 비슷하다.
  • "기아, 역병, 전쟁"은 여전히 많은 희생자를 낼 것이지만, 이해도 통제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비극이 아닌, 우리의 능력으로 관리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난제가 되었다.


  • 역사는 공백이 없다.  인간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 인간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은 만족이 아닌 더 갈구하는 것이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전례없는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것이다.
  • 인간은 불멸에 진지하게 도전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생명권)은 이 시대의 지고한 가치이다.  죽음이 이 권리에 명백히 반하므로 죽음과 전면전을 치러야 마땅하다.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이념은 초월적인 존재를 신성시 했지 생명 그 자체를 신성시하지 않았고, 죽음에 꽤 관대했다.
  • 현대의 과학과 문화는 죽음을 형이상학적 신비나 인생의 의미가 아닌 해결해야할 기술적 문제로 본다.  과학자, 의사, 학자들의 대부분은 불멸에 대한 노골적인 꿈과 거리를 두고, 자신들은 그저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 Google 자회사인 Calico는 '죽음 해결하기'를 위해 설립되었다.  그들은 2050년에 몸이 건강하고 충분한 은행 잔고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단순한 질병 치료가 아닌 노화 조직을 재생하고 손, 눈, 뇌의 성능을 높이는 것으로 불멸을 시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PayPal 창업자 Peter Thiel은 영원히 사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고백했다.  
  • 불멸이 아니더라도 기대수명을 2배로 늘리는 것만으로도 인간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다.  수명이 150년이 된다면 40세에 결혼해도 결혼생활이 110년이다.  90세에도 자기계발을 해야할 것이다.  65세에 은퇴하지도, 신세대에 자리를 비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90년 더 통치할 푸틴, 그리고 여전히 소련과 중국을 통치하고 있을 137세의 스탈린, 123세의 마오쩌둥을 상상해보라.
  • 사실상 현대 의학은 자연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주어진 생을 온전히 누릴수 있는 업적을 이루었을 뿐이다.  불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생명이 신성하다는 믿음과, 과학계의 역학과,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가 결합하여 인류는 분명 죽음과의 전쟁에 달려들 것이다.
  • 우리의 예술적 창의성,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앙심은 상당 부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료를 얻는다.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에 대한 욕구는 예술, 이념, 종교를 거부하고 돌진할 것이다.
  • 인류에게 있어 최고선은 생명 자체가 아닌 행복이다.  내세를 의심할 때 인류는 불멸이 아닌 세속의 행복을 좇게 된다.  고대에 거부당했던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오늘날 모두가 동의하는 기본전제가 되었다.
  • 현대 사상가들은 행복추구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집단적 과제로 선언했다.  하지만 19~20세기에 국가가 생각하는 성공의 척도는 국민의 행복이 아닌 영토의 크기, 인구 증가, GDP 증대였다.  교육제도, 보건제도, 복지제도의 목표는 개인의 행복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전쟁을 수행하고 경제를 일으키고 세금을 내며 국가에 충성할 유능하고 건강한 구성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보장한 것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아닌 '추구할'권리였다.  
  • 지난 몇십년간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행복할 권리로 바뀌었다.  우리를 불만족하게 만드는 것은 기본권 침해이니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성공의 척도였던 GDP (Gross Domestic Product)를 GDH (Gross Domestic Happiness)로 보완 대체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 물질적 성취만으로는 만족이 오래가지 않는다.  돈, 명예,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면 비참해질 뿐이다.  높은 수준의 부, 안락, 안전을 누리는 선진국 자살률이 가난과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보다 높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GDP가 6배 늘고 실질 소득이 2배 커진 미국인의 주관적 행복은 여전히 같은 수준에 머물고, 실질 소득이 5배 늘은 일본인은 1950년과 같거나 불만족했다.
  • 행복의 유리천장은 심리적인 기둥과 생물학적 기둥에 의해 떠받쳐진다.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기대치에 달려 있고, 조건이 나아질수록 기대는 부푼다.  생물학적으로 볼때 기대와 행복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아닌 우리의 생화학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감각이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유쾌한 감각이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유쾌한 감각이 순식간에 불쾌한 감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기분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즘은 얼마 못 가고, 그런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더 많은 음식과 연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기대는 상승하고, 어제의 도전은 오늘의 일상이 된다.  어쩌면 행복은 흥분과 평안의 황금 배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스트레스와 따분함 사이에서 불만스럽게 살아간다.
  • 과학은 행복이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에 달려있다고 설명하고 그 기제를 조작했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50년전 꺼려했던 정신과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늘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 350만명의 어린이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치료약을 복용했다.  영국에서도 복용자가 15년간 8.5배 증가했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도 성적을 올리고 부모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복용한다.  이라크 주둔 미군 12%,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17%가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생화학적 행복 추구는 세계 최대 범죄 원인이기도 하다.  2009년 미국 연방 교도소 수감자의 반은 약물 관련자였고, 이탈리아에서는 38%가 마약 관련 범죄자, 영국에서는 55%가 마약 복용이나 관련 범죄자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62%는 범행 당시 마약을 복용한 상태였다.  
  • 에피쿠로스는 무절제한 쾌락추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부처는 쾌감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생화학적 해법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수도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뭐라든 자본주의에게 행복은 곧 쾌락이다.  매년 더 나은 진통제,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 더 편한 매트리스, 덜 지루한 게임을 계속 생산한다.  그럼에도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므로 쾌락을 영원히 지속하도록 몸과 마음을 재설계하려고 할 것이다.
  • 수천년간에 걸친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격변 속에서 단 하나의 상수가 있었는데 바로 인류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인류의 세번째 큰 과제는 신성(divinity) 획득이 될것이다.  불멸과 행복이 신의 특성이라서가 아니라, 노화와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물학적 기질을 신처럼 제어하고 성능을 upgrade해 신이 되려고 할것이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체 합성이 그 방법이다.  여기서 신은 성경의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그리스 신화나 힌두교의 특정한 초능력을 가진 천신을 말한다.
  • 유전자 조작 아기나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은 아직 멀었다고 말하지만,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해보다 훨씬 빠른 속도라서 '아직 멀었다'는 말은 20~50년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빠르게 돌진하고 있고, 죽음 뒤에 숨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때 흔한 반응은 누군가 브레이크를 밟아줄거라는 바램이다.
  • 그러나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다.  먼저 브레이크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가들도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뿐 흩어져 있는 모든 점을 연결해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둘째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게되면 경제와 사회가 무너질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는 무한성장이 필요하고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향상(upgrade)인지 명확한 선은 없다.  혈압 치료제였던 비아그라나 부상자들의 얼굴상처 치료였던 성형수술과 같이 유전공학도 시작은 치명적인 유전병 치료부터일 것이다.  선택과 대체 다음은 수선이다.  치명적이지 않은 자폐증, 둔함, 비만, 우울증으로 확대될 것이고 그 다음은 강한 면역체계, 평균보다 높은 기억력, 더 밝은 기질, 천재적인 예술가나 운동선수등으로 확산되어 결국 우리는 한발짝씩 유전자 아기 catalog를 집어드는 길로 들어설것이다.  모든 upgrade가 처음에는 치료를 이유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날 리 없다.  획기적인 기술이 일단 생기면 치료에만 한정하고 upgrade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나치의 우생학 운동이나 장기매매등과 같이 맞춤 아기도 제한될 수도 있다.  
  • 명확히 해두고 싶은 것은 첫째, 이런 것들이 개인이 아닌 인류가 집단으로 벌일 일이며 명백히 불공정한 것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래 왔다.  둘째, 이것은 역사에 대한 예측이지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셋째, 추구하는 것과 획득하는 것은 다르다.  시도를 할거라고 예측하지만 성공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넷째, 이 예측은 예언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선택들에 대한 논의의 한 방식이다.  인간의 발전 과정은 우리의 예측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 역시 용도폐기 된다.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을 인지시킴으로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역사는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는 않으나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이 책의 예측들은 현재의 딜레마에 대한 논의이며 미래를 바꿔보자는 제안이다.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 인류세 (人類世, The Anthropocene)


  • 다른 동물들과 관련해서 인간은 오래전 신이 되었으나 그다지 공정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은 신이라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기 싫어한다.  TV, 책, 판타지에는 야생의 동물들은  가득한데 현실에서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동물은 주로 인간과 가축들뿐이다.  지구상의 야생 늑대는 약 20만마리인데 개는 4억마리가 넘는다.  사자는 4만마리인데 집고양이는 6억 마리, 아프리카 물소는 90만마리인데 가축인 소는 15억 마리, 펭귄은 5천만 마리인데 닭은 200억 마리이다.  
  • 향후 100년안에 우리가 미칠 영향은 6500만년전 공룡을 없앤 소행성의 영향을 능가할 것이다.  사피엔스는 지구를 독립적인 생태구역으로 나누던 장벽을 깨뜨려 최초로 단일한 생태적 단위를 만들었다.  인간이 전 세계 동물을 거리나 지리와 무관하게 섞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형 동물 90%, 아메리카 대형 포유류의 75%, 지구 전체 대형 육상 포유류의 50%를 멸종시켰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몰랐을 뿐이다.
  • 농업혁명은 새로운 형태의 생물인 가축을 탄생시켰다.  가축들은 개체로는 좁은 우리, 뿔과 꼬리 제거, 새끼와의 결별 등의 엄청난 고통을 겪지만, 충분한 먹이와 예방접종과 재해로부터의 보호, 인공수정을 통해 종(種)으로는 계속 번식하고 있다.  
  • "알고리즘(algorithm)"은 오늘날 세계에서 단연코 중요한 개념이다.  알고리즘은 계산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론적 단계들이다.  지난 몇십년간 생물학자들은 사람 역시 알고리즘이라는 확고한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을 제어하는 알고리즘은 감각, 감정, 욕망이다.  같은 알고리즘이 다른 동물들도 제어한다.  몸이 계산을 하고 그 계산 결과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포함한 결정의 99%는 감각, 감정, 욕망이라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듯 보이는 감정 하나가 어미와 새끼간의 유대감인데, 육류업계와 낙농업계는 이 근본적 유대를 끊으면서 출발한다.  농부들은 유신론적 종교의 미명하에 이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유신론적 종교들은 위대한 신뿐 아니라 인간도 신성시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창조물 위에 군림할 권한을 창조주가 인간에게 부여했고 인간에게만 불멸의 영혼을 주었다고 했다.  신들은 인간과 생태계를 중재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이 흔했던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 가축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 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 이념은 호모 사피엔스가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고 우주의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현대의 농장주들은 유행병, 병원균, 항생제의 비밀을 해독한 과학기술 덕에 더 극단적인 공장식 환경에서 가축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3. 인간의 광휘 (The Human Spark)


  • 호모 사피엔스가 가장 강한 종(種)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종보다 높은 도적적 지위와 생명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면 더 강한 나라 국민의 생명은 더 가치있는가?  
  • 전통적인 일신교의 대답은 사피엔스만이 불멸의 영혼을 가진다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이 믿음은 여전히 우리의 법, 정치, 경제 제도의 중심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실험은 동물들에게서 영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뿐 아니라 사피엔스에게서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의심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과학적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진화의 기본 원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 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15%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신의 개입 없는 순수한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46%가 성경에 적힌 그대로 1만년 내의 어느 시점에 지금 형태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석박사의 29%만이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탄생을 믿는다.
  • 다윈은 우리에게서 영혼을 박탈했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것이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나눌수(divide)없다는 것이다.  따로 떨어진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물학적 실체들은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작은 부분들로 이뤄졌다.  분리되거나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자연선택을 통해 생겨날 수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실체는 단계적 진화를 통해 생길 수 없으므로, 진화론은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란 부분만은 진화되지 않고 완전체로 출현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영혼의 '영'자도 없는 부모에게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아기가 탄생하는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가 지닌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은 유전자이고, 유전자 분자는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돌연변이의 운반체이다.  
  • 인간의 우월성의 또 다른 근거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지닌다는 것이다.  마음은 감각과 욕망에 따른 고통, 쾌락, 분노, 사랑같은 주관적 경험의 흐름이다.  솔직히 마음과 의식에 관해 과학이 아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800억개가 넘는 뇌의 뉴런들의 전기화학적 반응을 통해  의식이 생기고, 마음의 경험들은 어떤 필수적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과 전류가 어떻게 고통, 분노, 사랑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문제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시킬 뿐이다. 주관적 체험을 통해 일어나는 뉴런의 반응 과정을 파악할수록 역설적이게도 의식적 느낌을 설명하기 여러워진다.  뇌를 이해할수록 마음이 불필요해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큰 빈틈이다.  
  • 뇌과학자들은 뉴런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작업공간'에서 의식의 융합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은유일뿐 어디에 있는지 왜 그런것이 필요한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주관적 경험을 포함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할까?  우리가 알기로는 없다.  우리가 창조한 데이터 처리 장치 가운데 어떤 것도 작동을 위해 주관적 경험이 필요하지 않고 고통, 쾌락, 분노,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의식은 뇌의 특정한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생물학적으로는 쓸모없는 부산물이라는 가설도 있다.
  • 우리는 악순환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신이 뭔가를 의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인간 의식의 특징을 찾을 수 있고, 그런 다음 그 특징들을 이용해 인간에게 실제로 의식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인공지능이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도 될까?  다른 사람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그저 추정할 뿐 확신할 수 없다.  과학적 정설에 따르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활동의 결과이고, 따라서 실제 세계와 구별이 불가능한 완전한 가상세계를 위조하는 것이 이론상으로 가능하다.
  • 다른 동물들이 마음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로 돌아가서, 2012년 신경생물학자들의 케임브리지 선언에 의하면,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의도적인 행동을 보이는 능력과 함께, 의식적 상태를 구성하는 신경해부학적, 신경화학적, 신경생리학적 기질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만이 의식을 생성하는 신경기질을 지닌 유일한 생물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 인간의 우월성의 또 다른 방어는 동물들이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인간과 달리 자의식 (sense of identity)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동물들이 보이는 복잡한 행동 양식, 역으로 인간들이 보이는 무의식적 알고리즘에 가까운 행동들로 상호 반론들이 있다.  
  • 대부분의 연구들은 인류가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된 과정에서 도구 제작과 지능이 중요한 자질이었다고 본다.  개개인의 지능과 도구 제작 능력은 종의 힘과의 직접적 관련성을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경이로운 위업들이 대규모 협력의 결과라면, 이것이 과연 인간 개개인을 숭배할 이유가 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추가로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하는 것이라서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하게 된다.  돈, 법, 신, 나라, 가치관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봄으로,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십자군을 비롯한 중세 가톨릭 교회가 가졌던 가치관, 그들과 싸웠던 이슬람의 가치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냉전과 같이 민주주의나 인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100년 뒤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The Storytellers)


  • 사피엔스들은 돈, 신, 국가, 기업에 관한 이야기를 초함해 3중 현실 속에 살아간다.  약 1만 2천년전 시작된 농업혁명은 상호주관적 연결에 필수적인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약 6천년전 생겨난 수메르의 도시에서 마치 오늘날 허구적 법적실체(법인)과 같이 신들이 논밭과 노예를 소유하고, 돈을 빌려주고받고, 봉급을 지급하고, 댐과 운하를 건설했다.  실은 신들이 아닌 사원의 성직자들이 관리한 것이었다. 이 사업들이 확장의 한계에 이르렀으나, 약 5천년전 문자와 돈이 발명되면서 그 장애가 사라졌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를 신의 대리인이 아닌 실제 신으로 여겼다.  실제의 파라오는 생물학적 몸, 필요, 욕망, 감정을 가졌었지만 실질적 통치자는 수백만 이집트인이 공유한 이야기들 속에 존재한 상상의 파라오였다.  수메르의 신들이 기업 상표와 같았다면 파라오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저스틴 비버등의 개인 상표와 같았다.  문자는 알고리즘을 짜듯 사회 전체를 조직할 수 있게 했다.  알고리즘의 이상에 따르면 당신의 운명은 시스템에 달려있지 누군가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 문자로만 기록된 허구적 실재로 인해 발생한 불행한 사건들이 역사 속에 넘치지만 일반적으로 효율적인 행정으로 인한 이점이 손해보다 많았다.  문자언어는 실제를 기술하기 적당한 방법으로 생겨났지만 서서히 실제를 고쳐쓰는 강력한 방식이 되었다.  공식 보고서가 객관적 실제와 충돌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은 대개 객관적 실체였다.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져,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해당 국가의 바람과 갈등을 반영하지 못하고, 와본 적도 없는 유럽 관료들에 의해 그어진 아프리카의 국경선들이 한 예이다.  산업시대에 공장과 정부 부처가 숫자언어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지고, 교육기관이 그 뒤를 따라 평점이라는 발명품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함으로 학생과 교사의 삶은 바뀌었다.
  • 허구가 협력의 목표를 결정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허구는 우리의 협력을 돕는다.  파라오가 통치하는 이집트는 당대 최강의 왕국이었으나 평범한 농부에게 그 힘은 병원과 사회보장이 아닌 세금과 강제노동을 의미했을 뿐이다.  인간 network의 역사를 검토할때 이따금 실제하는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는 것이 좋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뿐 목표나 잣대가 되서는 안된다.



5. 뜻밖의 한 쌍 (The Odd Couple)


  • 과학과 종교는 500년간 부부상담을 받고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남편과 아내 같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미신, 영성, 초자연적 힘 또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알고 있지만, 종교는 인간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추종자들은 싫어하겠지만 자유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근대 이념의 믿음체계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 종교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이다.  종교가 계약인 반면 영성은 여행이다.  종교가 세속적 질서를 굳건히 하려는 시도인 반면 영성은 그런 질서에서 도망치려는 시도이다.  영성은 종교에게 위협이다.  영적 여행이 사회 전체가 아닌 개인에게 적합한 외로운 길이기 때문에 역사적 관점에서 언제나 비극이다.
  • 과학자들이 진행하는 모든 실용적 과제는 종교적 통찰에 기대고 있다.  모든 종교 이야기들은 거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같은 윤리적 판단 (2) '인간의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 시작한다'같은 사실적 진술(factual statements) (3) '수태되고 단 하루가 지났어도 절대 낙태해서는 안된다'같은 윤리적판단+사실적 진술에서 얻은 실질적 지침.  과학은 사실만을 다루므로 종교의 윤리적 판단을 반박하거나 확증할 수 없지만, 종교는 윤리적 판단만 다루지 않고 사실적 진술도 하므로, 치열한 종교적 논쟁 그리고 과학과 종교간의 갈등의 다수는 윤리적 판단이 아닌 사실적 주장과 관련한 것들이다.
  • 윤리적 판단과 사실적 진술을 분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라는 윤리적 판단을 한 겹 벗기면 '모든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다'는 사실적 진술이 나타난다.  따라서 과학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해결은 무척 어려운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나 척도를 갖고있지 않다.
  • 종교적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과학사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세속주의와 관용이라는 가치와 연관시키지만, 과학혁명은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관용되는 카이로나 이스탄불이 아닌, 역사상 가장 교조적이고 불관용적이고 종교적 광신도들로 가득차고, 관용의 수준이 가장 낮은 런던과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 근대사는 인본주의라는 특정 종교와 과학간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근대의 계약 (The Modern Covenant)


  • 근대는 놀랄만큼 간단한 계약이다.  인간은 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 근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문화는 인간이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계획 안에서 한 역할을 맡는다고 믿었다.  이 계획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인간의 힘을 제약했다.  근대 이후 문화는 그런 우주적 계획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역할도 의미도 없다.  우리가 아는 과학 지식에 따르면 우주는 계획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 아무 의미없는 소음과 광기로 가득할 뿐이다.  어떤 결말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어떤 일들이 차례로 일어날 뿐이다.  목적을 믿지 않고 오직 원인만을 믿는다.
  • 근대라는 계약은 인간에게 굉장한 유혹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위협이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전능함을 거머쥘 수 있지만, 발 밑에는 완전한 무(無)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력적이고, 쉼 없이 조사하고, 발명하고, 발견하고, 성장하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의 어떤 문화보다 큰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린다.
  • 근대의 동력은 과학의 진보와 경제 성장의 동맹이다.  전근대의 자연 시스템은 평형상태이고 고정된 파이(pie)를 재분배하는 것이라서 한 쪽이 성공하면 다른 쪽이 손해보는 zero-sum 게임이었다.  근대 이후 사회는 성장하는 경제에 기반한 win-win 상황을 믿는다.  (1) 더 많이 생산하면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어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더 행복하게 산다 (2) 인류가 늘어나는 한 현재 수준 유지를 위해서도 성장이 필요하다 (3) 인구가 늘지 않고 중산층이 현재 수준에 만족해도 가난에 찌든 수억명을 위해서 성장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의 '더 많이'라는 교의는 거의 모든 종교, 이념, 시민운동이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각자 매우 다른 가치와 목표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나 모두 경제성장이 목표실현의 열쇠라고 믿는다.  경제성장이 세계 모든 곳에서 거의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다는 증거이다.
  • 경제성장을 위해 가족 간의 유대를 포기하고, 부모와 떨어져 살고, 지구 반대편에서 간병인을 수입해와도 어쩔수 없다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확고히 대답한다.  이 대답은 사실적 진술(factual statement)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을 포함한다.  경제성장이 가족의 유대보다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윤리적 판단을 내리면서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과학의 땅에서 종교의 땅으로 건너왔다.  저 세상의 파이를 약속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자본주의교(敎)는 지상의 기적을 약속한다.  
  • 체스 같은 전근대 게임은 정체된 경제를 기본 전제로 했는데, 현대의 보드게임, 컴퓨터 게임은 대부분 투자와 성장에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것이 마인 크래프트, 카탄의 개척자, 시드 마이어의 문명과 같은 문명건설 전략게임인데 소박한 초기 자산, 초기 소득 제공, 현명한 재투자의 순환에 대한 것이다.
  • '더 많이' 경제 성장은 계속 새로운 재료와 에너지원을 발견할 수 있어 가능했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되는 자원인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으로 새로운 형태의 자원을 발굴해왔다.  속도가 계속 빨라지므로 실수를 해도 되는 여지는 계속 줄어든다.  현시점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생태계 붕괴라는 인과응보일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인류는 그 재앙을 멈추는데 필요한 진지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희생을 할 의향이 없다.  
  • 역사에 정의는 없다.  재난 상황이 되면 그 비극이 부자때문에 초래된 것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고통을 당한다.  최상위 계층들은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최첨단 '노아의 방주'를 통해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상황을 계속 가속화함으로 인류와 지구 생태계 전체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현재의 경제성장을 둔화시켜 미래의 위협을 줄이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집세도 못 내는 사람들에게는 녹아내리는 만년설보다 자신의 마이너스 통장이 훨씬 더 큰 걱정거리이다.
  • 경제 붕괴와 생태계 붕괴를 다 막아해도 계속해서 더 많이 일하고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은 개개인에게 큰 스트레스와 긴장을 일으킨다.  근대는 평형 상태가 혼돈보다 더 무서우며, 탐욕은 성장의 원동력이요 선한 힘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었다.  모든 정부, 기업, 조직들이 성장의 관점에서 성공을 평가하고, 소득과 삶의 척도를 높여야 한다고 개인들을 세뇌한다.  인간은 탐욕에 쉽게 물들고 어제의 사치는 오늘의 필수품이 된다.  어디로 질주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탐욕과 혼돈의 시스템을 신성화했다.
  •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성공했고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했다.  근대 계약이 약속한 전례 없는 힘은 지금까지 지켜졌다.  그 계약은 우리가 힘을 얻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기를 기대한다.  이 계약대로라면 우리는 윤리, 미학, 동정이 없는 암흑 세계에 살고 있어야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대사회에 인류를 암흑세계로부터 구원한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닌 인본주의 였다.



7.  인본주의 혁명 (The Humanist Revolution)


  • 힘을 위해 의미를 버린 무의미하고 무법적인 존재에게 해독제를 제공한 것은 인본주의였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자신에게 충실해라, 자신을 믿어라,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라,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을 해라."  현대의 심리치료사는 자신의 견해를 환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고, 환자가 자기 마음 속의 가장 내밀한 방을 살펴 답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 인본주의 윤리에서는 외도처럼 인간의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이 가장 흥미로운 논의이다.  역으로 어떤 행동이던 어느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  
  •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개개인의 자유선택에서 정치권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개인의 선택은 내면의 감정을 참조해 그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의 모토는 윤리학에서 '좋게 느낀다면 해라', 정치학에서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 자유시장에서 고객은 항상 옳다.  유전자 조작때문에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와 닭이라도 모든 것은 고객이 얼마를 지불할 의향이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 제품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당신이 뭔데 그들에게 틀렸다고 말하겠는가?  
  • 교육제도 역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중세에는 순종, 주입, 암기, 전통에 촛점이 맞춰졌으나 현대는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가르친다.  중세 유럽에서 지식=성경x논리 였고, 과학혁명은 지식=경험적데이터x수학 이다.  그 새로운 공식은 여러 학문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이끌어낸 반면 큰 결점이 있는데 가치와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실질절 문제에는 수학적 분석을, 윤리적 문제에는 성경을 사용했다.  그런데 인본주의가 지식=경험x감수성 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제시했다.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현상이고, 감수성은 그런 주관적 현상에 주목하고 나에 대한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점진적 내적 변화 과정으로 본다.  역사상 인간의 감정, 욕망, 경험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긴 문화는 없었다.
  • 전근대 내러티브의 대부분은 외적 사건과 행동에 초점을 맞춘 영웅적 행위였다.  영웅들의 의미 있는 내적 변화 과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반면 현대의 소설, 영화, 시는 느낌과 내적 경험에 관한 것이다.  신, 황제, 장군이 주인공이었던 전쟁소설이 신병이나 일반병사의 감정을 주제로 한 전쟁영화로 바뀌었다.  
  • 인본주의는 3갈래로 나뉜다. (1) 정통파는 '자유 인본주의'로 독자적인 내적 목소리와 유일무이한 개인이 인간이며, 개인의 최대 자유가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인 간의 서로 상충하는 욕망의 충돌에 대해 자유주의는 답을 주지 못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절망과 이들을 받아들이는 독일인들의 불안, 투표결과를 승복하지 못하는 유권자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등이 그 예다.  (2)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내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내 행동이 타인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을 두기를 요구한다.  개인의 자아탐구는 팔자 좋은 부르주아의 악덕이고 자아탐구를 시도하면 자본주의의 이런저런 덫에 걸려든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아탐구를 대신할 정당과 노조와 같은 공동기구를 주장한다.  (3)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해 갈등은 자연선택의 원재료로 진화를 추동하는 좋은 것이다.  인류가 동물보다 우월하여 착취할 권한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월한 인간은 열등한 인간을 억압할 권리가 있다.  그들의 더 뛰어난 능력이 새로운 지식, 더 진보한 기술, 더 번영한 사회, 더 아름다운 예술로 나타나며 전쟁은 약자를 절멸시키고 강하고 야심찬 자에게 보상을 내리므로 가치있고 필수적이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히틀러와 나치같은 극단적 형태를 보이기도 했으나 근대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21세기에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 1914~1989년은 인본주의 세 분파 간의 종교전쟁이었다.  나치즘을 무찌른 공은 공산주의에게 돌아가야 한다.  붕괴한 유럽제국들은 대개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군사독재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1970년까지 대세였다.  사회주의의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자유민주주의의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보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했는데 이 불균형에서 NATO를 지켜준 것은 핵무기를 앞세운 상호확실파괴 전략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슈퍼마켓이 노동수용소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는 영리하고 겸손하게 사회주의와 파시스트에서 사상과 제도를 채택해 대중에게 교육, 건강, 복지를 약속했다.
  •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건강보험, 국민연금, 자유로운 학교를 가치있게 여긴다면 100년전 산업사회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통찰력과 해법에 감사해야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신기술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개념을 확산해 정치구조, 사회적위계, gender관계까지도 바꿨으며 힘의 피라미드를 뒤집고 혁명가들에게 탄약을 제공했다.  이런 사회적, 윤리적 개혁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행정 시스템, 문서보관, 일정표, 데이터 처리기법, 선진농법, 경영, 시계, 대학설립등 경제적, 기술적 진보및 창조를 도맡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와 유신론 종교들은 교회를 추월한 20세기의 발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맞서야할지만을 고민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권위의 원천으로 계속 성경을 이용하므로 진보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창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자신들의 윤리적 태도를 지지할 수 있는 금언, 비유, 결정을 찾아내는게 주력하고 이런 생각이 마치 성경에서 유래한 것처럼 말한다.
  • 자유주의가 이긴 것도 맞고 현재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공 그 자체에 파멸의 불씨가 들어었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자유주의 과제들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세계관에 내재된 결함과 고객,유권자의 무분별함을 은연중에 폭로할 것이다.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8. 실험실의 시한폭탄 (The Time Bomb in the Laboratory)


  • 오늘날 세계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가 지배한다.  개인의 자유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닌 사실적 진술(factual statement)인데, 생명과학의 최신 연구결과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이 모순은 불편해서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중요한 문제이다.
  •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 속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고 그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 뿐임을 알아냈다.  결정론과 무작위성이 케이크를 모두 나눠갖고 '자유'에는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이다.
  • 사람들은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자유가 있다고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결정과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은 애초에 자신의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느냐이다.  순간적 느낌이건, 오랫동안의 진지한 추론과 합리적 숙고에 기초한 것이던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뇌영상은 사람의 욕망과 결정을 본인이 의식하기도 전에 예측할 수 있다.  뉴런 발화의 패턴을 연구해 리모콘으로 쥐를 조종하는 실험, 인간 뇌의 적소를 자극해 사랑, 분노, 두려움, 우울같은 감정을 일으키거나 없애는 실험, 경두개 자극 헬멧을 통해 차원이 다른 마치 영적인 경험같은 것을 만드는 실험등은 약물, 유전공학, 뇌자극을 통해 자유의지가 없는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대뇌반구의 연구에 의하면 좌뇌와 우뇌가 인간의 의사를 각각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결론내린다.  행동경제학자들의 결론 역시 의사 결정은 단일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내적 실체들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나온 것이었다.  사실적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은 하되 사실의 일부인 중요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의 평균에 의존해 결론을 내리는 '이야기하는 자아'간의 상충됨이 여러 실험을 통해 보고되었다.  
  • 머지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 도구, 구조의 홍수를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인권이 과연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9. 중대한 분리 (The Great Decoupling)


  •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는 개인의 가치와 자유의지의 선택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3가지 상황이 이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것이다.  (1) 인간은 경제적, 군사적 쓸모를 잃게 되어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것이다 (2)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가치는 여전히 발견할테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는 그렇지 않다 (3) 일부 upgrade된 새로운 일부 엘리트 집단에게서만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 자유주의가 지배적 이념이 된 것은 오류 없는 철학적 논증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가 단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이다.  권리에 위해 고취된 동기와 진취적 정신이 전쟁터나 공장에서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사적 경제적 가치를 잃을 것이다.  비의식적이면서 높은 지능, 경험을 뛰어 넘는 효율성, 예측 가능하고 실수하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자동화는 군인, 운전사, 은행원, 여행사, 증권사를 이미 위협하고 있고 변호사, 판사, 경찰, 의사, 약사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 산업혁명 이후로도 기계화가 대량실업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 능력인 육체 능력과 인지 능력중, 기계가 육체 능력을 대체하더라도 인간은 더 잘하는 인지 능력을 늘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뛰어넘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한 유기체는 유기적 알고리즘의 집합이다.  계산만 정확하다면 비유기적 알고리즘이 절대 하지 못하거나 더 뛰어난 일을 유기적 알고리즘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얼마전까지 비유기적 알고리즘이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던 얼굴 인식, 체스, 바둑등은 기계 학습을 통한 인공지능에 의해 정복되었고, 스포츠팀 선발, 트럭운전, 인력및 투자 관리, 심지어는 예술 창작도 대신하고 있다.
  •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계급이 될 것 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고 사회의 번영, 힘, 영광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그래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쓸모없는 대중을 먹이고 부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에 몰입하고 만족할까?  약물과 컴퓨터 게임이나 3D 가상현실 세계에서 가짜 경험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들이 뭐가 신성한가?
  • 자유주의가 직면한 두번째 위협은 시스템이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거라는 점이다.  시스템이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인간대신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것이고, 개인들에게서 권한과 자유를 박탈할 것이다.  자유주의의 믿음은 나만이 나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인데, 생명과학은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완벽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실수를 덜 하는 알고리즘이면 나에 대한 더 많은 결정과 선택을 맡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보다 우리를 위해 유익한 결정을 내려줄 것이고 그 조언을 따르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의학에 관한 한 우리는 이미 이 선을 넘었다.  유전자 분석에 따른 암, 심장마비, 알츠하이머의 예방, 이메일 검색을 통한 독감경보 발령등은 알고리즘에 의한 결정과 선택이다.  
  • 모든 과정은 단지 확률일 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알고리즘이 옳은 결정을 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권한을 넘겨줄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데이터베이스는 커질것이고, 통계는 더 정확해질 것이고, 알고리즘은 더 개선될 것이다.  그 시스템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만 하면 그날로 자유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아는 신탁이 되면, 그 다음에는 대리인으로 진화하고 마침내 주권자로 진화할 것이다.  Google, Facebook, Waze, Cortana, Apple Siri, Amazon Kindle같은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동안 우리에 대한 자료를 계속 수집하고 있다.  맞춤 의학, 교육, 엔터테인먼트의 제공은 나를 분해하고 감시하고 해독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개인은 종교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 세번째 위협은 해독불가능한 소규모 특권집단이다.  자유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경험의 평등이 아닌 다른 경험에 대한 평등한 가치의 부여이다.  20세기 의학은 대중의 병 치료라는 평등적 목표였으나 21세기 의학은 건강의 upgrade 이며 이것은 일부 개인들에게 우위를 제공하려는  엘리트주의적 목표이다.



10. 의식의 바다 (The Ocean of Consciousness)


  •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생할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이고,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 둘로 나뉠것이다.
  • 기술 인본주의는 기술을 통해 창조되는 훨씬 우수한 인간모델 (호모 데우스)로 두번째 인지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새로운 영역에 접근하고 은하계의 주인이 될거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진화론적 인본주의가 1세기전 선택적 육종과 인종청소를 통해 창조하려했던 초인간의 꿈을 유전공학, 나노 기술, 뇌/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루려는 것이다.
  •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upgrade해 새로운 경험과 의식상태에 접근하려는 것인데, 우리는 마음에 대해 잘 모른다.  게다가 지난 백년동안 심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연구한 대상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로 WEIRD(서구의 많이 배우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적인) 사회 구성원들에 국한되어왔다.  이 새로운 영토에 대한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몸과 뇌의 upgrade는 혹 성공한다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어 인간을 downgrade할 것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반면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의 생산 말이다.  확고한 결정과 빠른 해법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의심과 모순으로 가득한 인생보다 더 빈곤하고 얄팍할 것이다.  
  • 기술 진보는 우리의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마음이 없어 그 목소리를 통제하기 원한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목소리를 죽이고 어떤 목소리를 증폭할지 어떻게 결정할까?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를 재설계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의지를 모든 의미와 원천이라고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술 인본주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봉착하며, 더 과감한 기술종교는 인본주의의 탯줄을 아예 끊으려 한다.  그렇다면 욕망과 경험을 대신할 권위의 원천은 무엇이 될까?  단 하나의 후보는 바로 정보이다.



11. 데이터교 (The Data Religion)


  •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지고 어떤 것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진화론에 기반해 유기체를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보는 생명과학과 점점 더 정교한 전자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컴퓨터 과학자들의 합류이다.  데이터교는 이 둘을 합치면서 똑같은 수학적 법칙들이 두 알고리즘에 적용된다고 지적하면서, 동물과 기계의 장벽을 허물 것으로 본다.  경제란 욕망과 능력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해 그것을 결정으로 전환하는 메카니즘이다.  그렇게 보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통제 공산주의는 경쟁관계의 이념, 윤리, 제도가 아닌 경쟁관계의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멀티 프로세서, 공산주의는 중앙 단일 프로세서이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기술변화의 가속 시대에 분산식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의 데이터 처리 조건이 다시 바뀌면 민주주의는 몰락하거나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 현재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비대한 정부관료 조직이 사이버 규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동안 인터넷은 열번쯤 이미 변신했을 것이다.  정부는 밀려드는 데이터로 뭘 해야할지 몰라, 계속해서 어설프게 일을 망치고 있다.  미국은 마치 포커 게임에서 상대가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번번이 지는 사람 같다.  전통적인 민주정치는 중요한 사건들을 제어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유의미한 비전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슬픈 진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데이터교도 시작은 가치중립적 과학이론이었으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화하고 있다.  지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우주의 어느 한 부분도 생명의 거대한 웹과 연결이 끊겨서는 안된다.  가장 큰 죄악은 데이터 흐름의 차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의 자유가 중요하한데, 오래된 자유주의와는 달리, 정보의 자유는 인간이 아닌 정보 자체에 주어진다.  이것은 정보의 자유가 가져오는 막대한 이점때문에 우리가 사생활을 단념할 때 가능한 것이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이것이 새로운 모토이다.
  • 이미 점점 많은 예술과 과학창조물이 모든 사람의 협업으로 생산된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세계정치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종자'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이 알고리즘은 성장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따라 인간이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으로, 그리고 어떤 인간도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 데이터교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인본주의적이지도 않지만, 인간의 경험에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그 경험 자체에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데이터교는 인간의 경험을 데이터 패턴으로 여김으로 권위와 의미의 원천을 파괴하고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우리가 만물 인터넷을 만들려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고 강하게 해줄거라는 기대때문인데, 실제로 운용되면 우리는 엔지니어에서 칩으로, 그 다음에는 데이터로 전락하여 데이터 급류에 휩쓸려 흩어질 것이다.
  • 데이터교의 교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긴급한 정치적, 경제적 과제이다.  생명을 데이터 처리와 의사결정 과정으로 이해할 때 놓치는 것은 없을까?  우주에는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의식적 지능이 그보다 우월한 비의식적 알고리즘으로 대체되면 혹시 잃는 것이 생기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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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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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ㄷ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1.06 06:35 신고

    우와~~ 잘 읽었습니다.

    • 더가까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8.01.06 16:53 신고

      제 블로그를 꾸준히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복된 새해 되세요 ^_^
      동부에 엄청난 한파가 몰아닥쳤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혹한속에서 담아낼 예술사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호모 데우스 - 서평


사피엔스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에 이어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가 쓴 책이다. 


첫번째 책 사피엔스는 선사(先史時代, prehistory)시대에서 현대까지 벌어진 인류 역사에 대한 개론이었고, 이번 책 호모 데우스는 18~20세기에 벌어진 일들을 기초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추정(extrapolate, project)한다.  평소 Sci-Fi 영화나 최근 기술동향에 관심이 많이 있었다면 예로 드는 것들이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 인문학적 입장에서의 문제와 우려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 인권, 평등,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한 예견이다.


하라리는 그 근거로 현대인 대다수가 신봉하는 과학/진화론과 인본주의간의 상호모순적인 갈등을 지적하는데, 마치 토론 진행자인듯 무덤덤하게 돌직구로 핵심을 찌른다.  그래서 이 책은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듯하다.


근대 이전 문화는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계획 안에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의 존엄과 의미를 믿어왔다.  다윈의 진화론은 신의 존재와 개입이 허구이며 과학과 상반된다는 방향전환을 일으켰고, 이후로 인류는 과학의 진보와 경제 성장의 동맹을 통한 무한한 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신본주의를 대체한 인본주의가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자유, 인권, 평등, 민주는 현대 인류가 보편적으로 신성시하는 개념이다.


많은 현대인은 과학/진화론인본주의를 아무런 갈등 없이 동시에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은 두가지는 양립할 수 없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인본주의의 근본 사상은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유일신 사상의 그리스도교에 그 뿌리를 둔다.  신본주의를 버린 현대인의 자유, 인권, 평등, 민주는 그 근거를 이미 오래전에 상실한 것이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것이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나눌수(divide)없다는 것이다.  따로 떨어진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물학적 실체들은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작은 부분들로 이뤄졌다.  분리되거나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자연선택을 통해 생겨날 수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실체는 단계적 진화를 통해 생길 수 없으므로, 진화론은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란 부분만은 진화되지 않고 완전체로 출현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영혼의 '영'자도 없는 부모에게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아기가 탄생하는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 속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고 그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 뿐임을 알아냈다.  결정론과 무작위성이 케이크를 모두 나눠갖고 '자유'에는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바로 진화론이다.


현대에 이르러 드디어 "기아, 역병, 전쟁"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준으로 만든 인류가 앞으로 추구할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텐데, 이것을 주도할 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세계관에 내재된 결함을 폭로함으로 현대인이 신봉하는 자유, 인권, 평등, 민주의 가치를 말살할 것이다.


수도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뭐라든 자본주의에게 행복은 곧 쾌락이다.  매년 더 나은 진통제,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 더 편한 매트리스, 덜 지루한 게임을 계속 생산한다.  그럼에도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므로 쾌락을 영원히 지속하도록 몸과 마음을 재설계하려고 할 것이다.  모든 정부, 기업, 조직들이 성장의 관점에서 성공을 평가하고, 소득과 삶의 척도를 높여야 한다고 개인들을 세뇌한다.  인간은 탐욕에 쉽게 물들고 어제의 사치는 오늘의 필수품이 된다.  어디로 질주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탐욕과 혼돈의 시스템을 신성화했다.  근대 이후의 '더 많이'라는 교의는 거의 모든 종교, 이념, 시민운동이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각자 매우 다른 가치와 목표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나 모두 경제성장이 목표실현의 열쇠라고 믿는다.  경제성장이 세계 모든 곳에서 거의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다는 증거이다.  성장에 기여하지 않는 개인의 가치는 급속히 상실될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로도 기계화가 대량실업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 능력인 육체 능력과 인지 능력중, 기계가 육체 능력을 대체하더라도 인간은 더 잘하는 인지 능력을 늘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뛰어넘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계급이 될 것 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고 사회의 번영, 힘, 영광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그래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쓸모없는 대중을 먹이고 부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에 몰입하고 만족할까?  약물과 컴퓨터 게임이나 3D 가상현실 세계에서 가짜 경험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들이 뭐가 신성한가?


하라리는 이 책이 단지 예측이지 예언이 아니며, 이 예측에 반응해 미래가 바뀌기 원해 던지는 선택을 위한 논의의 한 방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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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내용 요약


제1부 인지혁명


  • 전형적인 진화론의 입장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솔로엔시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호모 데니소바,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등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인류 종들을 나열하고 끝으로 현존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를 소개한다.
  • 저자는 나열한 여러 종들이 직선적인 진화의 단일 계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공존했던 것이라고 주장한 후 왜 그럼 지금은 사피엔스 만이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인지혁명이란 유일하게 사피엔스에게만 등장했다고 믿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저자는 진화론자이므로 이 인지혁명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로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 덕이었다고 믿는 학설을 따른다.  인지혁명은 집단 개체수 150이라는 한계를 유일하게 뛰어넘어 공동목적을 공유하는 대규모 집단을 가능케 했다. 
  • 당시 사피엔스들은 수렵채집(hunt & collect)을 통해 생존했다.
  •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동물들이 멸종했는데, 발굴된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 시기들이 사피엔스가 그곳에 정착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 같아 보인다. (사피엔스가 호주에 진출한지 몇천년 사이에 50Kg이상되는 24종 가운데 23종 멸종.  4천년전 멸종한 북극해 랭겔섬의 매머드, 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2천년 이내에 북미에서는 47속 중 34속, 남미에서는 60속 중 50속 멸종, 약 1500년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갑자기 사라진 코끼리새와 자이언트 여우원숭이 등)



제2부 농업혁명


  • 현대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 이상은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 등에서 얻어진다.
  •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은 BC 9500~8500사이에 세계 각 지역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저자는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가 정착, 식량공급 증가, 출산 증가등을 얻었지만, 결과로 얻은 삶의 실상이 아마도 더 바쁘고 여유 없는 일과, 밀집된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 증가, 흉년과 자연재해시 더 높은 기아의 확률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에 동의한다.
  • 농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목축은 오늘날 각각 10억 마리의 양/돼지/소 그리고 무려 250억 마리의 닭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었는데, 개체수와는 역으로 이 가축들은 자연수명의 1/50 정도에 불과한 삶을 살고 도살 당한다.  저자는 "숫적인 진화적 성공(?)과 개체 고통간의 괴리"가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본다. 
  • 농경을 중심으로 커진 사회는 지배자와 엘리트를 출현시켰고 이들이 농부로부터 가져간 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소수의 이야기들 뿐이다.
  • 농업혁명 이후 생물학적 협력본능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도시와 국가와 제국 규모의 협력망을 가능케 했던 두가지는 "상상의 질서 창조"와 "문자체계의 고안"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보의 양은 문자의 발명과 검색기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많은 쓰기 체계가 독자적으로 발달했지만 수메르, 이집트, 고대 중국, 잉카 제국은 문자기록의 보관및 검색 기술면에서 뛰어났었기에 지금까지도 가치가 남아있는 것이다.
  • 저자는 "상상의 질서"가 "공통의 신화"로 이루어진 것인데 BC 1776년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과 AD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신화"의 예로 들며, 서로 상반된 내용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라고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함무라비 법전은 불평등한 위계질서를, 독립선언문은 평등과 자유라는 것을 진리화 한다.
  • 역사를 살펴보면 다양한 차별 (자유민과 노예, 인종, 부자와 가난한 자)이 존재했고 각 사회의 엘리트들은 그 차별이 타당한 합리성과 객관적 능력차이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며 사회의 필요한 위계질서라고 종교적 과학적인 신화를 만들어 주장해왔다.  하지만 신분, 인종에 따른 근본적 능력차는 증명된 바가 없고 대부분의 부와 빈곤은 그저 세습된 것일뿐이라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타고난 능력의 차이도 물론 한몫 하지만 대부분의 재능은 육성과 개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정도의 차이일뿐 대규모 사회 중 차별을 완벽히 없앤 곳은 아직까지 없었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입법은 불평등한 기회와 관습으로 뿌리를 내려 법이 철폐된 후에도 사회적 편견으로 자리를 잡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미국의 흑인 문제이다.



제3부 인류의 통합



    • 인간의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고 단순한 문화들이 점차 뭉쳐 더 크고 복잡한 문화로 변한 것이 방향성이었다.  
    • 지난 몇세기간 모든 문화는 서로간의 영향으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고유문화가 하나도 없다.


    •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보편적 질서를 통한 지구적 통일 과정이 BC 1세기 이후로 진행되어 왔는데 그 보편적 질서는 바로 "돈"이다.  돈은 물질적 실체가 아닌 심리적 구조물이다.  각 나라의 크게 다른 문화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들 금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다른 두 지역이 무역으로 연결되는 순간 수요와 공급의 힘에 의해 점차 가치가 평준화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하는 반면 돈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 돈은 지역 전통, 친밀한 관계, 인간의 가치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해왔다.  "돈으로 사거나 팔려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한 믿음은 돈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았으며 공동체와 가족에 관련된 것 조차 결국 돈에 팔려버린 수많은 예가 있다.


    제국

    • 우리는 약자가 이기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  수많은 소수 문화는 제국의 군대에 희생되어 왔고, 그래서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제국의 후예들이다.
    • 오늘날 '제국주의자'라는 말은 정치적 욕설이지만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 바로 제국이었다.    제국은 더 강한 외부의 침공이나 내부 분열로 무너지기 전까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부였고 붕괴된 제국은 새로운 제국으로 이어졌다.
    • 제국의 일반적 수단은 전쟁, 노예화, 국외 추방, 대량학살이다.  이런 암울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철학, 예술, 사법제도, 자선등 인류문화 성취의 대부분이 제국이 분배한 정복과 착취의 이익을 기초로 얻어진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 제국은 수많은 작은 문화를 융합해 몇 개의 큰 문화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표준화가 황제에게 대단히 유용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유혈사태를 포함한 모든 행위가 피정복자에게 더 큰 이익이 되는 우월한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의 집행, 도시 계획, 도량형 표준등 그 이득이 현저한 것도 있었고, 세금, 징집, 황제 숭배등 의문스러운 것도 있었다.
    • 제국은 복속시킨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였다.  인도의 경우처럼 끝까지 동등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로마 제국, 아랍 제국, 중국 제국과 같이 동등함을 이룬 경우도 있었다.
    • 21세기 들어 민족주의는 급속하게 입지를 잃고 있다.  특정국적의 사람이 아닌 인류전체의 인권과 인류 전체의 이익이 중요한 것이라면 2백개의 독립국가보다는 단일 세계정부가 더 간단하기 때문이다.

    종교
    •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였다.  종교가 맡은 핵심적 역할은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 대부분의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가 여러신들의 배후에 있는 최고권력 (전능한 힘, 단 하나의 원리)을 인정했다.  일신교(一神敎, monotheism)와 구별되는 점은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아, 인간의 평범한 삶에 개의치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부분적 권력을 가진 신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 로마인들은 피정복 민족들의 신들을 관용했다.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관용을 거부했던 유일한 신은 일신교적이고 개종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신이었다.  기독교 신앙 분파의 첫 리더 중 하나였던 바울은 만일 우주의 최고 권력이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수고롭게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화신하셔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면 이것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이므로 예수에 대한 좋은 말씀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바울의 주장은 비옥한 땅에 씨를 뿌렸다.
    • 하지만 다신교 내에서 애니미즘이 계속 살아남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신교 내에서 다신교 역시 살아남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신교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신교들은 요란한 팡파르를 울리면서 대문으로 잡신들을 내쫗고서는 창문을 통해 이들을 다시 끌어들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성자들로 구성된 나름의 만신전을 발달시켰는데, 이것은 다신교의 만신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기독교 성인들은 옛 다신교의 신과 단순히 닮기만 한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신들이 변장한 경우도 흔했다.

    인본주의
    • 지난 300년간 유신론적 종교들이 중요성을 점점 잃어가면서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들과 같은 자연법칙 종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종교라고 불리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라고 칭하지만,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다는 면에서 종교와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다.  이런 것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성시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 설명하기가 몹시 어려워진다.
    •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이들은 개별 인간이 아닌 전체를 신성하게 보며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나치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키는 것이었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것, 이 우월한 인종을 보호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1933년 당시 서구 엘리트 대부분이 갖고 있던 믿음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무덤뿐 아니라 인종차별주의 전반의 무덤을 팠다.  이후 인종차별주의는 서구에서 신뢰받지 못했다.  나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다.  나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약자를 원조함으로써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생존을 허용할 뿐 아니라 번식할 기회를 주어 자연선택을 약화시켰다고 했다.  히틀러와의 전쟁이 끝난 후 60년간, 인본주의를 진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금기였다.  
    •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백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인간의 신성한 내적 본성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제4부 과학혁명


    수학
    •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가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 어떤 전통 지식보다 더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 현대과학에는 도그마가 없지만 공통적인 연구기법이 있는데, 경험적 관찰들을 모은 뒤 수학적 도구의 도움을 받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관찰들을 연결하는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때 과거 전통에서는 이야기를 써서 이론을 꾸며냈지만, 현대과학은 수학을 사용한다.
    • 1744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 2명이 목사 미망인과 고아를 위한 생명보험기금을 만들었는데 그들은 야코프 베르누이의 "큰 수의 법칙"을 비롯한 당시 통계와 확률분석법을 동원해 목사 사망 통계에 따른 보험비와 수령액을 결정했고다.  이 기금은 현재 자산가치가 1천억 파운드(100 billion) 가 넘는 세계 최대의 연금및 보험회사가 되었다.
    • 정밀과학을 향하는 흐름은 대세이고, 정밀하다는 말의 정의는 수학적 도구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제 통계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뿐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의 기초 필수 과목이 되었다.
    • 과학자들은 100% 정확한 이론이 없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진리인가의 여부가 아닌 "유용성"이 시금석이 되었다.

    과학과 자본주의
    •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까지만 해도 전쟁의 승패는 조직적 병참과 전략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과학의 산물이다.  세계의 군대는 인류의 과학연구와 기술개발의 대부분을 선도하고, 자금을 대고, 방향을 조종한다.
    • 많은 과학자들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행동한다.  그러나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 1750년까지는 지중해의 오토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위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중국의 명/청왕조등 세계경제의 80%를 차지하는 아시아의 황금시대였다.
    • 그후 유럽인들이 점차 세를 확장해 1900년에는 세계 경제와 대부분의 땅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1950년 서유럽과 미국을 합친 생산량은 전세계의 50%가 넘었고 중국은 5%로 줄어들었다.
    • 그러나 당시 기술 격차는 크지 않았다.  아시아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적 발명이 아닌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것들을 영국과 이미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유럽이 300년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였다.  "현대 과학"이 추구한 것은 '빈 공간이 많은 세계지도'에서 암시되는 새로운 발견을 향한 탐험과 관찰의 자세였고 이것은 탐험과 정복의 야망으로 이어져 식민지 개척을 향한 무한한 욕심을 낳았다.

    과학과 제국주의
    • 정복당한 원주민들에게 식민지는 지상의 지옥이었다.  원주민 대부분이 열악한 환경과 정복자를 통해 들어온 전염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첫 항해 27년 후 멕시코에 들어간 550명의 스페인 군대는 수백만명의 아즈텍인들을 4년만에 인종청소했다.  카리브해의 원주민들은 20여년만에 완전히 사라졌고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 빈 자리를 수입한 아프리카인 노예들도 채웠다.  10년 후에는 168명이 페루로 가서 잉카제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10만 여명의 민간 영국인들은 3억명의 인도인들을 2세기 동안 지배, 억압, 착취했다.
    • 제국에 축적된 새로운 지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이롭게 하고 이들에게 의료, 교육, 철로, 운하, 정의, 번영등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래서 제국주의자들은 거대한 착취사업이 아닌 타인종을 위한 이타적 프로젝트이자 '백인의 짐(burden)'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간단히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
    •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이런 기여가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역으로 제국의 지원이 없었더면 근대 과학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신용과 자본주의
    • 근대 경제사를 알기 위한 유일한 단어는 '성장(growth)'이다.
    • 오늘날 은행은 보유액의 10배까지 빌려주는 것이 허용된다.  즉 모든 예금의 90%는 실제 화폐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금주들이 갑자기 전액 인출을 요구하면 은행은 즉시 파산하게 된다.  대출금에 의존한 모든 기업은 이처럼 상상된 미래의 신뢰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시스템은 "신용"이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재화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해서 생긴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부의 총량이 더 줄지는 않더라도 한정되어 있다고 봤다.  즉 파이는 정해져 있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것이다.  신용은 "오늘의 파이와 내일의 파이 간의 차이"다.  진보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리적 발견, 기술적 발명, 조직의 발전이 인간의 생산, 무역, 부의 총량을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
    •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핵심은 "이윤은 재투자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며,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이 그 기초가 되었다.  "자본"과 "부"는 다르다.  "자본"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을 말하며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되는 것이다.
    • 중세 귀족들은 관대함과 과시적 소비라는 윤리를 신봉하며 "부"를 누렸고 근대 엘리트는 사치성 소비가 아닌 투자에 몰두하며 "자본"을 늘렸다.  자본주의의 핵심 신조는 "경제성장"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이다.
    • 근대과학은 자본의 투자를 받아 발전했고, 자본은 과학발달을 통해 경제를 성장 시키는 사이클로 계속 이어져왔다.  최근 몇년간 정부와 은행은 미친듯이 돈을 찍어 내어 값싼 신용을 시스템에 집어넣고 있다.  그러면서 경제거품이 터지기 전에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가 어찌해서든 뭔가 큰 건수를 올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만약 연구실들이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 애초에 신용시스템을 만든 것이 유럽 제국주의였다.  왕과 정부에 세금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투자를 하라고 하면 모두가 기꺼이 한다.  1484년 콜롬부스는 새 무역로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고 아메리카 정복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림으로써 자본주의 마법의 순환의 시초가 되었다.  신용대출은 새 발견을 위한 자금을 공급했고, 발견은 식민지로 이어졌고, 식민지는 수익을 제공했으며, 수익은 신뢰는 만들어냈고, 신뢰는 더 많은 신용대출로 바뀌었다.  이어서 유럽인들은 잠재적 투자자의 숫자를 늘리고 자신들이 발생시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 1568년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 군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후 80년간에 걸쳐 독립뿐 아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함대를 완전히 몰아내고 세계 해양항로의 주인이자 유럽 최고 부자나라로 등극했는데, 그 성공의 비결은 역시 신용에 있었다.  스페인 왕이 신뢰를 갉아먹는 동안 네덜란드인들은 어김없는 부채변제, 사법제도의 독립, 사유재산권 보호를 통해 신용을 쌓아 암스테르담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대륙 금융의 메카로 급성장 시켰다.
    • 네덜란드 제국을 세운 것은 국가가 아닌 상인들이었다.  당시 유럽 주요 도시 대부분에 주식거래소가 설립되었는데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주식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그 시기에는 민간회사가 대포, 함선을 구매하고 군대를 고용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로 진출했고 결국 인도네시아 대부분이 이 회사의 식민지가 되어 200여년간 통치를 받았으며, 그후 네덜란드 국가로 인계되어 150년간을 더 통치받았다.  이러한 근대 초기 역사는 기업이 이익을 무한히 추구하게 놔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말해준다.
    •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반대편인 대서양으로 진출했다.  미국 허드슨강 입구에 후에 뉴욕으로 개명한 뉴암스테르담이란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이 때 원주민들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wall)이 지금의 Wall Street가 있는 곳이다.
    • 17세기말부터 네덜란드가 쇠퇴하면서 생긴 공백을 놓고 프랑스와 영국이 경쟁을 벌였는데, 영국이 금융제도의 신뢰를 잘 쌓아올린 반면, 프랑스는 "미시시피 버블"이라는 사상 최악의 금융붕괴를 겪으며 신용을 잃었다.  "미시시피 버블"은 1717년 루이 15세 당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가 사장인 미시시피사가 아메리카에 뉴올리언즈 시를 건설하면서 엄청나게 부풀린 장밋빛 선전과 정치적 연줄로 투자가들을 끌어모아 2년사이에 주식이 200배나 뛴 후에, 폭락한 사건이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중앙은행이 주식을 구매했지만 역부족이되자 화폐를 추가 발행했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아 결국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중앙은행과 재무성은 돈은 없고 무가치한 주식만 보유하게 되었다.  손자 루이 16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을때에는 프랑스의 연간 예산 절반이 대출금 이자지불금이었고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다.
    • 프랑스 해외 제국이 무너지는동안 급속히 팽창한 대영제국 역시 대체로 런던 주식거래소에 기반을 둔 민간 주식회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었다.  인도 아대륙을 정복한 것도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병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35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군대를 유지하며 막강한 인도 제국을 약 1백년간 지배했다.
    • 식민지의 국유화가 이루어졌지만,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 사장과 대주주들의 이익을 국가가 지켜주었다.  가장 악명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간의 제1차 아편전쟁이다.  수많은 마약 중독자를 보다 못한 중국이 마약 거래를 금지하자 마약 회사 주식을 보유한 영국의 의원들과 각료들이 압력을 넣어 영국 정부는 '자유 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였고 승리해 1997년까지 홍콩을 통치하며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가 마약 중독자였다.
    • 오늘날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말한다.  그래서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자본주의의 위험
    • 열렬한 자본주의자는 자본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지만 역으로 정치가 자본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최대의 경제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정부가 가능한 한 일을 적게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믿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도둑들과 사기꾼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시장을 적절히 규율하지 않으면 신뢰의 상실, 신용의 축소,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1719년 미시시피 버블과 2007년 미국 주택시장 버블의 결과는 이에 대한 교훈이다.
    •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론상 완벽한 논리같지만, 현실에서 자본가들은 독점을 할 수도 있고 노동자 탄압을 할 수 도 있다.  근대 초기 유럽 자본주의의 부흥은 대서양 노예 무역과 함께 일어났는데 이 책임은 인종차별이 아닌 고삐 풀린 시장에 있었다.  유럽은 아메리카를 정복한 뒤 금광, 은광을 개발하고 농장을 건설했다.  농장에서 노동집약적 일을 할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 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해서 16~19세기간 약 1천만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수입되었고 이중 70%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는데 대부분은 노예는 짧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유럽인들의 달콤한 홍차, 캔디, 케이크, 쿠키등의 폭발적인 수요와 그에 따른 막대한 이윤을 위해 자행된 일이었다.  노예무역은 정부나 국가에서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았다.
    •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될 때 이것은 쉽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경영자들은 아프리카인이나 인도네시아인이나 인도인의 고통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어도,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노예무역을 막기 위해 설립된 비중부 인도주의 기구는 이윤추구 목적의 기업으로 변했고, 고무 산업 육성을 위한 고무 채집에 휩쓸려 콩고 인구의 20~33%가 학살 당했다.

    에너지와 원자재
    • 경제성장에는 에너지와 원자재가 필요하다.  만일 이것들이 고갈되는 때가 온다면, 전체 시스템은 붕괴할 것이다.
    • 산업혁명은 화약, 증기기관, 내연기관, 전기등 한 에너지의 유형을 다른 유형으로 바꾸는 것에 있었다.  몇 십년마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발견되었고 에너지의 총량은 계속 늘었다.  그리고 에너지 전환의 과정에서 원자재 부족도 함께 해결되었다.
    • 산업혁명은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와 원자재라는 전대미문의 조합을 통해 폭발적인 생산성의 증가를 초래했는데 그 성장은 트랙터를 이용한 농사, 냉장고/선박/항공기를 이용한 저장과 수송, 좁은축사/사료/약품을 이용한 축산등 2차 농업혁명으로 나타났다.  현대의 동물산업 역시 악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윤추구의 방법으로 생겨나 일반인의 무관심 속에 커진것이다.  기계화된 농작물 재배와 산업적 가축사육은 현대 사회경제 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은 고작 2%의 농가에서 생산한 것으로 먹고도 남아 수출까지 한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속에 살았기에 금욕윤리와 검약이 중요한 윤리였다.  그러나 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과 그에따른 소비량을 늘려야만 한다.  파국을 막기위해 "소비지상주의"라는 새로운 윤리가 등장했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 오늘날 세상에 남아 있는 기린은 8만 마리, 소는 15억 마리; 늑대는 20만 마리, 개는 4억 머리, 침팬지는 25만 마리, 사람은 70억 명이다.  생태계 파괴는 자원 희소성의 문제가 아니다.  미래의 사피엔스는 필요한 원자재와 에너지를 확보하되 그 과정에 자연서식지를 파괴하고 대부분의 종을 멸종시킬지 모른다.

    표준시간과 개인주의
    • 현대 산업은 정밀성과 획일성을 신성시한다. 산업혁명은 거의 모든 인간 활동의 틀을 시간표와 조립라인으로 변화시켰다.  시간표 체계가 확산된 결정적 고리는 대중교통이었다.  편차가 큰 지역시간별로 출발시간만을 명시한 마차 시간표에서 시작되어 상업용 열차가 운행되면서 영국 열차회사들이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계에 맞추기로 정한 것이 표준시의 출발점 되었다. 
    • 산업혁명 이전의 일상은 핵가족, 확장된 가족, 지역 공동체라는 틀 숙에서 이루어졌다.  가족과 공동체에 속해 사는 삶은 꼭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가족과 공동체의 억압은 오늘날 국가와 시장의 그것보다 덜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와 시장은 점점 큰 권력을 가졌고 가족과 공통체의 결속력은 약화되었다.  가족 간의 유혈 복수는 경찰과 법원이 대체했으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의사와 이익을 옹호하게 되었고 부모의 권위는 완전히 후퇴하였다.  기존의 가족 공동체가 죽은 후 생긴 감정적 공백을 국가와 시장은 각각 "국민"과 "소비 공동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 채웠다.  돈/유한회사/인권과 마찬가지로 국민과 소비 공동체 역시 거짓말이 아닌 상호 주관적 실체이다.
    •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질서"는 안정성과 연속성을 의미했지만 지난 2세간의 너무도 빠른 변화속도로 인해 이제 사회 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으로 바뀌었다.  전통질서 수호나 황금 시대로의 회귀가 아닌 구세대를 파괴하고 더 나은 것을 건설하겠다는 약속이 주를 이루는 사회가 된 것이다.

    평화의 시대
    • 그러나 현대사는 전에 없던 수준의 폭력과 공포만의 시기가 아니라 같은 수준의 평화와 평온의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70년은 특히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이 원인이었는데 국가의 등장으로 폭력은 감소했다.  심지어 가혹한 독재정권 아래일지라도 타인의 손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훨씬 낮아졌다.  무엇보다 국가 간의 폭력이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45년 지구의 1/4을 지배하던 영국은 비교적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제국에서 은퇴했다.  프랑스도 부분적으로는 유혈사태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화롭게 철수함으로 현지에 안정적인 국가들을 남겼다.  1989년 소련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지도하에 역사상 유례 없이 신속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공산주의가 파산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힘을 포기하고 실패를 인정했다.  1945년 이래 UN의 승인을 받은 독립국가 중 정복 당해 사라진 나라는 없다.  아프리카는 많은 분쟁이 있었지만 대부분 내전과 쿠테타였다.  
    • 전쟁이 거의 사라진 이유는 (1) 전쟁의 댓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이젠 큰 전쟁은 인류의 집단 자살일 뿐이다 (2) 전쟁의 비용은 치솟았고 그 이익은 작아졌다.  과거의 부는 물질적인 것이라 전쟁을 통해 약탈하고 점령할 수 있었으나 현대의 부는 인적자본과 조직이라 무력 정복이 불가능해졌다.  아직 남아있는 국제적 전면전은 유전과 같은 구식 재화에 관련된 것이다.  대외 교역과 투자가 매우 중요한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오히려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3) 세계정치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의 독립성을 약화시켜 일방적인 전면전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행복
    • 과학과 산업혁명 덕에 인류는 초인적 힘과 실질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이것은 사람이 역사를 향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잘 아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 행복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정의는 '내 삶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 만족감'인데 몇가지 발견된 내용들은 (1)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만이며 그 정도를 넘어서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2) 질병이 행복감을 낮추지만 단기적이다.  점차 악화되거나 지속적인 고통이 없다면 행복감은 회복된다 (3) 가족과 공동체는 돈과 건강보다 행복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행복은 부/건강/공동체등 객관적 조건 자체보다는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기대"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행복은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수가 존재하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람, 전사, 성자, 예술가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이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 세계의 생물학자들은 지적설계(창조론) 운동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과거에 대해서는 생물학자들이 옳지만 미래에 대해서라면 역설적으로 지적설계 옹호자들이 맞을지 모른다.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대체하는 일이 활발히 진행중인데, 첫째가 생명공학, 둘째가 사이보그공학, 셋째가 비유기물공학이다.
    • 현대는 이미 생물학적 족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중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지만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예방과 치료가 아닌 인간 능력의 강화에 의학이 몰두한다면, 죽음을 넘어서는 불멸을 위한 과학에 몰두한다면 그 혜택은 모든 인간에게 돌아갈까 아니면 초인간 엘리트 족속을 낳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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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피엔스 - 서평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가 쓴 책으로 원제는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이다.


    부제처럼 선사(先史時代, prehistory)시대에서 현대까지 벌어진 인류 역사에 대한 개론을 아주 간략하게(? 600여 페이지) 다루었다.


    무신론자이고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쓴 책에 나같은 기독교 환자(患者)가 전적으로 동의할리가 없는데도 일독을 추천하는 이유는, 통상 책들이 연역적(deductive)으로 특정 학파의 이론을 주장하려는것에 반해 저자 하라리는 나름 귀납적(inductive)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동서양을 오가면서 벌어진 일 중에서 시대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어 인류역사에 대한 나름의 거시적 시각을 보여주려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라리가 뽑은 사건들의 중요성이라던가, 각 사건들의 의미가 학계에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것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개론적인 책들은 지나친 단순화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보자들에게는 충분한 유익을 주곤 한다.  이 책의 경우 옹호론자와 반대론자들의 입장들과 상호반론들이 나름 잘 대조되며 소개되기 때문에 해석의 부분에 대한 여지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주고 있다고 보며, 기원 후의 역사 특히 중세~현대까지의 역사 정리만으로도 나와 같은 역사의 문외한들에게는 꽤 유익한 책이라고 보여진다.


    저자 하라리는 인류 역사 전체를 그렇게 훑어 보고난 후, 사람이 역사를 향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며, 지난 5세기간에 걸쳐 엄청난 혁명의 시기를 지난 인류는 전대미문의 부를 누리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의 풍요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평균 40~50시간 일하며, 개발도상국에선 평균 60시간, 심지어 80시간씩 일한다. 이에 비해 지구상 가장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수렵채집인, 예컨대 칼라하리 사막 사람들은 주 평균 35~45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흘에 한 번밖에 사냥에 나서지 않으며, 채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 3~6시간에 불과하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 일해도 무리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무생물적 비유기물공학"을 소개함으로 역사의 다음부분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서론을 던진다.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과 생각들을 통해서 많은 매체에서 다루었고 고민해 온 주제이다.  개인적으로는 은하철도 999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과 같은 만화 영화들이 오히려 시기적으로는 한발 앞선 고민거리를 이미 던져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이 부분은 최근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는 저자의 다음 저서 Homo Deus에서 좀 자세히 다룰것 같긴 한데, 다른 사람들의 기존 고민들에 비해 얼마나 차별화된 내용일지 조만간에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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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ㄷ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5.17 15:48 신고

      요즘 목사님들과 함께 읽고 있는 책인데, 이신전심? ^^

    God is Fair and Just



    We keep on questioning Him: "Why did You make me with this body, instead of that one?"  “Why are so many people dying of starvation?” “Why are there so many planets with nothing living on them?” “Why is my family so messed up?” “Why don’t You make Yourself more obvious to the people who need You?”


    우리는 그 분께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제 몸을 저렇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만드셨나요?” “왜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죠?” “왜 아무것도 살지 않는 별들이 그렇게 많나요?” “왜 제 가족은 이렇게 엉망진창이죠?” “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좀 더 분명하게 보이시지 않는거죠?”


    The answer to each of these questions is simply this: because He’s God.  He has more of a right to ask us why so many people are starving.  As much as we want God to explain Himself to us.  His creation, we are in no place to demand that He give an account to us.


    이런 질문 각각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이렇습니다 — 왜냐하면 그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그 분은 왜 수 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실 권리를 더 가지십니다. 우리에게 설명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지요.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are regarded as nothing.  He does as he pleases with the powers of heaven and the people of the earth.  No one can hold back his hand or say to him: “What have you done?” (Daniel 4:35)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뜻대로 행하시니 그의 뜻을 거역하거나 그가 행하시는 일을 물어 볼 자가 아무도 없구나 (다니엘 4:35)


    Can you worship a God who isn’t obligated to explain His actions to you?  Could it be your arrogance that makes you think God owes you an explanation?   Do you really believe that compared to God,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are regarded as nothing,” including you?


    당신에게 행하시는 일을 설명하실 의무가 없는 하나님을 당신은 예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오만함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지는 않는가요? 하나님과 비교할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고 정말로 믿나요?


    One definition of justice is “reward and/or penalty as deserved.”  If what we truly deserved were up to us, we would end up with as many different answers as people who responded.  But it isn’t up to us, mostly because none of us are good.


    공의(정의,공폄함)의 한 정의는 “마땅한대로 상주거나 벌함”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정말 마땅한 바가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대답한 사람 수 만큼 다른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중 아무도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God is the only Being who is good, and the standards are set by Him.  Because God hates sin, He has to punish those guilty of sin.  Maybe that’s not an appealing standard.  But to put it bluntly, when you get your own universe, you can make your own standards.  When we disagree, let’s not assume it’s His reasoning that needs correction.


    하나님 만이 유일하게 선하신 존재이시고, 기준이 그 분에 의해 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범죄한 사람들을 벌하셔야만 합니다.  이건 아마도 매력적인 기준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말해, 당신이 당신 자신의 우주를 소유하고 있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의 기준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을 때, 정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 그 분의 논리라고는 가정하지 마십시다.


    It takes a lot for us to comprehend God’s total hatred for sin.  We make excuses like, “Yes, I am prideful at times, but everyone struggles with pride.”  However, God says in Proverbs 8:13, “I hate pride and arrogance.”  You and I are not allowed to tell Him how much He can hate it.  He can hate and punish it as severely as His justice demands.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혐오를 이해 하는 것은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예, 저는 때때로 자만해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만과 씨름을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언 8장 13절에 “나는 자만와 오만을 싫어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만 미워하시라고 말하는 것이 당신과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그 분의 공의가 요구하는만큼 혹독하게 그것을 싫어하고 벌하실 수 있습니다.


    God never excuses sin.  And He is always consistent with that ethic.  Whenever, we start to question whether God really hates sin, we have only to think of the cross, where His Son was tortured, mocked, and beaten because of sin. Our sin.


    하나님은 죄를 결코 이해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 윤리에 있어 늘 한결 같으십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지 우리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 분의 아들께서 죄, 우리의 죄 때문에, 고문 당하시고, 조롱당하시고, 매맞으신 십자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No question about it: God hates and must punish sin.  And He is totally just and fair in doing so.


    이에 대해서는 질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벌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데에 있어 그 분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고 공평하십니다.


    from “Crazy Love” by Francis 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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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volutionism & Post-Modernism



    현대 진화론은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가 1858년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에서 자연 선택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출발하였다. 이 이론은 다윈이 1859년 출판한 책 《종의 기원》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다.   
    이 진화론은 post-modernism의 뿌리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1890년 이전, 미국에서는 1935년 이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인이든 대부분 동일한 전제들에 입각하여 살았다. 즉 그들은 고전적 반정립의 기초에 따라 사고했는데 그들은 만일 어떤 것이 참이라면, 그 반대편은 거짓이라는 명제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A는 A이다”와 “만일 당신이 A를 견지한다면 그것은 비(非)A가 아니다”와 같은 이 간단한 공식은 고전논리학의 제일차적 명제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것을 믿으시오 그것은 진리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들이 “글쎄요,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그 반대편은 거짓이겠죠.”라고 말할 것이다.  반정립의 전제가 사람들의 전체적인 정신적 관점에서 채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가 반정립의 기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 없이는 역사적 기독교는 무의미하다. 기초적 반정립은 하나님은 자신의 비존재와 대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고전적 반정립의 방법론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진리의 개념을 변화시켰고 거기서 현대인이 탄생했다.

    절망의 선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놓은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었다. 헤겔 이전 시대에는 진리는 항상 정립(thesis)/반정립(antithesis)의 기초 위에서 생각되었다. 헤겔은 전통적 사상의 직선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삼각형으로 대체시켰다 반정립 대신 우리는 현대인의 진리에 대한 접근법으로서 종합(synthesis)을 갖게 되었다.

    from Francis Schaeffer 著 “거기 계시는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

    헤겔은 단순한 하나의 철학적 답변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한계와 지식의 타당성을 다루는 인식론과 우리가 진리와 인식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인 방법론에서 게임의 규칙을변경시켰다.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반정립에 따라 사고하지 말자. 오히려 종합이라는 답변을 가지는 원리에 따라 사고하자.” 

    방법론이 변화되었다. 즉 그들이 도달하는 또는 도달하려고 하는 진정한 방법, 다시 말해 진리가 변하였다. 이제 진리로서 진리는 사라지고 그 상대주의와 더불어 종합(양쪽 다 진리라는) 이 지배한다. 

    from Francis Schaeffer 著 “이성에서의 도피” (Escape from the 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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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ch Country and Poor Country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by Loren Cunningham


    열대의 뜨거운 태양이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 위에 쏟아진다.  그들은 결혼식장이나 교회에 가는 사람처럼 잘 차려입었다.


    가끔 문이 철커덕 열리면서 한 사람 또는 한 쌍의 부부가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밖으로 새어 나온다.  남은 사람들은 힘든 표정으로 문밖에 서서 얼굴의 땀을 닦아 낸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타이른다.


    대부분 해가 뜨기 전부터 기다린 사람들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담을 따라 이어진 줄은 더욱 길어진다.  그러나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좋은 나라로 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이민을 지원할 순서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오늘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 다시 올 것이고 내일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다음 날 다시 올 것이다.  어떤 어려움도 그들의 노력을 막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과 자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다.  그러나 쿠바, 수단, 인도 대사관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런가?  이처럼 나라간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50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늘 절망에 빠져 있으며, 국민들이 잠재력을 발휘하기 못하는지 그 원인을 발견했다.  우리가 악의 삼위일체라고 부른 탐욕, 부정부패, 불의가 바로 그 원인이다.  그 세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의 삶의 방식,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 인간의 책임에 어긋난다.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세 가지 악을 보았다.  그렇다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부패했으며 불의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특징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다.  만일 권력을 지닌 사람 중 상당수가 탐욕스럽다면 거기서 뇌물수수와 독직 같은 부정부패가 발생하고 결국 큰 불의가 따른다.[중략]


    아무리 불의한 정부 관리라도 사업가와 국민이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부정을 저지를 수 없다.[중략] 

    국민이 하나님 말씀을 떠날 때 국가는 망한다.  같은 원칙이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탐욕 대신 후하게 베푸는 나라, 정의로운 정부를 세우는 나라는 부와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왜 가난한가요?"  이것은 내가 서아프리카 베냉의 대통령과 각료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받은 질문이다.  케레쿠 대통령은 베냉의 독재자였다.  그는 공산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다.  그는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과 친했고, 국가의 모델을 찾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케레쿠는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낫다고 판단했고, 국민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국민들이 직접 다음 지도자를 선택하라."


    베넹 국민은 자유 투표를 통해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케레쿠는 권력을 잃었다.


    4년 후 케레쿠는 예수님을 영접했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극단적인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이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에 베냉국민은 그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았다.


    케레쿠는 대리인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지도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그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나 부두교를 믿었는데, 그는 그런 상황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는 장관과 차관 모임에서 연설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고, 나는 기꺼이 그 부탁에 응했다. [중략]


    나는 케레쿠와 그의 내각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양심적이고 성품이 바른 국민이 많이 필요합니다.  베냉 국민의 상당수가 그런 성품을 지닐 때 베냉은 번영할 것입니다." [중략]


    진정한 베냉의 변화는, 다른 나라에게 그러했듯, 더 많은 개인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한 세대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나라도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중략]


    몇 명만 정직하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많은 사람들이 정직해야 한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출처]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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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ity and Diversity (통일성과 다양성)


    by Loren Cunningham


    국제 예수전도단의 설립자인 Loren Cunningham은 현재까지 238개의 주권국을 포함한 400개 이상의 국가와 속령, 섬을 방문하여 세계 모든 국가를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 인정받았다.  5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부터 국가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렇게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나라들이 바뀌는 모습을 관찰하고 체험하며 얻은 교훈을 담아 책을 썼다.



    사람들은 기독교권과 비기독교권 간의 기술적 지식의 불균형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중략] 중국은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에 똑똑한 사람의 수도 더 많을 것이다.  인도, 러시아, 중동에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 인도, 러시아, 중동으로 가는 젊은 서양인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  나는 경쟁심이나 교만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 의사, 전문인들의 '두뇌 유출'은 왜 발생하는가?  왜 그들은 자신의 문화, 종교, 조국을 떠나 낯선 나라로 가는가?  자유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를 얻기 위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지에 도착하면 그곳에 모스크와 신전을 짓는다.  그들은 자신이 찾는 자유와 기회가 바로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 법학부 행정학 교수인 마리아노 그론도나는 1600년 이전에는 서양에도 동양에도 선진국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처럼 "종교개혁은 세계 최초로 북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발생한 경제 개발의 원인"이었다.  그는 오늘날 개신교 국가의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종교적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중략]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인격을 가지신다'는 주제는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여기서 열방을 바꾸기 위한 중요 개념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개념이다. [중략]


    기독교 유산을 물려받은 나라는 비록 제한된 지식이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들은 질서와 자유의 균형을 잡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갖추고 있다.  통일성과 다양성의 개념은 그들에게 축복이다.  하나님과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 개념에 근거한 사회에서 살 때는 유익을 얻는다.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들은 쉐퍼 박사가 '열매의 열매의 열매'라고 부른 이전 세대의 신앙의 유익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삼권이 분리된 민주정부, 개인의 자유, 생산성 높은 경제 등을 여전히 즐기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세기 전에 세워 놓은 사회의 기초 덕분에 지금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중략]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신(알라)를 믿는다.  그것은 다양성 없는 통일성이다.  반면 힌두교에는 수백만의 신이 있는데, 이것은 통일성 없는 다양성이다. [중략]


    왜 이슬람에서는 훌륭한 기술이 나오지 않을까?  이슬람에도 다른 지역만큼이나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다.  그들은 편협한 사고, 율법주의, 엄격한 위계질서에 묶여 발전하지 못했다... [중략]  유럽이 암흑시대일 때, 이슬람 도시는 교육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관이 지닌 한계 때문에 그들은 정체했고, 세계에서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중략]


    오늘날 서구국가의 자유와 번영은 다양성 속의 통일성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구국가로 가서 그 축복을 함께 누리기를 원한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내가 힌두교도였다면 나 역시 내 자녀가 서구국가에 가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 불교,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서구국가에 가서 신전과 사찰, 모스크를 짓고 자신의 종교를 퍼뜨린다면, 자유사회이기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자신이 찾은 것을 파괴하는 자들이 되고 만다.


    [출처]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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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ㄷ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04.29 18:40 신고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요... ;)
      사물을 단순화시킨 것 같다는 생각도 좀 들고... ;)
      - 대가를 몰라보는 문외한의 소견 -

      그나저나, 사진에 대한 글은 언제 나오나요?
      재능을 살려주세요~~~

    Risk of 'Syncretism'

    '혼합주의'의 위험


    by Charles H. Kraft (Fuller 신학교 세계선교 대학원 인류학 교수)



    혼합주의는 기독교적 가정들과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세계관의 전제들이 혼합되어, 그 결과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기독교 의식들을 마술로 여기면서 행하거나 성경말씀을 주술처럼 사용해서 사람에게 마법을 걸거나 인도에서처럼 예수님을 단지 그들의 신 중 하나로 간주하거나 남미에서처럼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이교 점술과 마술을 행하거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의 문화를 버리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때 언제나 혼합주의가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미국적 생활양식'을 성경적 기독교와 같은 것으로 보거나 믿음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압박해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에서 동성애를 분명하게 정죄하고 있음에도 사랑과 관용으로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동성간 결혼까지도 그냥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혼합주의적이며 비성경적 기독교다.


    이러한 혼합주의에 이르는 길은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믿음에 대한 외국 표현들을 수입해서 수용자들이 자기의 세계관 가정들 속에서 그러한 외래 관행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결과 일종의 '토착 문화에 물든' 기독교 혹은 남미에서처럼 '기독교적 이교'가 생겨난다.  특히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사람들이 소위 '기독교적' 의식을 행하거나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면 선교사들과 같은 의미로 그러한 것들을 사용할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이 혼합주의의 함정에 빠져 들었다.


    혼합주의로 이르는 또 다른 길은 수용자들이 기독교를 실천하는 것에 너무 간섭한 나머지 표면적 차원의 실제 모습과 심층적 차원의 전제들이 외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선교지 문화에 적합하게 순응되지 못한 완전히 외래적인 기독교가 나타나게 되고, 이에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외래 형태에 맞추어 표헌하고 실천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새신자들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무시되고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특별한 세계관의 전제들을 개발하게 된다.... [중략]



    선의를 갖고 도입한 좋은 변화 역시 표면적 차원에만 적용될 뿐 변화 대상에게 깊은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심각한 세계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교사가 한 명 이상의 아내가 있는 아프리카인에게 아내 한 명만 남기고서 나머지 아내들과 이혼해야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요구한다면, 이는 아프리카인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세계관의 전제들을 심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프리카 사회의 진정한 지도자들을 반대하신다.  하나님은 여자들이 집안일 돕는 사람들을 두거나,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백인들처럼 남자들이 한 아내에게만 매이기 원하신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혼, 사회적 무책임, 심지어 매춘은 찬성하신다'는 전제가 형성될 수 있다.  그들 관점으로는 이러한 결론이 비합리적이거나 터무니 없는 것이 전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각 남편이 한 아내만 두기 원하시지만, 이러한 변화는 너무 조급하게 강요된 것이다.  이러한 강요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여러세대에 걸쳐 이 관습을 제거하신 것과는 다르다.


    [출처] "Culture, Worldview and Contextu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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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xtualized (Appropriate) Christianity

    상황화된 (적절한) 기독교


    by Charles H. Kraft (Fuller 신학교 세계선교 대학원 인류학 교수)



    교회가 사람들 삶에 '문화화되는' 과정을 과거에는 '토착화'라고 했으나 지금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 라는 말을 더 널리 사용한다.


    기독교 상황화는 신약성경 기록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도들은 아람어와 아람 문화로 전달된 기독교 메시지를 헬라어권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상황화 과정을 겪었다.  사도들은 헬라어 사용자에 적합하게 기독교를 상황화하고자, 기독교 진리는 수용자들 사고 유형에 맞추어 표현했다.  하나님, 교회, 죄, 회심, 회개, 입교, 말씀(로고스) 등과 같은 주제와 그 밖의 대부분 그리스도인 삶과 관습 영역을 다루기 위해 토착 단어와 개념을 사용하고 그 용례를 바꾸었다....  [중략] 사도행전 10장이나 15장 같은 본문을 보면서, 성경적인 기독교는 역사상 모든 시점에서 모든 언어와 문화에 '다시 성육신(incarnation)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성경적으로 기독교 상황화는 단순히 유럽이나 미국에서 단번에 그리고 영구적으로 개발된 결과물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초기 사도들이 겪었던 과정을 답습하는 것이다.  한 사회에서 성장한 기독교라는 나무를 새로운 문화 환경에 옮겨 심었을 때, 그 나무의 잎사귀와 가지, 열매를 전해준 사회의 산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복음은 씨앗으로 심겨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문화적 토양 안에서 싹을 틔우고 그곳의 비와 영양분으로 자라나야 한다.  땅 위에서 봤을 때, 참된 복음의 씨앗에서 나온 싹들은 그것을 전해 준 사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하지만 땅 밑, 곧 세계관 차원에서 보면 뿌리가 같고 생명의 근원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메시지 형태와 그 메시지에서 다루는 많은 주제 중에서 상대적으로 무엇이 더 부각되는가 하는 것은 사회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 맞게 상황화된 기독교는 가족관계, 두려움, 악한 영, 춤, 정해진 제의의 옹호 등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미국 기독교보다 더 초점을 모으게 될 것이다.


    [출처] "Culture, Worldview and Contextu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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