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emptive Analogy (구속적 유사) - 발췌
Redemptive Analogy (구속적 유사)
Don Richardson (World Team 선교회 대표)
사위(Sawi)족 ‘화해의 아이’
나와 내 아내는 사위족이 배신을 미덕으로 존중한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받았다. 그들에게는 가룟 유다가 복음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사위 문화 중에는 화평을 이루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 아버지가 원수처럼 싸워 온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 중 하나를 주어 키우도록 맡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아이를 ‘화해의 아이’라고 불렀다.
다말(Damail)족과 하이(Hai)
1세기도 채 안되는 과거에 이리안자야(지금의 파푸아)의 다말족은 석기 시대를 살고 있었다. 다말족에게는 하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하이’란 오랫동안 기다리던 황금시대, 곧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이제 서로 억압하지 않으며, 질병도 거의 없는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다말족 용어였다. 다말족 지도자인 무구멘데이는 하이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렸다. 죽기 전에 그는 자기 아들 뎀을 옆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얘야, 내 생전에는 하이가 오지 않았구나. 이제 네가 하이가 오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네가 죽기 전에는 하이가 올 것 같구나.”
다니(Dani)족과 나벨란 카벨란 (Nabelan-Kabelan)
다말족을 지배하던 오만한 다니족이 다말족 마을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다말족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소망이 성취되어 기뻐한다는 소식을 들은 다니족은 정말 놀랐다. 그들 역시 나벨란 카벨란이라고 부르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언젠가 영원한 생명이 인류에게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었다.
아스맛(Asmat)족과 ‘새로운 탄생’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은 이라안자야의 석기 시대 부족인 아스맛족에게서 발견되는 구석적 유사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전쟁을 하던 두 마을이 서로 평화를 약속할 때, 두 마을 출신의 수많은 남녀가 늘어서서 만든 상징적인 탄생의 통로를 마을 아이들이 통과하게 했다. 그 통로를 따라 지나간 아이들은 적이었던 마을의 친족으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파차큐텍(Pachacutec)과 비라코차(Viracocha)
파차큐텍은 주후 1400~1448년 사이에 살았던 잉카 왕이었다. 그는 또 신세계 최초 고산 휴양지였을 ‘마추픽추’를 설계하고 건설한 사업가였다. 파차큐텍과 그 동족들은 해를 숭배했는데, 그것을 잉티(Inti)라고 불렀다. 하지만 파차큐텍 잉티가 과연 숭배할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티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파차큐텍은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언젠가 찬양한 적이 있는 한 이름을 기억해 냈다. 비라코차! 그의 아버지에 따르면 비라코차는 모든 만물을 창조한 바로 그 신이었다.
켈트족 선교사들이 북유렵의 앵글로색슨족에게 사역할 때, 참 신을 나타내는 유대식 이름이나 헬라식 이름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Gott’, ‘God’, ‘Gut’같은 앵글로 색슨어를 사용했다.
1828년 미국 침례교 선교사 조지와 사라보드먼 부부는 남부 미얀마 카렌족이 야훼와 유사한 야와(Y’wa)라는 위대한 신이 자기 조상들에게 오래전에 신성한 책 한 권을 주었다고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악하고 무지한 조상들은 그 책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져 온 카렌 전통에 따르면, 어느 날 하얀 형제가 그 잃어버린 책을 다시 찾아주고 야와와 다시 친교를 누리게 해줄 것이었다. 이 오래된 이야기는 그 형제가 팔에 검은 물체를 끼고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1857년 노르웨이 루터교 선교사인 라스 스크레프스루드는 인도의 수많은 산탈(Santal)족 사람들이 자기 조상들이 참된 하나님인 타쿨 지우 (Takur Jiu)를 거부한 데 대해 매우 애석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40년에 수단 내지 선교회 앨버트 브란트는 에디오피아의 수많은 게데오(Gedeo) 족 사람들이 창조주 ‘마가노’ (Magano)가 언젠가 특정한 무화과 나무 아래에 기지를 만들 메신저를 보낼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칭하는 아랍어 이름 알라를 엘로힘의 동의어로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도네시아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라’를 사용하고 있고, 여호화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로 ‘뚜한 알라’ (Tuhan Allah)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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