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의식 (Last Rituals) - 서평
대체로 그러겠지만... 잘 썼다 싶은 책에 관해서 서평을 써왔다. 괜찮으니 한번 읽어 보라고... 그런데 이번 서평은 정 반대로 쓴다. 몹시 실망했으니 사 볼 필요 없을것 같다고...
미리 말하건대, 내 평이 그렇다는 거다. 영국과 덴마크에서 상도 받았다고 하고, 인터넷 서점에서의 평점도 괜찮아 보인다. 그러니 다수의 사람이 잘 썼다고 생각하나보다. 내가 별난거겠지...
눈 내리는 어느 날 아이슬란드 대학에서 발생한 참혹한 살인 사건에 관한 소설이다. 살해된 사람은 이 대학의 역사학과 석사 과정에 있는 하랄트 건틀립이란 독일인 유학생. 사건 발생 3일 만에 경찰은 평소 피살자와 자주 어울리면서 마약을 공급해온 후에 토리손이란 친구를 용의자로 체포하고 피살자의 혈흔을 비롯한 증거도 확보를 하면서 조속히 종결된다.
한달이 조금 지난 어느날 주인공인 여변호사 토라 구드문즈도티르에게 피살자의 어머니인 아멜리아 건틀립이 전화로 사건 전면 재조사를 의뢰하면서 사건은 구체적으로 풀어 헤쳐지기 시작한다. 피살자의 건틀립 가문은 독일의 저명하고 부유한 명문가였다. 해 맑고 잘 생긴 소년 시절의 사진과는 달리 청년 하랄트 건틀립은 중세 마녀 사냥, 흑마술, 변태적 성행위에 심취하여 마약, 문란한 성생활, 신체변형등의 기괴한 삶으로 가득차 있었다.
소설의 전개는 어머니 아멜리아 건틀립이 파견한 전직 수사관 매튜 라이스와 토라가 함께 피살자 하랄트의 여정을 따라 15세기의 도미니크 수도사가 쓴 마녀사냥 지침서에서 시작해, 중세 아이슬란드 기독교의 본산인 스칼홀트(Skálholt)와 홀마비크(Hólmavík)의 마술박물관, 정착시대 이전 아일랜드 수도사들의 동굴이 있는 헬라(Hella)와 헤클라(Hekla) 산 분화구,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ík)로 이어진다.
498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 속에 자세히 설명되는 중세 기독교의 역사와, 잔인한 마녀 사냥 이야기와 그에 얽힌 비극적 이야기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아이슬란드 구전의 북유럽 신화와 악마적 흑마술 등은 지금 현재 아이슬란드 박물관에 보관된 역사적 사료들과 맞물려 나름의 흥미거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흑마술에서 가장 압권인 예를 하나 들자면 홀마빅(Hólmavík)소재 주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네크로팬츠"(necropants). 죽은 사람의 시신을 파내 하반신 가죽을 통째로 벗겨 입으면 언제나 돈이 넘쳐날거라고 믿은 주술이란다 (아래 YouTube는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찍은것인데, 비위가 약한 분은 pass하시길...)
나름 흥미있게 쓴 소설인데 왜 실망했느냐고? 책 소개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셜록 홈즈, 괴도 루팡, 푸아로, 형사 콜롬보같은 명작에서 볼 수 있는 긴장감(suspense)이나 추리가 없었다. 부족한게 아니라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 토라가 사건 의뢰를 받은 단 한가지 이유는 뛰어난 수사 능력이나 추리력 같은게 아니라 피살자의 독일인 집안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그녀의 독일어 수준때문이었다. 파견된 매튜에게 많은 부분 의지해서 피살자의 행적을 따라 다니기는 하는데, 비범한 관찰력으로 남들이 간과했던 결정적인 실마리를 새로 발견한다던가, 번뜩이는 직감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추리를 한다던가 하는 것 없이 그저 기계적 관찰과 기록만을 계속할 뿐이다. 솔직히 사건 해결 능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감 없는 여 변호사일뿐이다. 베일에 싸인 범인이 계속해서 연쇄 살인을 벌인다거나, 토라와 매튜를 쫓아 다니면서 게임을 벌이거나 해치려 하거나 하는 긴박감을 더하는 내용 같은 것도 전무하다. 명색이 추리소설인데, 최소한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 정도의 긴장감을 기대하는 내가 이상한건가?
범인을 발견할 단. 하.나.의. 단서가 총 498페이지 중 무려 464페이지에 가서야 드디어 나온다. 그야말로 우.연.히. 범인의 넥타이핀 모양이 주인공 토라의 눈에 왠.지.모.르.게. 눈에 거슬리더니 이 모양이 피살자 목에 난 상처 모양과 일치한다는 것 하나를 깨달음으로 살인범인 것을 알아내면서 이야기가 갑.작.스.레. 결론으로 치닫는다. 마치 심상치 않은 동굴을 발견해서 횃불 하나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한발짝 한발짝 들어 갔는데, 그 끝에는 지상으로 올라오는 엘레베이터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것을 발견한 느낌이다.
책 사기 전에 영화로 만들고 있다는 기사를 봤는데, 원작에서 현저하게 벗어나는 내용으로 다시 각색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서스펜스/추리 보다는 호러 쪽에 가까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괜찮은 영화 배우가 있으면 그 사람 출연작을 죽 뽑아 몇 편을 보고, 책도 괜찮아 보이는 작가가 있으면 사는 김에 그 사람이 쓴 책 몇 권을 한꺼번에 사서 죽 읽는 편이다. 이 "마지막 의식"이 작가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의 토라 시리즈중 하나라서 출간된 3권을 한꺼번에 살까 했었는데 한권만 사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PS]
아! 그리고, 책 후반에 주인공 토라와 매튜가 밤 늦게 술한잔 같이 하더니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둘이 한 침대에서 벗은채로 있었다는 내용이 뜬금없이 PG13급으로 나오는 부분은 정말 짜증난다. 할리우드 영화가 흥행 차원에서 한 장면 집어 넣는 것도 아니고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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