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한 걸음이지만...
비록 한 걸음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도 한달 내내 착잡하다. 매주 늘어가는 시민들의 시위 규모에 힘 입어 다행히 방향은 잘 정리되는 쪽으로 잡혀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런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과 한국 사회의 청렴도를 보면 갈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무슨 비리가 터지던 간에, 한국 사회는 진영논리에 충실하게 자신이 지지하는 쪽을 보호하고, 그러다가 무슨 리스트 하나 있다고 하면 여야할 것 없이 다들 긴장한다. 그러다보니 선거는 번번히 최선(最善)을 뽑는게 아니라 차악(次惡)을 뽑아야만 했다.
사실 한국 사회에 최순실/정유라 모녀 같은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고등학교 시절, 석차가 중하위라서 대학 자체가 가기 힘들텐데도 의외로 나름 괜찮은 학교에 합격한 경우는 종종 있었고, 심지어 하는 짓은 개차반인데 학교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잘 지내다가 꼴찌에 가까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SKY 대학에 가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최고 명문에서 공학 박사학위 받은 중학교 동창이 명문 사립대에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20년 전 지불한 돈이 3억이었다. 적어도 예체능 계열 교수 자리는 아직도 여러가지 명목으로 엄청난 돈 없으면 어려운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지인들의 말을 통해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이다.
정권 혹은 정치권이 기업들의 팔을 비트는 것은 이조시대 벼슬아치들과 보부상(負褓商)들의 관계까지 내려가야 하니 무척이나 뿌리가 깊다. (아는 바 없지만 어쩌면 삼국시대 혹은 고조선까지 가야 할지도....) 군부 정권 시절에는 K그룹과 S그룹이, 그리고 문민 정부 시절에는 D그룹이 아마도 비협조적이거나 반발했다가 강제로 공중분해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기정 사실에 가깝다. 그러니 대기업치고 정권에 뒷 돈을 대지 않는 회사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 대기업에 몸 담은 사람들과, 그에 연관된 사람들 다 포함시키면 한국사회의 몇 퍼센트가 연루된 것일까?
대선때마다 매번 한국 신문지상에는 소위 "정치 테마주"라는 것이 오르내린다. 특정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 상승에 발 맞추어 인맥이 닿는다고 생각되는 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하는 것인데, 후보가 보수냐 진보냐에는 그다지 상관관계 (correlation)가 없는 것을 보면 한국의 개미 투자가들이 보는 "정권 획득"의 의미는 무척이나 자명해 보인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양비론(denying both)를 펴는 것도, 현 시국에 물타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한국 사회가 그래 왔고 아직도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한명 퇴진한다고 해서 한국 사회가 공명 정대하게 금새 바뀔거라는 순진한 환상은 갖지 말자는 말을 할 뿐이다.
마음이 착잡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터졌어야 할 일이기에 긍정적인 측면을 보고 싶다. 이번 사건이 우리나라가 "법치"국가로 가는 큰 시금석이 되었으면 한다.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것은 아무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대로 흘러가 잘 마무리 된다면) 그런 일이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첫 사례로서의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아직 확고하게 마무리 된것은 아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허수아비에게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이렇게나마 방향을 쉽게(?) 잡아간 거라고 자위해본다. 전두환 같은 사람에게 벌어진 일이었다면 평화 촛불시위 같은 것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테니까.
어느 나라나 정치권은 본질적으로 깨끗하기 어렵다. 미국 의회의 모태인 영국 상하원 의회 이름은 House of Lords (지주)과 House of Commons (평민)이다. 그들이 기득권을 스스로 버리고 공의를 추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나는 성선설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정치권보다는 검찰에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검찰이 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 일 제대로 캐내고 관련된 비리를 다 적발하고 벌할 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적당한 선까지만 캐고 덮어줘야지 비리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학이나 입학비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수많은 교사와 교직원들을 다 처벌해야만 할까? S그룹을 비롯해 정경유착에 관련된 기업과 그 임직원들 모두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할까?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고구마 줄기째 캐어내듯 줄줄이 따라나와서 한국 재계와 사회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절대 악(惡)을 추구하는 소수의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득(得)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선악을 가리지 않으며 공생(symbiosis)하기 원하는 더 많은 수의 인간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한다. 이들은 생계와 생존이 걸린 문제라면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마는 대다수의 가련한 민중(民衆)들을 겁박(劫迫)하여 자신들의 세상을 넓혀간다. 어쩌면 촛불들고 평화 시위에 매주 나가는 사람 중에도 어떤 형태로든 이번 일에 연루되고 가담한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6.25 사변 시절 엄청난 인원의 민간인들이 학살 당했다. 정말 골수분자들끼리 서로 죽인게 아니라 점령군의 요구에 그저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동조한 사람들까지 무차별로 죽인 슬픈 역사이다. 이번 일도 자칫하면 현대판 죽창질이 될 수도 있다. 정당하고 떳떳한 일은 절대 아니지만 그저 "잘 지켜보고 앞으로는 한번 더 양심에 물어보라"는 정도로 덮어주는게 합당하다고 본다. 물론 H그룹이나 엘시티 이영복처럼 적극적으로 뇌물을 줘가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한 경우를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주는 경우와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상식적으로 되지 않아야 할 일인데 별 제동 없이 넘어간 잠실 L 월드나, 시가 총액 3조가 넘는 S재벌의 변칙 상속 같은 경우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인듯 하다.
어쨌거나 가야할 길은 아직도 험하고 멀다. 그래도, 크게 진일보하는 2016년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한 걸음이지만, 그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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