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자상한 시간"
2주일 전에 미국 서부 산간지역에 눈 폭풍이 왔고, 미국 동부는 이미 연초에 겪은 폭설에 이어 오늘 다시 폭설 주의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순백의 눈으로 덮인 설국(雪國)...
눈에 파묻힌 숲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
장작 나무가 타닥 타닥 소리내며 타오르는 난로...
갓 로스팅한 커피 원두의 향기...
그 원두를 나무 핸드밀로 직접 갈아 천천히 내린 커피 한잔...
이런 것을 좋아하는 분들께 눈 내리는 겨울날에 보시기를 추천하는 드라마를 소개합니다. 제목 "優しい時間 (야사시 지칸)"을 "자상한 시간"이라고도 번역하고 "상냥한 시간"이라고도 번역합니다. 優しい(야사시)란 단어는 온화한, 자상한, 다정한, 부드러운 등의 뜻을 가집니다.
일본 후지 TV에서 2005년 1~3월에 방영된 11부작 드라마로 일본 홋카이도의 후라노(富良野)라는 지역의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가족의 화해와 용서를 잔잔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그려내는 일본의 국민작가 구라모토 소우(倉本聰)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작가가 스토리뿐 아니라, 배경과 음악까지도 관여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완성도와 몰입도가 아주 높습니다.
무려 17년전 작품이라 화질이 HD가 아닌 것이 좀 아쉽습니다만, 작품 즐기기에는 충분히 좋습니다. [판도라 TV에서 심히 구린 화질로 무료 시청이 가능합니다. 화질이 너무 아쉬우신 분은 댓글에 알려 주세요. DVD급 영상 정보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내용에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일상의 여러 사건들이 계속 얽히는 것을 풀어가는 것이라 대략의 메인 줄거리만 간단하게 스포 (spoiler) 로 공개합니다. 선정적인 장면은 없고, 다만 대화 내용중 약간의 성적 뉘앙스가 담긴 내용들이 있어 15세 관람가 정도로 생각하면 될것 같네요.
홋카이도 중부에 있는 농촌 마을 후라노의 산 기슭 숲 속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커다란 통유리로 둘러싸인 이 카페에 앉아 있으면 바깥의 숲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바(bar)에는 나무통이 달린 핸드밀 (handmill) 커피 분쇄기 (grinder)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습니다.
독특하게, 이 카페는 원하는 손님들에게는 직접 커피 분쇄기를 주고 주문한 커피 원두를 갈게 합니다.
다 갈아진 원두는 바리스타가 받아서 핸드드립 (pour over)으로 내려서 예쁜 커피잔에 담아 내어줍니다.
이 카페가 드라마 "자상한 시간" 의 주 무대입니다.
카페 이름은 "모리노도케이 (森の時計, 숲의 시계)" [참고: 드라마 종영후에 카페를 드라마 그대로 남겨 영업 중입니다. 관련 블로그 글 모음]
모리노도케이의 주인은 무역상사의 중역으로 미주 지사장까지 지냈던 와쿠이 유키치. 3년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내의 고향인 후라노로 이사와 아내의 소원이었던 카페를 열었습니다.
커피 내리는 바리스타가 주업이고
아침마다 숲을 산책 하면서 난로에 땔 장작감을 주워옵니다.
카페의 작은 다락방에 아내의 영정을 모셔두고 정성껏 매일 문안을 합니다.
영업이 끝난 후에는 텅빈 카페에서 홀로 커피를 내려 2잔을 만들어 놓고는 죽은 아내가 마치 살아 있는듯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아내가 죽은 것은 무녀독남 아들인 와쿠이 타쿠로가 운전 중 사고를 내서 였습니다. 아내가 운전하는 아들과 뭔가 실갱이를 벌이다가 운전대를 잘못 꺾는 바람에 사고가 났습니다.
유키치는 아들 타쿠로가 폭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역상사의 발령에 따라 계속 단신 부임으로 해외를 떠돌다 보니 아들과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근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것이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아들 타쿠로는 지금껏 혼자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혼자 살겠다고 말합니다. 유키치는 그 말을 듣고는 실망하여 연을 끊고 살자고 통보합니다. 타쿠로가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유키치는 단호했습니다.
아버지 유키치가 홋카이도로 이사한 것을 알고 타쿠로가 한번 찾아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지만, 마음을 완전히 닫은 유키치는 연을 끊었는데 왜 찾아왔냐며 냉담하게 가버렸습니다.
타쿠로는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가 자신의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있는 홋카이도에 자신도 정착하기로 결정한 뒤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1시간 거리의 비에이(美瑛) 산 속에 있는 도예가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타쿠로에게는 엄마의 고향 절친인 쿠조 토모코 아줌마가 있어, 도예가에게 소개도 받고 가끔 만나 조언도 듣고 할 수 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나가와 아즈사라는 예쁜 아가씨를 알게되어 가까운 사이로 발전도 합니다.
걸핏하면 그릇을 떨어뜨리는 아즈사를 잡화점에서 우연히 본 타쿠로가 자신이 일하는 도예 공방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은 다 폐기하는데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가 쓰라고 말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가까와진 후에 타쿠로는 아즈사가 아버지 유키치의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합니다.
올해는 아버지 유키치가 60세 되는 해입니다. 아버지가 만나주지는 않아도 아버지께 뭔가 선물을 드리고 싶었던 타쿠로는 자신이 만든 컵을 토모코 아줌마가 선물하는 것처럼 해서 전달을 합니다. 아버지는 다소 엉성하게 만들어진 컵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그 후로는 죽은 아내에게 줄 커피를 이 컵에 담아 내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너무도 그리워하는 타쿠로는 영업시간이 끝난 카페에 몰라 찾아가 먼 발치에서 아버지를 보곤 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토모코 아줌마는 어떻게든 둘 사이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양쪽을 오가며 눈치를 보기도 하고, 넌지시 씨있는 농담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유키치의 마음은 좀처럼 녹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유키치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쉽게 화를 내는 직원들과의 갈등도 해결해야 하고
동네 다양한 사람들의 애환을 지켜보기도 하며, 황망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유키치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아들 타쿠로와의 관계들을 계속 돌아보며 반추해 봅니다.
두 부자 사이에서 안타까와하던 아즈사가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을 깜짝 상봉시킬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 유키치를 아들 타쿠로가 있는 공방으로 데리고 가지만 아버지의 용서를 아직 받지 못해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타쿠로가 눈길을 달려 도망가면서 무산됩니다.
도망치는 타쿠로의 뒷모습을 본 유키치는 그가 아들임을 알아봤고, 새해에 신사참배를 하면서 산 부적을 들고 밤에 공방으로 찾아가, 아들인 것을 확인한 후 부적을 바깥에 전시된 오브제 (objet) 에 넣고 두고 돌아 옵니다. 한참 뒤에 부적을 발견한 타쿠로가 후라노 신사것인 것을 보고 여친인 아즈사가 두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아버지가 다녀간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타쿠로가 3년간 열심히 수행한 것을 지켜본 도예 공방 스승이 신인 도예전에 도전해볼 것을 권합니다.
완성된 작품을 스승이 칭찬해 주자, 타쿠로는 아버지 유키치에게 보여드리러 찾아갔고 아버지는 너무도 기쁘게 타쿠로를 맞이했습니다.
타쿠로가 낸 차 사고는 타쿠로가 팔에 문신을 한 것을 알게 된 엄마가 보여달라고 실갱이를 하다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내내 괴로워 하던 타쿠로는 1200°C 가 넘는 달궈진 도자기를 문신에 지져 없애버렸습니다. 그 상처를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타쿠로가 용서를 구하자, 아버지 유키치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할 것은 오히려 자신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관계를 회복한 유키치에겐 완성도 높은 도예전 작품보다도 몇달전 생일에 받았던 어설픈 컵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마치 "심야식당"의 후라노 편처럼 계속 되는 다양한 사연의 드라마의 내용도 좋지만, 홋카이도 중부의 늦가을/한겨울 풍광은 너무도 멋진 덤입니다.
홋카이도의 매서운 눈폭풍도 훌륭한 볼거리입니다. 실제로 겪으면 공포스럽겠지만, 따뜻한 방에서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 것은 좋은 재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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