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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금은 절대 환영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고3 시절 고등부 담당 목사셨습니다.  하루는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의 "I Have a Dream"을 읽으시다 말고 강대상을 붙드신채로 고개를 푸욱 떨구시고 한참을 흐느끼셨습니다.  믿음 없던 시절이지만 그 분의 심정은 저와 제 친구의 마음에 깊게 각인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목사님은 고삘이들에게 "돈 내놔!  내가 잘 써줄께!"라고 말씀하셔서 코 묻은 돈 긁어모으시고(?) 내친김에 어른들에게도 바람 잡으셔서 어렵게 사시는 할머니 공장에서 야근수당 받은것 긁어모으시고 그러셨지요.

이 분께서 이번에 환갑이시라는데 또 그러시네요.  "돈 내노슈!  내가 펑펑 아낌 없이 써줄께!"


다음 주 22일은 제 생일입니다. 이번 생일은 좀 특별한 생일입니다. 회갑입니다. 인도로 오기 전 높은 뜻 광성교회의 이 목사님이 제게 전화를 하여 아우 목사들이 제 회갑을 준비하고 있다는 귀뜸을 해 주었습니다. 사양하고 싶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로 했었습니다.
 
새벽에 이 목사님에게 그 모든 약속을 취소하라고 연락을 하였습니다. 내게 특별한 계획이 있다고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 회갑을 이용(?)하여 메리 완레스 병원의 성공적인 자립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22일 청어람에서 제 회갑 잔치를 하려고 합니다. 잔치지만 잔치는 없습니다. 오시면 블리스앤 블레스의 커피와 차 정도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선물과 화환은 절대 사양입니다. 축의금은 절대환영입니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한복을 잘 차려입고 청어람에 나아가 여러분들의 축하를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축하는 저와 죠일플 홈과 메리 완레스 병원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제 회갑 축하를 통하여 어려분들도 저와 함께 이 아름다운 사역에 동참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제법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 만 명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방에 계시거나 외국에 계시는 분들은 그날 청어람에 오실 수 없으실 겁니다. 오시지는 못하셔도 축의금은 보내주십시오. 그 동안 거의 free로 제 설교를 듣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계속 그러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는 들으시고 돈을 내주십시오.
 
후원계좌는 국민은행 004401-04-098899 열매나눔재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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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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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말과 죽이는

 

세상에는 옳은 말과 그른 말이 있고, 또 사람을 살리는 말 (세우는 말) 과 죽이는 말 (넘어 뜨리는 말) 이 있는 것 같다.  옳은 말이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깨닫는 데에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경우는 그 말을 해야할 대상이 잘못되었을 때에, 더 나아가 주객이 전도되었을 때에 잘 생기는 것 같다.  좋은 예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에게 주는 말씀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주신 말씀을 부인이 대신 하고, 하나님께서 부인에게 주신 말씀을 남편이 대신 하는 가정을 두고 좋은 가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 부부 싸움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김 목사님께서 가끔 말씀하신 것이지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씀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주장하면 사회는 상당히 살벌해질 것이다.

 

내가 대학 4학년때인 1987, 충남 금산에 갔다가 시골 목회자 사례비가 3만원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사치스럽게 산 것은 아니었는데도 당시 내 용돈보다 적었다.  그 뒤로 졸업할 때까지 한달에 3만원으로 한번 살아봤다.  매일 점심은 학교 구내 식당에서 400원을 넘기지 않고 (구내 식당에서야 밥을 사먹지만,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가도 라면밖에 먹지 못할 돈이었다), 간식이나 커피등은 당연히 엄두도 못내고, 통학할 때도 훨씬 가까이 있고 빠른 좌석버스 대신 15분 걸어가야 타는 일반버스만 타고 해야 간신히 한달 3만원으로 살 수 있었다.  정말로 그 교회의 교인들의 능력이 되지 않거나, 목회자가 가난함을 자청해서 이 같은 생활을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교인들이 충분히 능력 (평균적으로 볼 때) 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목회자니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옳소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강요요 나아가서 폭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 목사님께서는 제가 가난하게 살면 저는 하나님께 상급을 받겠지만, 숭의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한다. (개인적으로 그 이야기를 김 목사님이 아닌 평신도 중 한분이 말씀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에 대한 적절한사례는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청빈을 결단하는 것은 아름답거니와, 남에게 청빈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믿는다.

 

평신도들도 한국에서는 기독교 관련된 단체에 들어가면, 월급 제대로 받지 못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선교라는 이름에 모였으니 재정 유지가 안되면 별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그런 모습을 당연시하며 강요한다는 것이다.  마치 월급 이야기 하면 믿음이 약한 것 처럼 말이다.  본인이야 그런 삶을 알면서 헌신했으니까 감수한다 치더라도, 함께 그런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부인과 아이들은 어떨까?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견뎌나가야 하는 남편/아버지로서의 마음은 어떨까?  하나님만 의지하면 다 채워주시므로 청빈하라고 말하는 것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 (야고보서 2:15-16) 하는 것과 뭐가 차이가 있을까? 

 

 

3번째 글에, 누구나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잘한 것은 잘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토론 중에 이랜드가 예로 나왔다.  정직하게 사업하고 세금 제대로 냈지만 노사 문제에 정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고세훈 교수님의 의견이었다.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이랜드에서 각고의 고통으로 회사를 일구어 온 분들을 낙심케 하고, 나아가 넘어지게 까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을 이와 같이 말하면 어떨까? “정직하게 사업하고 세금 제대로 내는 것을 통해 이랜드는 한국 기독교계와 경제계에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다.  한가지 숙제가 있다면, 노사 문제를 좀 더 정당하게 하여 회사 내의 근로자들에게 좀 더 개선된 근로 환경과 처우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랜드의 경우도 준비된 창업자와 초창기 직원들이 준비되지 않은 직원들에게까지도 어느 정도의 청빈을 강요한 경우라고 해석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록펠러와 카네기의 경우도 그렇다.  두 사람을 십일조 잘해서 축복받은 사람들로 일컫는 것은 온당치 못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나쁠 것이 있는가 모르겠다.  그 재산 축적과정의 안 좋은 부분은 비평하고 버리더라도, 그들이 환원한 재산이 미국 사회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이 부분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본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부자가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양심에 비출 때 정말로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돈을 벌어, 그 중 적지 않는 부분을 이웃들을 위해 쓰고 있고, 그런 삶을 기쁨으로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 사람을 신학적으로 깨끗한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분명 그 사람을 무척이나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교만해질 정도로 추켜올리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보고 그 정도 가지고 교만하지 말라.  그래봤자 당신은 이런 저런 부분에서 부정할 뿐이다라고 말해 그 사람의 기를 죽이고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을 감동케 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의 재물 축적 과정은 잘 묘사되어 있지 않다.  쉰들러가 그 과정에서 나쁜 짓 하나 안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누군가 쉰들러의 재물 축적 과정을 낱낱이 까발리면서 그러므로 이 사람을 선하다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시각을 편향되고 왜곡되었다고 보게될 것 같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한 부자의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나서, “당신은 이 불공평한 사회에서 재물을 획득했고, 그 재물의 극히 적은 부분을 베풀었을 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니까, 나는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베풀어야만 한다라고 말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너무 굳었다라고 느낄 것 같다.

 

우리가 선한 일을 보고도 그것을 선하다라고 인정해줄 줄 모른다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누가복음 7:32) 라고 책망하시지 않겠는가?  나는 한국 교회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입 바른말일지는 몰라도 그 도가 지나쳐 상대방을 넘어지게 하고 낙담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범죄하고 있다면, 지적하고 권면해야 할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토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열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한 영혼을 칼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벌어지는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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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금 그릇

 

‘깨끗하다’ 는 표현에 대한 오해가 CBS 토론회에서 서로 어긋난 논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요약하라면,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마태복음 19:17) 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정도가 될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한마디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66권의 성경이 주어진 것이 아닐까?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 한 편을 더 소개할까 한다.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원들은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들도 인간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을 이유없이 죽인다는 일에 마음에 크게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런 가책을 없애기 위해, 히틀러는 수천명이 있는 수용소에 몇 개 되지 않는 화장실만을 지어 놓고 가는 시간마저 제한했습니다.  얼마되지 않아서 유태인의 숙소는 오물로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숙소는 인간의 숙소가 아닌 가축들의 외양간과 같게 되었고 그 안에 사는 유태인들은 독일군들의 눈에 소나 돼지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가책을 받는 사람도 가축을 죽이는 것에는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벌레를 죽이는 것은 더욱 쉽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독일군들은 유태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따라서 마음에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태인 중에 이런 생각을 간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나오는 한잔의 물을 반만 마시고 남은 반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들은 깨진 유리병을 주워 피가 나오도록 면도를 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몸부림은 그들의 몸을 그다지 깨끗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반잔의 물로 닦아본들 얼마나 더 깨끗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한 사람들은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도록 생존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막 살면 죽습니다.  의로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깨끗하게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노력이 없으면, 여러분은 죽은 것입니다

 

나는 깨끗한 부자라는 표현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이것은 우리를 깨끗하다 칭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의 영원한 몸부림일 뿐이다.  나는 하나님께서도 이런 몸부림을 보며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너는 그저 죄인일 뿐이다라고 하실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은 옳을 수도 있도 그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 좀 더 쓰도록 하려고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디모데 후서 2:20-21)   사도 바울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몰라서 쓴 표현도, 로마 치하가 경제 구조 면에서 지금의 한국보다 더 정의롭기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본인이 금 그릇이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면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 아니면 다 더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되는 것 같다.  김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라는 표현을 깨끗한  금그릇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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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그마바리새

 

첫번째 글에서 잠시 언급한 스티그마의 첫 자체 수련회에 김동호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의 제목은 스티그마와 바리새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때 딱 한번 들었을 뿐 다른 곳에서는 다시 듣지 못한 설교이지만, 또 다른 자리에서 들은 분들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10년이 훨씬 더 되어서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강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의 소위 말하는 성서 중간 암흑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우리 민족이 이런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민중 봉기에 가담하고, 어떤 사람은 외딴 곳에서 세상과 격리된 금욕 수도 생활을 했습니다.

이 중 한 그룹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준수하지 않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짓고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영적 각성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들 가운데 율법과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은 율법을 날마다 열심으로 연구하여, 율법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율법 준수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바리새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리새는 애초에 아주 좋은 의도의 훌륭한 신앙 각성 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화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렇게 제한된 말씀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의 의로움과 죄됨을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의로와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고 죄를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선행과 범죄는 서로 상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행을 했다고 해서, 율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지은 범죄는 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그저 용서와 긍휼을 통해 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그마.  좋은 모임입니다.  말씀을 실험하면서 살겠다는 마음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높은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신차리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참 쉽습니다.  그러는 순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바리새인이 될것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 모임에 너무나도 꼭 필요한 그리고 적합한 말씀이었고, 이후로 나는 이 설교를 본회퍼 목사님의 우리는 경건한 의인이 아닌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내 평생의 좌우명과 같이 여기면서 살고 있다. 나는 김 목사님의 이 말씀이 고세훈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영성적 가난함’ 이라든가 자기 정당화나 자기 의의 수단의 염려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며, 또 김 목사님 스스로 이런 위험이 있음을 늘 인식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번 높은뜻 숭의 교회게시판에 함께 스티그마에 있던 한 후배와 글을 주고 받으시면서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잘못하면 바리새인이 될 위험성이 높으니 늘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락교회 기도원에서 스티그마를 시작하는 예배 설교를 하면서도 했던 이야기인 것을 아마 기억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개혁을 한답시고 이것 저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다니는 저의 위험성도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못하면 함부로 사람을 정죄하고 더 잘못하면 쓸데없는 교만에 사로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염려를 늘 하신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 위험성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김동호 목사님을 아끼시는 분들은 모두 함께 이 부분을 놓고 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role model’이기를 고집하시는 김 목사님을 생각하면, 마치 새로 개발한 백신의 최종 확인 작업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의 몸에 백신을 주사하는 과학자의 모습과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지곤 한다.

 

나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몇년 살면서 느낀 것이 나를 포함해서 한국 사람들의 사고가 사람을 한 마디로 평가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누구를 존경하다가 그 사람이 뭔가 잘못한 일이 발견되면 대뜸 나오는 말이 그런 사람인줄 몰랐는데 내가 속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때 OOO한 일도 나름대로 꿍꿍이 속이 있어서 가식적으로 한 것에 불과한게 분명하다라는 식이다.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잘 생각해 보면 얼마나 바리새적인 사고인지 모른다.  선행과 범죄가 한 사람에게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한가지 범죄로 인해 그 사람의 모든 선행을 상쇄시켜버리는 사고 방식이다.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로만 되뇌일뿐 실제로의 삶에서는 그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  최근 몇년간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스캔들이 여러군데서 터져 나왔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그 분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거의 볼 수 없고 무조건적인 덮어두기 아니면 싸잡아삯군으로 몰아가기 일색이라는 것이다.  양쪽 다 바리새 적인 사고에 깊게 물들어 있다.  그래서 이에 관련된 사람을 다시 살려 세우지 못하고 넘어뜨려 죽게 한다.

 

지난 20년간 교회 다니면서, 34.8%라는 수치는 고사하고 레위기와 신명기의 곳곳에 적혀 있는 이웃 사랑과 나눔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설교조차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나마 좀 강조하시는 분들이 대천덕 신부님, 김진홍 목사님, 김동호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최일도 목사님 정도일까? (이외에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더 있겠지만) .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기껏 강조하는 것이 십일조와 주일성수 정도 였다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십일조는 원래의 목적에도 맞지 않게 쓰여져 와서 교회가 담당해야할 나눔의 책임은 거의 도외시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가 읽을 성경이 없어서도, 그 내용이 성경에서 삭제되어서도 아니었다.  성경에는 쓰여 있는데 그런가 보다 하고 대충 넘어 가서 그런것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깨끗한 부자라는 책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나눔의 책임, ‘정직공평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끌어내 공론화 했다는 면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첫번 째 글에서 바는 깨끗한 부자라는 책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부자 한 사람을 바라는 마음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주장했지만 독자층 전체를 한번쯤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깨끗한 부자를 읽은 비교적 부유한 성도들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생각해 보면서 내 나름대로 한번 구분을 해 보았다.   (1) 하나님 앞에 진정한 믿음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별 느낌 없이 구애 받지 않고 전에 살던 대로 살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이런 책 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2) 잘 읽은 후 너무 요구사항이 과하다.  원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한국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3)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도전을 받고 좀 더 깨끗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벌고 34.8% 분배를 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열심히 살지만 그 목표에 잘 이르지 못하는 본인을 보면서, 덕분에 (?) 주님 앞에 겸손하게 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4) 또 어떤 사람들은 고세훈 교수님께서 우려한 것 처럼, 34.8%의 목표를 결국 달성(?) 했기에 이제야 내가 깨끗한 부자가 되었구나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5) 끝으로 34.8%의 목표를 달성 했지만, 그저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생각하며 할 수만 있다면 10 10 전체를 드리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가 김동호 목사님께서 목마르게 찾고 계신 한 사람이며 고세훈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성적 가난함을 제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 일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3) 정도에 해당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것 자체 만으로도 한국 개신교회의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4) (5) 까지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고세훈 교수님은 (4) 의 경우를 우려하시면서, 부자들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하셨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1) 이나 (2) 의 경우라면 마음의 불편함을 오히려 느끼지 않겠지만, 마음의 불편함 없이 (4) 의 경우까지 갈 부자들이 있을까 하는 의아함이 생긴다.  그리고 전혀 근거 없는 막연한 내 생각 입니다만, (4) 가 많을까 (5) 가 많을까를 생각할 때, 나는 (5) 가 더 많을 것이다라는데 걸어 보겠습니다 (도박 용어를 써서 좀 그렇긴하지만 -_-).  왜냐하면, (4) 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시기 시작하면 내 생각에 분명 김동호 목사님께서는 다른 책을 하나 더 내실 것 같으니까 (^_^  반농담, 반진담)

 

(4) 에 해당하는 사람들, 아마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을 우려해서 성경에 명확히 제시된 일차기준선을 말하지 말라고 목회자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4)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을 때 김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에 써 있는대로 했을 뿐이다라고 변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교만이 스스로의 눈을 멀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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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e Model

 

오늘날 우리는 수 많은 엄마 게를 본다.  자기도 게 걸음질을 하면서, 아들 게에게 ‘그렇게 걷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이지만, 그는 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다. (고린도 전서 4:16,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는 스스로가 전하는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role model 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동호 목사님께 말한다.  개혁한다고 동네 방네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호를 외친다고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구호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role model’이 되어 몸소 보여주려고 하는 ‘고집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설교를 삶으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분들은 훨씬 적은 것 같다 (막연한 내 생각이다.  혹 내가 목회자들을 매도한 것으로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사과를 드린다).  내가 보기에, 김동호 목사님이 role model이 되고자 하는 그 ‘고집스러움’이 없으셨다면 최근 받고 있는 많은 지탄은 아마도 면할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 소재가 가까운 곳에 있다.  본인의 느낌, 본인의 가족 이야기, 본인의 결심, 본인이 만난 사람들….   어떤 부분은 보기에 따라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본인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들까지도 있곤 하다.  몇년 전 목회자 사례비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그리고 ‘청부론’ 논쟁을 일으킨 것도 다른 분들처럼 어느 정도 감추고 있으면 될 부분을 굳이 드러내서 자초한 것이라고 보인다.   적어도 지금껏 내가 보아온 바에 의하면, 김 목사님은 타인에게 요구하기에 앞서 반드시 본인 스스로 그 요구를 실행해오셨다.  작게는, 이삭 줍기와 정직한 세금 납부로부터 크게는 목사 재신임, 정년 단축, 원로 목사제 폐지 등등.   내가 알기로 김 목사님은 결코 많지 않은 월급 받던 영락교회 교육 부목사 시절부터, ‘깨끗한 부자’에서 주장하신 34.8%의 나눔을 실천해 오셨다.  더 많이 받으시는 지금은 어떨까?  목사님 가족들과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34.8%를 넘기면 넘겼지 못 미치지는 않을거라는 것, 더 하시려고 하시면 했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실거라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목사님의 모습에 근거한 추측이다.

 

개인적으로 고세훈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영성적 가난함’에 깊게 동의하지만, 고 교수님께서 김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를 일컬어 ‘편하고 수월한 처방’이라는 표현은 솔직이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번째 글 쯤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고 교수님께서는 그것이 편하고 수월하게 생각하실 정도로 많은 나눔의 삶을 살고 계시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34.8%의 처방전 조차도 너무나 힘들고 버겁게 느껴지고, 반대로 내가 어떤 모습의 삶을 사는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영성적 가난함을 말하는 것이 도리어 쉽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부족한 나의 경우만일까?  나도 사회 생활한 지가 한참 되었다.  그런데 월급 100만원 받으나, 200만원 받으나, 300만원 받으나, 나누어 주는 것은 여전히 힘들기만 하다.  곰곰히 잘 생각해 보면 수입이 더 많은 것이 여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기 저기서 조금씩 (조금 더 좋은 집, 조금 더 좋은 차, 조금 더 좋은 음식, 조금 더 좋은 아이들 과외, 정말로 조금씩…) 더 쓰다 보면, 티 나지 않게 결국 빠듯하게 살기는 대부분 마찬가지요 (엄청난 거부인 경우를 제외하면), 더 벌면 더 베풀겠다는 것은 내 합리화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내린 결론이다.

 

김동호 목사님이 ‘role model’을 고집하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도 영성적 가난함에 쉽게 동의하고 쏟아지는 비난을 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님은 본인이 그 영성적 가난함의 필요를 느끼고, 먼저 실천 해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남들에게 요구하지 않을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김 목사님을 향한 고세훈 교수님의 “자기 정당화나 자기 의의 수단를 염려하는 지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부분은 다음 번에 올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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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찾는 목마름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신 하용조 목사님께서 빛과 소금을 창간하신 후 책 맨 뒤에 빛과 소금의 생각이란 한 쪽짜리 글을 연재 하셨는데, 그 글들을 모아 처음 출간한 책이 한 사람을 찾습니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였다.   얇지만 하 목사님의 생각이 집약된 듯한 책이라 내가 늘 가깝게 두고 사는 책 중 한권이기도 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이던 1983년 부활절 영락교회 고등부에 친구의 인도로 나오게 되었다.  국민학교 시절 집 앞 교회가 멀리 이전하기 전까지 잠시 다닌 것이 있지만, 내가 정말로 원해서 교회를 다닌 것은 이 고등부 시절이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 신앙이라고 할 만큼의 무엇도 없었고, 교회를 다니시지 않는 아버지의 눈도 피해야 했고, 대학 입시를 앞 둔 상태라 마음의 여유도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내내 나는 교회를 빠질 수 없었다. 당시 고등부를 맡고 계신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에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그 분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대 일의 관계는 아니지만, 김 목사님과의 만남을 쌓아가면서 나는 그 분의 설교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한 신앙인으로서 김동호라는 분과 그 삶을 좋아하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김 목사님을 알게된 후 20여년간 일관되게 느껴온 것은 이 분의 한 사람을 찾는 목마름이다.   김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의 단결된 힘보다는 하나님 앞에 헌신된 단 한 사람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내가 스티그마모임을 시작했을 때 김 목사님은 영락교회에서 담임 목사 대우의 교육전담 목사셨다.  엉뚱하게도 (?) 목사님은 고등부 담임을 겸임하셨다.  성인들 예배 설교를 맡으실 수 있었지만, 그 분은 어린 학생들 가운데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그 한 사람을 향해 한 번이라도 말씀을 전하고 싶어 하셨다.   스티그마에서 첫 자체 수련회를 계획하면서, 김 목사님의 말씀을 청해 듣고 싶어 목사님에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드렸다.   위치에 걸맞게 빡빡한 일정을 보내시면서, 일정상 많은 집회 요청에 일일이 응하시지 못하시고 또 큰 규모의 집회도 많이 거절하고 계셨던 것을 알면서도 15명 남짓한 모임을 위해서 부러 시간을 내달라고 당돌히 요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숫자의 많고 적음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목사님은 기뻐하시면서 그 조촐한 모임을 위해서 멀리 수유리까지 오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목사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분들은 이와 비슷한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 목사님은 설교를 정말로 많이도 반복하시는 분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재탕 삼탕을 해도 너무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보통 부흥사로 사역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그렇게 한다.  하지만, 김 목사님과의 작은 모임에 참여해 본 사람이면 쉽게 알게 된다.  이 분이 설교 원고가 모자라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누구에게든, 가장 전하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앞으로 올릴 글에 목사님께서 책이나 큰 집회에서 자주 반복하지 않는 설교를 몇 개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성격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 중 한사람이지만, 김 목사님의 설교는 반복이라도 좋아하게 되었다.  첫째, 준비하지 않고 게을러서 하는 재탕 삼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둘째 그 재탕 삼탕에 담겨 있는 김 목사님의 목마름을 그 때마다 새롭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측하기로, 누가 뭐래도 김 목사님의 같은 설교 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예배와 집회에 참석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 설교를 몇 번씩 이미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중의 혹시 어떤 한 사람이 아직 그 설교를 듣지 못했다면 이 사람이 바로 그 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그 생각에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테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김 목사님이 대중성을 지향한 마케팅식의 목회를 한다고.   요즘 주장하는 것이 다 얄팍한 목회 전략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영락교회, 동안 교회, 높은 뜻 숭의교회 (이하 숭의 교회’) 등 결코 작지 않은 교회의 목회를 해 왔고 요즘은 교회 개혁’, ‘깨끗한 부자등의 주장으로 많은 대중의 관심 (긍정적 관심과 부정적 관심을 모두 포함)을 모으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 분의 일관된 한 사람을 찾는 목마름을 느낄 수 있다.   청부론논쟁을 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많은 사람에게 읽히려고 하는 책으로 생각한다.  고세훈 교수님께서도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는 악영향을 지적하셨다.  김 목사님 스스로도 할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 목사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여전히 한 사람이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부자가 단 한명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작고도 희박한 가능성이 성경에서 전면 배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단 한명의 부자로 인해 5000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먹여질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단 한명의 부자가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가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단 한명으로 인해 물질로 찌든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올바른 공의와 사랑이 선포될 수 있다면, 김동호 목사님은 결코 깨끗한 부자론을 철회하시지 않을 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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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삶이 있는 신앙인들을 존경한다.   내가 세상의 즐거움이 헛되다고 느끼고 그것을 버리기로 결심한 때,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은 정연희 님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나오는 맹의순이라는 한 실존 인물이었다.   간접적으로 나의 신앙과 사고의 틀에 큰 영향을 준 분들을 열거하면,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님, 예수원의 대천덕신부님, 그리고 독일의 신학자인 본회퍼목사님을꼽고 싶다.  다들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본인의 신앙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들이시고 이제는 다들 고인이 되셨다.  아직 생존하시고 내게 좀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분은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목사님을 꼽게 된다.

 

워낙 뚜렷한 소신에 입각해 설교를 하시기 때문에 설교 내용을 두고 뜨거운 찬반 격론이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2001년에 출간하신 깨끗한 부자라는 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2003년에 김영봉 목사님께서 쓰신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 내용에 공감한 많은 네티즌들과 많은 토론들이 오갔고, 그해 4월에 김동호 목사님은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인 고세훈 교수님과 공개 토론을 벌였다.

 

고세훈 교수님의 의견도 일리가 분명 있고 부분적으로 볼 때 동의할 내용이 많이 있었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김동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여, 목사님을 통해 배워온 내용을 토대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변론조가 되겠지만, 김동호 목사님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1991 10월 목사님께서 돌연 사임을 표명하셨다.  그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에 대한 나의 신앙 의존도(?)는 솔직이 상당히 컸던 것이 사실이기에 들려오는 뒷 이야기에 대해 화도 많이 났고, 목사님따라서 교회를 확 옮겨버릴 생각도 했다.  타는듯한 마음을 안고 목사님께 푸념조의 편지를 한통 써 보냈다.  그랬더니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답장을 목사님으로부터 받았고, 그 편지를 읽으면서 왠지 나는 목사님에 대한 나의 다소 맹목적인 애정을 접고 홀로서기를 내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다시 교회를 떠나는 일이 너의 마음에 아픔이 된 것을 나도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교회와 특히 학생들과 청년들 (네가 알다시피 내가 정말 저들을 사랑한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변할 수 없지)에 대한 나의 사랑과 열정이 식어서도 아니고, 견디기 어려운 일 때문도 아니다.  만일 그런 일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 하나가 마음 아프고 힘들어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정말이다.”

 

그 주 수요예배 후 인사를 드리고나서, 나는 목사님을 위해서 그리고 내 스스로를 위해서 적당한 (?)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 거의 뵐 수도 없고, 간간히 교회 게시판을 통해서 교회 근황을 접할 뿐인데, 목사님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가 느끼기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오해하는 부분들이 꽤 있는 것 같아서 (순전히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몇 개로 나누어 내가 이해하는 목사님의 청부론을 적어보고자 한다.

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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