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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6.04.18 정당과 교회
  2. 2015.03.08 Decision Making (2)
  3. 2013.12.15 An Old-Fashioned Church
  4. 2013.12.09 Dress Code (2)
  5. 2013.08.31 제8 영도 교회
  6. 2012.08.23 Run! Run for Your Life! (2)
  7. 2009.12.27 Trend에 대한 딴지... (2)
  8. 2008.07.25 Tent-Making 목회 (2)
  9. 2008.06.23 반복된 인생살이가 하나님 나라의 동력으로
  10. 2008.02.24 교회문제: 우찌무라 간조

정당과 교회





국민들은 정당이 보다 나은 국민의 삶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주기 바란다.


정당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마치 선진국이 될 듯, 집권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주장한다.


국민들은 안다.  청렴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정당의 규모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임도...


그래도, 늘 자기 이익만 챙길 뿐 능력도 없는 수구 꼴통이나,


주둥이만 살았을 뿐 일도 서툰 주제에 탐욕으로 냄새까지 나는 싸가지 없는 진보나,


정당 키우는 것의 목적이 오로지 자기들 권력과 이득을 위하는 것 뿐임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빠'들이 아닌 국민들은 정당들이 부르짖는 것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정당과 그 대표가 얼마나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지를 지켜볼 뿐...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영향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교회들은 자기 교회가 마치 천국인 듯, 그 외에는 마치 지옥인 듯 외쳐댄다.


사람들은 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사람들은 솔직히 교회에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개인이 보일 수 있는 영향력도 있지만, 큰 교회만 할 수 있는 영향력이 분명 있음도...


그래도, 온갖 죄와 정욕에 찌들어 살면서 천국 백성 타령하는 근본주의자들이나,


오직 믿음이라고 목소리 높이면서도 부와 명예에 집착하며 사는 기복신앙에 빠진 자들이나,


교회 사이즈 키우는 것의 목적이 오로지 목회자 배 불리려는 것 뿐임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교회가 주장하는 것에 의해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교회와 목회자들이 얼마나 향기로운 삶을 사는지, 아름다운 삶을 보여 주는지 지켜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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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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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ision Making


위험 - 편가르기


교회가 큰 의사결정을 해야할 상황들이 가끔 생깁니다.  이 의사결정 과정은 종종 교회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곤 합니다.  오래 교회 다니신 분들 중 이런 분열의 과정을 아프게 겪으셨던 분들이 적지 않으실겁니다.  분열의 초기 조짐은 ‘편 가르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A목사님편, B목사님편, C장로님편...


일단 편 가르기가 시작되면 마치 정당간의 파벌처럼 모든 사안을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하고 한마디의 말로 그 사람이 어느 편인가를 단정 짓습니다.  편 가르기를 의도적으로 하는 사람은 그다지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지요.  편 가르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의 '토론'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할 것 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10가지중 8~9가지 생각이 같아도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으면 합니다.  Romney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결정이 다 옳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맹종일 것입니다.  Obama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모든 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닌 사안 자체의 옳고 그름에 촛점을 맞춰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의 '의도'를 추측하거나 단정지으려고 하지 말아야하겠고, 내가 보기에 말도 안되는 생각을 발표 하더라도 그것을 그 사람의 불순한 동기때문이라고 확대해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교회의 결정 -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심각한 교회 분열의 고통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바울은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2:27, 29) 라고 권면했습니다.  한국 교계에서 성령운동으로 시작해 이단으로 빠진 집단들의 다수는 리더가 방언하고, 리더가 통역하고, 리더가 분변하고, 리더만 예언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인 교인들은 중요한 사안일수록 담임 목회자께서 결정해 주는 것을 선호하고 그런 방식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여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고린도전서 13:9) 한계를 안고 있기에 이런 방식은 어려움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지역교회의 leadership과 돌봄을 담당해야 하는 "장로들" (목사를 포함)의 자격과 책임과 권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로를 일컫는데는 2가지의 헬라어 단어를 쓰고 있는데, 첫째는 'presbyteroi' (장로) 로 연륜 과 성숙함을 갖춘 사람을 일컬으며 둘째는 'episcopoi' (감독) 로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원문에서는 두 단어 모두 항상 복수(plural)로 쓰였는데 이것은 목사를 포함하는 장로들에게 'team'을 이루어 신약 사도교회의 leadership을 담당해야하는 책임이 부여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 간에도 의견 차이가 있었고 논쟁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머리되신 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한 몸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소모되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당회 → 공동의회를 통한 합의 과정은 우리에게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분변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교계 원로셨던 한경직 목사님은 "싸우지 않으면 교회는 자연히 부흥한다"는 신념 하에 당회에서 만장일치의 원칙을 따라 평생 목회를 하셨고,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은 성도들의 사랑이다"라는 믿음으로 예수원의 모든 의사 결정을 별도의 의회에 맡기고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지 말 것을 늘 당부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희교회 일대일 과정 필독서중 하나인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의 15장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세가지 단계’에는 국제 예수전도단 (YWAM, Youth With A Mission) 총재이신 Loren Cunningham 목사님께서 본인을 포함한 4명의 leadership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난 후, 90명의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하지 않고, 그들도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지를 확인함으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정말로 한 몸의 일부라면 우리 각자는 분명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초석의 하나는 우리가 주 안에서 동일한 비젼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남가주 Saddleback 교회의 Rick Warren 목사님은 그의 저서 'The Purpose Driven Church'에서 "건강한 교회의 기초는 '분명한 목적'이며 그 '목적'은 성경적이고, 명확해야 하며, 전수할 수 있어야 하고,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분명한 목적은 사기를 북돋우고, 좌절감을 줄이며 나아가 집중력과 협력을 가져오고, 평가를 도와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Warren 목사님은 이러한 목적에 걸맞는 합당한 원칙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의사결정들이 혹은 전통에 의해, 혹은 특정인물에 의해, 혹은 주어진 재정에 따라서 결정되며 서로간의 관점이 다른 경우 자연 다툼이 생기고 심지어는 갈라서는 일마저도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래 내용은 국제 예수전도단 (YWAM, Youth With A Mission)에서 40여년째 핵심 staff으로 활동하고 있는 Floyd McClung이란 분이 쓰신 책중 "Learning to Love People You Don't Like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사랑하기, 구번역본 제목: 하나되게 하소서)" 라는 책의 8장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을 간추린 것입니다. 

  • 적절치 못한 접근의 유형 
    • 경쟁적 접근 :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전면 배제한 채 완전 정치 구도로 의사를 결정하는 경우입니다. 
    • 갈등적 접근 : 서로간의 고집, 교만, 완강함이 강하게 대립 됩니다. 
    • 회피적 접근 : 현실도피적으로 방관하여 극소수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 바람직한 접근의 필요한 요소 
    • 서로간의 신뢰 : 어려움을 직면하더라도 물러서고 회피하지도 상대방에 대해 절망해버리지도 않아야 합니다. 
    • 열린 마음 : 사랑과 용서의 자세로 논리와 이성에 근거해서 충분한 토론을 거쳐야만 합니다. 
    • 지체들의 참여 : 권위는 '지위'가 아닌 '관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권위는 '인격체'이지 '지위' 또는 '직함'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다른 지체들을 배제한 의사결정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합니다. 
    • 한 비젼 : 비젼(혹은 목적)의 공유가 없다면 올바른 의사결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주님께 의탁하는 자세 : 각자가 자신의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져야 하고, 서로 심사숙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결정 - 불순종의 선택


어떤 이유로건 교회의 결정이 개인의 신앙관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을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개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대략 아래 표와 같은 선택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Woodykos님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또한 이것은 개교회가 교단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혁시키시는 하나님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불러 내시는 하나님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You have a world to win!

이원론(dualism)극복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림

It’s OK not to fulfull your dream!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대함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적절한 상황

리더의 위치에 있을때

벗어날 수 없는 어려움에 있을 때

벗어날 수 있고 신실한 동지들이 있을 때

모델, 예

느헤미야

아합/이세벨 치하의 오바댜

영국 노예해방 William Wilberforce

초대교회 로마 성도들

흑인 노예들

지하교회 성도들

출애굽

미국초기 이민 청교도

탈출한 공산권 성도들

위험

세속주의, 혼합주의, 정복주의

패배주의

격리주의

이론적 지지

대다수의 개혁주의(reformed) 신학자들

Walter Bruggemann

N. T. Wright

Christopher Wright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가는 상황마다, 개인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중 첫번째를 택한 사람의 경우 한국 교회 내에서는 통상 비난을 많이 받습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종을 힘들게 하는 사람”, “당을 지어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사람”, “덕스럽지 못하게 행동하는 사람” 등등…  실제로 그런 불순한 동기로 교회를 해하는 세력도 분명히 있지만, 싸잡아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인들이 목사/장로의 치리와 권위 아래 있듯이, 장로교의 개교회는 감독/노회의 치리와 권위 아래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만약 우리 교회가 노회의 결정에 반하는 성명서를 내고, 뜻을 같이하는 교회들을 모아 규합하고, 교단의 잘못된 부분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한 명의 교인이 개교회를 향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주어야 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반면 불순종의 의사표시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권위를 인정하여 함부로 하지 않는 “자세”를 또한 잃지 말아야겠지요.


끝으로 앞서 언급했던 Loren Cunningham목사님께서 제시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하는 세가지 단계”를 옮겨봅니다.

  • 첫째: 그리스도의 권세로 사탄의 소리를 잠잠케 하도록 명령하고
  • 둘째: 어떤 상상이나 미리 갖고 있던 생각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깨끗케 해주시라고 주님께 구하고
  • 셋째: 하나님께서 택하신 때와 방법으로 말씀하실 것을 믿으며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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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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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ㄷ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3.09 17:23 신고

    "옳고 그름의 토론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권위"가 기존 시스템에서의 위치와 항상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기독인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 더가까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5.03.09 17:48 신고

      권세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고분고분 말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요. 반대와 불순종을 하더라도 권위를 인정하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n Old-Fashioned Church


대학시절 학교 근처에 수요예배 드리러 가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화여대 앞 2호선 지하철 역에서 신촌 시장쪽으로 들어가 달동네와 같은 좁은 골목계단을 조금 올라가 낡고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는 50여평 남짓 옆으로 펑퍼짐한 공간이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면 중간에는 나이드신 여자 성도분들이 한줄로 앉아, 옆으로 퍼진 예배당 양쪽 끝 문을 통해 따로 들어온 남자와 여자 성도들의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고 계셨지요. 


교인들의 '뚝심'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설교 중 간간히 함께 부르는 찬송가를 포함해, 설교시간이 예배 시간의 95% 정도를 차지했는데 보통 2시간 남짓, (참석한 적은 없지만) 주일 오후 예배는 3시간 이상을 드렸는데도 시종 무릎꿇고 드리는 분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금요일 밤이면 연세대학 뒷산에서 교인들이 묵상기도로 철야기도를 드렸는데 산기도로 제법 내공이 쌓인 교회 선배 한분이 따라 가셨다가 손가락만한 왕지네들이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 질겁해서 도망쳐 내려온 일화도 생각나네요.


일반 교회와 비교할 때 없는 것이 참으로 많은 엄청 '구닥다리' 교회였습니다.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누더기같은 옷과, 궂은 음식과, 삭발한 머리와, 흰 무명옷에 검은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고집하고, 직접 농사 짓고 살며 사역했던 평양신학교 출신 초대 목회자의 영향으로 1980년대 중반에도 여전히 소속 된 교파도, 교회 간판도, 종탑도, 십자가도, 성가대도, 피아노를 비롯한 어떤 악기도 없이 시골학교 교탁같은 허름한 나무 강대상에 설교용 마이크 하나 있는 것이 전부인 그런 교회였습니다.  제가 갔던 당시의 담임 목회자께서도 삭발한 머리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으며, 예배실 여러 곳에서 비슷하게 머리와 옷을 한 남자 성도분들이 눈에 띄었고 여자분들의 대다수는 나이와 상관 없이 일제시대때에나 있었을법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파마 끼 없이 쪽진 머리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인터넷에 있는 설교 동영상을 보니, 2004년 소천하신 당시 목회자의 뒤를 이으신 분 역시 지금까지도 같은 스타일을 하교 계시는 것으로 보아 2013년 오늘까지도 교회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타일로만 보면 젊은 사람들이 전혀 끌리지 않을 곳음에도 불구하고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재학하는 신학생들도 여럿 매주 와 예배를 드렸고, 근처에 있는 이화여대 재학생들도 제법 많이 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여성 패션을 주도하던 지리적 상황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패션 청바지, 옷깃 세운 티셔츠, 미니스커트, 심지어는 브라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겨드랑이가 깊게 파인 민소매 등의 차림은 방문객들에게서도 결코 드문것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그 교회의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방문객들이었기 때문에, 처음 그 곳을 찾아갔을때는 극대극의 대비에 너무 놀라 뭔가 한소리 크게 듣게 되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있었지만 그 교회 '구닥다리' 성도분들은 늘 모두 따뜻한 눈길과 인사로 '신세대' 청년들을 환영해 주셨습니다.  그곳은 50년 이상의 세월의 gap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gap을 이질감으로 만들지 않는 신기한 곳이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도 현대인들이기에 처음부터 그런 구닥다리 차림을 한 것은 아닐것입니다.  그저 어느날 그 교회를 저 처럼 그리고 이화여대 학생들처럼 방문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후 어느날 정식 교인으로 등록을 했을것이고, 좋아하고 존경하면 그 사람을 닮고 싶어하고 또 흉내내고 싶어하기 마련이라 다른 교인들과 동일한 정체성과 가치관에 자신도 몸 담고 싶어진 어느날 자신도 그런 구닥다리 차림까지 따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검은 차도르를 칭칭감고 살아가는 중동의 muslim 여인들...   결과적으로 나타난 모습만을 본다면 제가 대학 시절 다녔던 교회의 여자 성도분들과 비슷하게 시대와 동떨어진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의 이유와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옷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 역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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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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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ss Code

내 생각에는... 2013.12.09 18:30

Dress Code

 

교회에서 빠지지 않는 뒷담화의 주제중 하나는 '옷'입니다.  특별히 예배 중 앞에 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거의 끊이지 않습니다.  다들 "예배를 인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라는 관점에서 말을 합니다.  그런 말에 일부분 동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제 마음에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저는 규범을 편하게 생각하고, 교회의 자매분들이 정숙해 보이는 옷을 입어주기 바라고, 제 아들이 바지 내려 입고 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본질적으로 무척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1) 이런 것은 되고 저것은 안되고 식의 rule을 세우고 그에 기준해 판단(judge)하는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교회의 상황과 

(2) 교회 강단 위와 아래를 구분하고 그 위에서의 복장과 행동은 아래서의 그것과는 달라야만 한다는 이중잣대입니다.


옷 입는 것 조차도 조심스럽게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심지어는 설교의 주제로 다루어도 좋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들을 교회에서 조목조목 나열하고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한다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는 49가지 항목"으로 바꿔친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옷이 좀 보기에 그렇다"는 것과 "교회 예배를 섬기는 사람의 옷이 대체 저게 뭐냐"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는 그 사람의 예배하는 "자세"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예배하는 자세에 대해 평가할 자격을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시지 않았기에, 예배라는 주제와 연결해 형제자매의 옷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을 교회가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 교회지만 아무렇게나 와서는 안되는 곳이라는 것은 열심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공유하는 생각입니다.  만약 아무렇게나 와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는 자리에 서는것은 당연히 곤란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 늘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데 힘쓰는 사람이라면, 더 나아가 만약 그 옷이 그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나님 앞에 서기에 가장 적합한 옷이라고 생각해 고른 것이라면 내 생각과, 내 취향과 다르다 하더라도 받아드려 주는 것이 더 옳은 일이 아닐까요?


NIKON | COOLPIX AW100 | Normal program | Pattern | 1/30sec | F/4.4 | 0.00 EV | 13.9mm | ISO-200 | Off Compulsory | 2012:07:09 11:26:58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바로는, 강단 위에 서는 사람의 옷차림은 달라야 한다는 의견들은 한결 같이 "회중들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하는 회중들이 행여 마음에 불편함이 없도록 고민하고 힘쓰는 것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단 위에 서는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다짐해야할 일이지,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형태로 회중들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갑이 하는 것과 을이 하는 것은 다르며, 상대방의 자발적인 동의 없이 강요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처와 쓴뿌리를 남기고, 나아가 이중성을 초래합니다.


회중이 귀중하기 때문에 듣고 존중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것은 아닌지, 혹시 복음의 참된 자유함의 부분을 compromise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는 아닐까 질문을 던져봅니다.  


"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그 분들은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실 때도, 수영장에 가실 때도, 손연재 선수의 리듬체조나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을 보실 때도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혹해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별 생각 없이 보실 분들이 대부분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데도 예배중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다면 상대방의 옷 자체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라기 보다는 혹 그 분이 생각하시는 예배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관념적" 반응은 아닐까요?  


'옷'에 대한 말이 나올때나 제 눈에 보기에 튀는 옷을 입은 사람을 볼때면 "하나님이라면 사람의 옷과 예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실까?" 라고 질문을 던져보곤 합니다만 제 마음 속에서 울려오는 대답은 늘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기뻐하시고 저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작년 여름, 한 찬양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폭 넓은 연령층의 여러 인종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민소매의 옷, 반바지나 청바지는 기본이고 몸 곳곳에 한 문신, 끈만 있는 상의, 슬리퍼, 맨발, 팬티 드러나는 내린 바지등도 눈에 아주 많이 띄었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 사진의 청년에서 몇가지가 지적 대상인지 가장 많이 찾아내시는 분께 후한 상품을? ㅎㅎㅎ).  그러나 그들이 예배하는 모습은 진실로 아름다왔습니다.  보면서 제 눈이 촉촉이 젖어들 정도로...


우리 모두 서로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강단 위에 있는 사람들은 회중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회중들은 앞에 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용납하도록...  서로의 외모를 보기보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고,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우리의 모든 시선을 드리도록...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18~23)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and in all things, charity. (Augu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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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ㄷ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12.16 16:43 신고

    청바지, 팬티, 문신, 슬리퍼(맨발), .. (그런데 상품 뭔가요?)
    그런데, 청바지를 입고 교회를 간 적이 몇번 있는데, 그래서 교회 나이 많은 집사님들이 나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시나? ^^

    • 더가까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3.12.17 16:36 신고

      한두가지 더 있어요. (상품 뭐드릴까요? 뭐니뭐니해도 money? ㅋㅋ) 안수집사님 (equivalent to 다른 교단의 장로님)이 청바지 입고가시면 안좋게 보실 분들 당근 계시죠 아마?

제8 영도 교회


미국에 처음 왔을 때 'OOO 제2침례교회'라는 교회 이름을 보고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북한에서 담임하셨던 교회의 이름은 '신의주 제2교회'였던 것을 기억에 떠올리며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름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름은 생각과 흐름을 반영합니다.  20세기 초 까지만 해도 교회의 이름은 단순히 교회의 소재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의 교인 수가 증가해서 분립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제2교회, 제3교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한글로 이름 짓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 신생 교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과거 한문으로 교회 이름을 짓던 시절에 아주 흔한 이름 중 하나가 'OO 제일 OO교회' 였지요.  오랫동안 단순히 '처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던 '제일' (first) 라는 명칭이 아마도 '최고' (best) 라는 의미로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제2', '제3'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교계의 현실이 교회 간의 협력을 잃어버리고 경쟁하는 개교회주의의 상징처럼 보여 제 맘이 늘 좋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이름을 빌어 내 아이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교회 후배 중 한 명의 이름이 존경받는 목사님의 이름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분립이 아니지만 교회의 이름을 빌어옴으로써 우리 교회도 그 교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을 표시한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과거와 같은 순수한 뜻 외에 혹 단순히 brand 가치를 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소 삐딱한 생각도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어쨌거나 교회 분립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현실, 거의 닫기 직전인 교회로 부임하는 목회자들이 서둘러 하는 것 중 하나가 교회 이름을 바꾸는 현실, 너도 나도 새롭고 참신한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애쓰는 현실은 자신의 뿌리가 되어준 교회와 선배 목회자들을 흠모하여 닮고 싶어하는 마음을 상실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선진들과는 달리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기성 세대 목회자들이 부끄러워 해야 할 부분이며, 동시에 '나는 다르다'라는 차별성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신 세대 목회자들이 겸손해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년 전 부산 출신 한 자매로부터 '부산에는 제2, 제3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 들은 것이 문득 생각나 찾아보았는데 제1 영도교회라는 곳에서 계속해서 분립을 해 현재 제8 교회까지 있고, 각 교회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 하나가 교회 건강의 척도는 결코 아니겠지만 오늘 제 마음에 와 닿는 바는 참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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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ㄷㅇ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8.24 20:23 신고

    이러한 내용이 참신하게 받아들여지는 세대에 산다는 것이... 안타깝지? ;)

    • 더가까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2.08.24 22:19 신고

      응 그렇긴 한데... 뭐 그렇지 않은 세대가 있었겠어? 그나마 이런 내용을 본다는 자체가 신앙의 자유는 있는 세계에서 산다는 증거니까 감사해야겠지? :)

Trend에 대한 딴지...

교회도 유행을 타는 것 같다.  어느 교회를 가봐도 (그리 많은 교회를 가본 것도 아니지만) 다 비슷비슷하다.  잘하려고 노력하며 benchmarking하다보니 그렇게 된것이겠지만... 너무 비슷하니까, 한편 조금 식상하기도 하고, 균형이 깨진 그래서 건강을 잃은 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냥 좀 딴지를 걸어보고 싶어졌다...

성경 전체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대한 거대담론은 무가치한 것으로 몰려 차차 사라져가고, 개인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 국소적 부분들만이 점차 강조되어 가고 있다.  20여년쯤 전에 두란노서원을 중심으로 보급된 QT운동이 그랬고, 요즘 성경공부쪽에서 대세가 되어가는 귀납법적 방법론도 자칫 하면 그렇게 흐를 위험성이 있는 것 같다.  그 자체는 좋은 것 같은데, 구체적인 guideline을 보면 '적용'란에 반드시 뭔가를 결단하라고 하고, '구체적'일수록 좋다고 하고, 'measurable'하면 더 좋다고 한다.  물론 장점도 꽤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골 2:23)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 23:24) 라고 하신 말씀과는 정말 상관 없는 것일까?  3년간 밤낮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

설교강단에서 challenge하며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은 점점 줄어들고 위로하는 내용, 격려하는 내용등 소위 말하는 치유사역 쪽으로 갈수록 치우치는 것 같다.  치유사역이란 것이 중요한 부분이란 것은 적극 동의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과연 이것이 복음에 근거한 치료제를 공급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심리학에 오염된 진통제를 공급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때가 많다.

교회훈련 내용도 3개월이면 재생산(?)이 가능한 쪽으로 몰리고 있다.  일대일, 그리스도인의 성품, 목적이 이끄는 삶, 전도 대폭발, 크리스찬 리더십, 찬양과 경배, 등등...  나름대로 다 좋아 보이는 내용이지만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 점점 줄어가고 있다.  이것을 조미료를 넣지 않은 무공해 유기농 음식대신 점점 입에 익숙해져가는 fast food에 비교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유치부부터 시작해서 Youth까지 가사 내용을 접고 듣는다면 구분이 거의 가지 않을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시종일관 가득차 있다.  분위기로 보면 거의 (왕년에 다니던) 디스코텍 수준이고, 아이들 프로그램으로 미국 전역에 소문난 한 교회는 교회라기 보다는 amusement park같은 분위기다.  교회에 친숙하게 하여 끌어들이는 것에는 효과적이겠지만, 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드리는 헌신까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나는 교회를 늦게 다니기 시작했지만, 내가 아는 많은 친구들이 국민학교때 혹은 중학교때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고 하는데...

한달쯤 전 kinder에 다니는 둘째가 'C'로 시작하는 단어 공부를 학교에서 하면서, 'Christmas'를 고르고 'The day Jesus was born'이라고 힌트를 주었는데 반 아이들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할머니 선생님께서 답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Christmas는 Santa Claus에 대한 "믿음"의 고백의 날이 되고 말았다.  삼일전 Christmas Eve에 한 교회의 성탄 축하 예배에 참석했다.  Youth 아이들이 나와서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을 불렀다.  그 후 찬양팀이 현대풍으로 부르는 carol을 몇곡 들려주었는데 그 중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있었다.  음악적으로 뛰어났고 그래서 사람들도 많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전혀 고요하지도 거룩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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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우맘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0.08.11 20:15 신고

    윗글은 참 동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최근에 만나 뵌 어떤분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

    :) "더 가까이"가 누구신지 저도 이제 알겠네요! 예전에 여기에 몰래 와서 <그바보청년의사> 서평 읽고 그 책을 주문해서 읽었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활동이 뜸하셔서 안 왔는데 오랜만에 오니까 더 읽을 거리가 많네용!

  2. 더가까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0.08.12 21:06 신고

    아이고, 여기까지 방문을 다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좀 더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Tent-Making 목회


      "그 뒤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본도 태생인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다. 아굴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갔는데, 업이 서로 같으므로, 바울은 그들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을
      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18장 1~3절)


'Tent-making'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면서 선교를 했던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자비량(自備糧, 생활비를 자비로 충당하는 것)사역을 일컫는다.  목회자들에게 입국이 허가되지 않는 지역에서 본인의 전공분야 관련 직업을 가지고 들어가 선교를 하는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tent-maker로서 일하고 있기에 선교 분야에서는 전혀 생소하지도 않고, 이미 보편적인 개념이 된지 오래이다.  그러나 10여년 전 두란노 서원에서 실시한 설문 결과에 의하면 목회자가 별도의 직업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이나 일반 신도들이나 큰 거부감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여진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작용하고 있겠지만, "목회자"="신약시대 레위인"이라는 (성경적 기반이 부실한,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고와, "성(聖)"과 "속(俗)"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가 어느정도나마 기여하고 있으리라.

목회에 대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신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한국인 사역자들은 전에 가졌던 삶의 기반으로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도, 선배 목회자들도 한 목소리로 외친다.  목사가 별도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라고.

정말 그런 걸까? 하고 다시 질문을 던져 본다.  혹, 이런 신념이 천주교의 신부가 되려면 반드시 독신 서원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닐까 반문해 본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예배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만을 기뻐하시고 나의 생활비를 위해 일하는 것을 덜 가치스럽게 생각하실까?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問: 국민학교 교사와, 경찰과, 목사가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하면 누가 돈을 낼까?  答: 식당주인!"
Anti-기독교인들이 위와 같은 농담을 하는 것이 혹, 빈궁함과 부족함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삶이 너무 오래다보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는대로 '받기'에만 익숙해져버린 목회자들의 책임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역력하게 영성이 고갈되고 메말러 버린 목회자들을 종종 본다.  이 경우,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거의 예외 없이 그 사역하는 교회도 침체되고 갈등하여, 뒤에서 혹은 대놓고 목회자를 비난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만약, 그 자리가 무보수 였다면, 그래도 교인들은 그 목회자를 저렇게까지 공격하고 괴롭힐까?  저런 상황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 과연 목회자 자신의 소명에 대한 믿음과 부담 때문일까?  그 자리가 무보수 였다면, 그래도 목회자는 계속 저렇게 수 많은 교인들과 충돌하며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사임하는 것이 가족의 생계에 대한 걱정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저렇게 고갈된 영성을 무릅쓰고 설교단을 지키려고 할까?  절대화 할 수도, 내가 알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마 아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때가 더 많았다.

고갈되고 탈진한 목회자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있다.  사역을 무리하게 계속하려고 하기 보다는 쉬고 안식하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비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가족의 생계가 당장 걸려 있으니 내려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렇게 침체된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임하기도 힘든 노릇이고...(그 정도 믿음이 남아 있었다면 그렇게 고갈되지도 않았을테니까) 교인들은 월급이 아깝다고 아우성이고...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결과로 교회에 나타나는 상황은 정말 참담하기만 하다.

상황에 근거해서, "그러니까 차라리 tent-making 목회가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시되는 full-time목회가 성경적 근거도 빈약하고, 현실
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교회 size가 커질 경우 tent-making목회로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냐고.  당연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실제로 잘 아는 후배 한명은 교수직과 목사직을 병행하다가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다.  아마도 대안은 협동+cell 목회일 것이다.  교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많은 행사들도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 없애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인들이 관객이 아닌 출연자로 사역에 동참해야만 할 것이다.  교인수 증가하는 것도 더디어 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유리하는 양떼와 같은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도, 그 군중의 숫자 자체에 주목하지 않으셨다.  그 분의 관심은 '교인 만들기'가 아니라 '제자 삼기' 였기 때문이다.

Full-time 일변도의 목회는 superstar 목회자, superman 목회자가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운 현실로 이미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목회자가 먹고 살만한 괜찮은 직장으로 인식되는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다.  이제는 많은 경우에(다 그렇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목회한다는 것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헌신하는 자리로 인식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끊이지 않는 담임목사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교회의 힘을 소모시키고 나아가 불신자들에게 조롱거리를 제공하는 단골 메뉴가 된지 오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비성경적인 자리를 놓고 우격다짐을 하면서, 그것이 소명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몸에 죄를 쌓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에 대한 calling을 주셨다고 믿는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당신의 tent를 만들 공구를 다 태워 버리라는 말씀을, 교수님이나 선배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셨는지에 대해서 다시 확인해 봐야지 않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믿음으로 순종하되, 잘 모르겠다면 계속 당신의 tent를 땀흘려 만드는 것이 오히려 합당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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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benezer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8.08.01 00:27 신고

    '밥줄'의 문제인 만큼 당사자들에게 특히 민감한(?) 부분일 수 있는 토픽에 거침없는 펜을 드셨네요.. 존경스럽습니다. ^^

    좋은 포인트들을 많이 언급해주신 것 같은데요.. 사실 요즘 주변에선 이 부분에서 상당히 자유한 생각을 가지신 목회자분들도 꽤 보는 것 같아요. 너무 좋은 분들만 알고 지내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만... ^^;

    제 개인적으로는, 위의 일들에 연관된, 그치만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의 컨썬이 좀 있는데요...
    그것은, 이런 '먹고사는' 일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형태의 사역자이든 '자기 자신'이지 못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을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일을 구조적으로 강화하는 데에 가장 크게 일조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가운데 '진짜'는 점점 더 적어져가는 시대는 아닌지.. 나는 과연 얼마나 '진짜'인지.. 뭐 그런 생각들을 할 때가 좀 많이 있거든요..

    주의 영이 함께하시는 곳에서 누리는 '자유함' 안에서, 가난함에 처하든 부유함에 처하든 정말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일체의 비결'을 행사하며 겸손히 꾸준히 소명을 이루어가는 삶일 수 있기를 다시금 소원해봅니다.

  2. 더가까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8.08.02 14:14 신고

    예, 동감합니다. 목회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글을 썼지만, 저 스스로를 포함한 교인들도 결코 자유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요즘 제 주변 상황을 보면서 답답하고 안타까와 끄적거려 봤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옆에서 보기 안타깝습니다....

적당히 안정된 삶이 얼마나 허무하게 보이는지....

이제 부터 고민하려고 한다.
2-30대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던 저너머 지평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잡고 있는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허무감 같은 것을 느끼겠지..
안정은 결코 안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 10년동안 뼈저리게 배웠지...
오히려 흔들리는 그 때가 바로 도약의 때라는 생각이 요즘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지혜인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이지만, 거기에 봉하나를 박아 넣고,
연결하기만하면, 물레방아가 되어, 그 힘을 유용한데 쓸수 있는 것 처럼...

우리 인생에 주님의 뜻이라는 심지가 박히면, 분명 우리의 반복된 인생살이는
하나님 나라의 동력으로 크게 사용될줄로 믿게 된다.

[출처: http://yedam.net/]
by 김도형 목사
Beaverton, OR 소재
Village Baptist Church 한어부 (http://www.vbckf.org) 담당
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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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문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하나님이 신도의 마음에 임하실 때는 교회 내에 설치한 제단 위에서 임하시지 않습니다. 혹 고요한 수풀 속에서 혹은 큰 물결이 이는 해변에서 또는 회개의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침상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나는 교회의 절대적 불필요를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세상의 교회론자가 교회가 행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교회의 필요를 주창하는 것을 볼 때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 신자들은 열심히 협동일치의 필요를 말합니다. 나도 물론 그것에는 대찬성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들 가운데 과연 화합일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만 이것뿐입니다. 만일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이 소위 기독교 교회라는 것은 결코 화목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는 목사가 서로 반목(反目)하고 신도가 서로 다투며 참소가 있고 모함이 있고 파당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때로는 구역질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요사이 어떤 신자가 나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불신자 사회에 있었을 때에도 아직 한 번도 교회의 형제들 사이에 있는 그러한 끈질긴 싸움을 본 적은 없습니다"라고. 나 자신의 경험도 같은 것입니다. 나의 생애에서 내가 만났던 가장 나쁜 사람은 교회신자였습니다. 그의 궤계, 그의 간핵은 도저히 불신자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물론 여러분의 이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의 교회란 결코 화락일치의 마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일치가 만일 있다면 여러분의 교회 내의 일치에 그치는 것입니다. 널리 다른 교회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 나라에 대표적인 교회만 하더라도 40이 넘는데 그 다수의 교파사이에 실로 차마들을 수 없는 불화 경쟁이 있는 것은 당신께서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실상은 기독교신자는 아니다"라든가 "정통교회는 우리 교회뿐"이라든가 그밖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을 그들 교회 신자는 자기 교회 이외의 교회에 대해 하는 것이 아닙니까?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그렇다. 진정코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감독교회는 퀘이커교회를 주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신교와 구교 사이에 개와 고양이 보다도 더한 질투와 투쟁이 있느냐 말입니다. "형제와 연합하여 화목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성서의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조합교회와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관찰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 성스러운 가르침에 가장 좋은 반증을 얻으시고 눈물과 함께 당신의 확신을 더 굳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무교회 신자에 『성도의 교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못입니다. 우리들 사이에도 지극히 두터운 교제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회원증이 없으므로 서로 이것을 보이면서 교제를 구하는 편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주를 믿고 그 구속을 받은 자는 회원증을 보이지 않아도 결국에는 깊은 영적 형제임을 서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게 된 후의 우리들의 교제는 이것을 맛보지 못한 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칙에 복종하여 된 일치는 아닙니다. 이것은 성서에 말하는 바 『영의 일치』(엡 4:3)입니다. 그리고 이 일치는 특별히 반드시 무교회신자 간에만 한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속한 자, 속하지 않은 자의 구별 없이 무릇 같은 영으로써 같은 주의 구속받은 자 사이에 있는 일치입니다. 진심으로써 주를 믿는 자는 모두 우리들의 형제입니다. 우리들은 "귀하는 언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어 그 사람의 신자냐 아니냐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품성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의 감화력을 인정하여 그런 후에 그의 기독교신자임을 알고 그를 향하여 우리의 교제를 시작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에 대해...]

미국 농학자인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과대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찌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찌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에서의 사회운동과 앰허스트대학교(Amherst) 유학으로 신앙의 실천의 중요성과 신앙에 대한 생각을 굳혔고, 하드포드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성직을 특권으로 보아서 성직자가 되지는 않았다. 1888년 일본에 돌아왔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1891년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봉독식 때 정성 들여 예를 다하지 않은 '불경사건'으로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찌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등을 저술했다.

또한 《만조보》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하는등 바쁘게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라고 해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찌무라 간조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이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Posted by 더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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